고난이 없다면 정의의 영성이 결핍됨을 보여주는 것

예수께서는 공생애 3년 간 항상 제자들과 식탁에 함께했다. 그들의 밥상공동체는 단순히 육체를 위한 식사 에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삶을 펼쳐나가는 사랑과 나눔의 모델이었다. 그래서 성서에는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민중들과의 먹고 마심과 그것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예수는 안식일에 먹는 문제를 참 안식일의 의미로 가르치셨고,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려오는 전통을 중요하시는 위선에 대해 질타하셨다.

우리가 잘 아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도 제자들이 점심에 먹을거리를 사러간 사이에 벌어졌고 생명의 물을 먹고 마심의 진리로 이어졌다. 이처럼 성서에서 먹는 이야기 는 진리를 드러내는 통로였다. 성찬식도 마찬가지로 진리를 드러내는 진리의 식탁이다.

우리는 최초의 성찬식의 역사적 배경이 곧 예수가 잡히시던 전날 밤 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곧 첫 성만찬은 일상의 만찬이나 혹은 축제의 식탁이 아니라 고난의 현장을 맞이하는 사뭇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성만찬이 예수의 죽음이 찾아오기 바로 전날 밤에 행해진 만큼 이 식탁에는 예수가 맞이할 고난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더욱이 유월절 식사가 갖는 고난에 대한 회상과 맞물려 있는 첫 성만찬에는 예수의 삶이 처한 극한 고난의 의미가 깊게 새겨져 있다.

우리는 그날 빵과 포도주를 자신의 몸과 피로 직유하면서 말씀하시던 예수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날 예수는 이미 자신의 고난의 끝을 보고 계셨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보고 함께 나누는 식탁에서 오늘 우리는 성찬식에 배어 있는 고난의 영성과 대면하게 된다.

바울은 이 성찬식에서 표현해주는 고난의 의미를 다시금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 (고전 11:16)

오늘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예수의 고난만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성찬식은 분명 예수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삶으로 채워가는 ‘고난의 영성’을 심화시키기에 충분하다. 물론 예수는 성찬식에서 앞으로 일어날 자신의 고난을 설명하거나 침울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이 빵은 내 몸이고, 이 잔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내 피다 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에서 닥칠 고난을 겁내거나 피하지 않는 당당함을 엿볼 수 있다.

이 모습은 고난의 영성이 깃든 자의 모습이다. 그의 얼굴에는 고난을 한낱 고통으로 감내하지도, 그렇다고 고난의 뜻을 알지 못해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뜻과 고난 저 너머에서 오는 새로운 생명을 바라보는 희망의 눈빛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예수가 성찬식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고난의 영성은 단순히 고난을 한낱 수동적으로 수용하고 감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가 보여준 고난의 영성은 예수 자신이 죽음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적극적으로 기다렸듯이 우리도 고난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맞이하라고 촉구한다.

고난의 영성은 정의를 갈망하는 '정의의 영성'

고난의 영성을 지닌 사람은 고난의 깊은 뜻을 놓치지 않고 고난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돋아남을 본다. 고난의 영성은 바로 우리가 맞이하는 고난의 깊은 뜻을 되새길 수 있는 내적인 힘이며, 그 뜻을 펼쳐나가게 하는 힘이다. 고난이 지닌 큰 뜻을 품게 되면 그 고난은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 된다. 하나님나라를 거부하는 세력과의 부딪힘은 피할 수 없으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고난은 오히려 우리가 하는 일에 확신을 갖게 한다.

고난의 영성은 고통과 고난이 지닌 어려움의 상태만을 보지 않고 그 안에서 생명과 희망을 읽게 한다. 그래서 고난을 올바르게 맞이한 이는 몸과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다. 그러한 고난의 영성을 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거리낌 없이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성찬식은 고난의 영성을 드러내며 이 고난의 영성은 정의를 갈망하는 정의의 영성 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나라의 의를 찾는 자는 고난을 받게 마련이다.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이 없다면 이미 정의의 영성이 결핍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찬식은 오늘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 당하는 고난의 깊이 를 되새기게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죽음에 대한 반복적 선포를 통해 깊이를 더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난의 영성이 있기에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펼쳐나가는 해방의 영성이 가능하다. 고난의 영성은 해방의 영성을 힘 있게 하고, 해방의 영성은 고난의 영성을 옹골차게 한다. 그것은 진정한 생명의 문화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주님의 죽으심 없이 부활이 없다면,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당당한 선포 없이 어떻게 우리가 부활을 믿고 살겠는가? 고난의 영성의 깊이 없이 어떻게 그의 죽으심을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으며 그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고난의 영성이 깊을수록 예수 죽음의 의미를 더 깊이 느끼고 전할 수 있으며 또한 그의 죽으심을 당당하게 선포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의 고난의 영성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 김진 목사 (예수도원 이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