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념하며 이것을 행하라”

우리는 성찬식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앞에서
다시금 삶을 바치는 헌신의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의 희생과 고난을 경험하는 이 시간은
우리 자신을 그 앞에 다시금 헌신하게 한다.

나를 기억하라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며 “나에 대한 기억 속에서(기념하며) 이것을 행하여라”(Do this in memory of me, 눅 22:19)고 말씀하셨고, 바울 또한 예수의 이 말씀을 강조하고 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 11:24~25)

아마도 예수는 시간이 오래 지나면 우리가 예수에 대한 기억 없이도 성찬식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아셨는지도 모른다. 예수의 이 말은 그에 대한 ‘기억’ 없이 그저 하나의 예식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이며 동시에 예수에 대한 기억 없이 이 예식을 행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예식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찬식에 참여할 때 예수를 기념하고 또 기억하는가? 과연 예수의 무엇을 기억하는가?

‘기억’이라는 행위는 기억하려는 대상對象이나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을 전제로 한다. 기억은 어떤 정보를 암기暗記하는 행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기억하는 것은 성서에 나타난 대로 그가 어떤 모습을 보이셨고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와 관련된 사건에 대한 단순한 암기나 연상聯想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말한 기억은 그의 삶과 구원 사건을 함께 체험하면서 그와 깊은 관계 속에서 나눈 삶의 나눔이 전제된 것이기에 그의 전 삶과 연관된 체험적 사실을 되새기는 것을 의미한다.

‘기억’이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는 ‘리코르다리recordari’인데 이때 re-cor의 뜻은 ‘다시 마음으로 돌아간다to bring back to the heart’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그것(기억)은 단순히 지성의 행위가 아니라 뜻과 마음의 행위다. 기억한다는 것은 사랑을 갖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의 삶 전체를 사랑으로 그리워하는 것이며, 현재의 내 삶으로 다시 실현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예수를 기억하며 성찬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우리가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의 삶을 깊이 명상해야 한다. 성찬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리스도의 영의 중재하심을 믿고 그의 삶이 내 온 삶에 각인되고 기억되도록 깊이 기도하며 명상해야 한다.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하신 일을 회상하는 것이다.

‘예수를 기억한다’고 할 때 우리는 2000년 전의 예수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예수 당시의 제자들처럼 몇 년 간 함께 먹고 자고 지낸 구체적인 ‘기억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그를 기억한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런 딜레마 때문에 결국 우리가 성서에 기록된 문자로 전해지는 과거의 예수를 기억하는 것뿐 아니라 현재 우리가 예수체험을 통해 ‘기억거리’를 만들지 않는다면 예수를 실감나게 기억하고 싶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성찬식이 감동이 없고 성찬식을 통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오늘 체험하고 있는 예수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예수는 기억될 수 없고, 기억되어서도 안 되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재판, 종교재판을 받아 사형을 받은 위험 인물이었으며, 대외적인 활동이 실패로 끝나버린 절망스러운 청년 중에 한 사람이었다. 예수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위대한 행적이나 말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그에 대한 추억거리를 더듬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죽은 예수를 몇 초 동안 묵념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를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의 체험 속에 살아 있는 예수, 내가 경험한 예수를 새롭게 만나는 행위다. 그의 아름다운 말, 멋진 기적을 기억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그리스도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를 기억한다는 것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소극적인 회상이 아니라 그의 삶을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적극적인 행위다.

그를 기억한다는 것은 또한 그를 죽음으로 몰아낸 죽임의 문화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오늘 우리가 ‘예수를 기억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펼치시는 생명의 말씀과 하나님나라 운동이 현재도 계속되고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고, 그 생명이 나와의 관계 속에서 변치 않고 살아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억은 기억하는 행위 그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공급함으로 예수가 보여준 생명의 삶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회복시켜준다.

그 기억 속에서 그와 우리와의 생명의 관계가 다시 확인되고, 그로 인해 우리는 또다시 변화되어간다. 성찬식은 이런 기억이 나눠지는, 곧 예수체험이 드러나는 시간이며,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의 몸과 피가 보여주는 예수현실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예수, 당신은
누구나 들어설 수 있어도
아무나 갈 수 없는 거친 좁은 길
찬란한 빛 잠재우고
어둠조차 품어내는 찬 새벽길

예수, 당신은
우쭐한 마음과 영악한 기운으로
돌아다닐 수 없는
사실이면 사실인 듯
아련하면 아련한 듯 걷게 하는
황톳빛 꿈길

다시 되돌아갈 수도
건너갈 수도 없어 꼼짝없이
떠밀려가게 하는 자유한 물길

주님, 당신은
온 천지 우주를 휘감아 돌고는
있는 듯 없는 듯
바람따라 사라졌다 되살아 펼쳐지는
저 구름 사이 포근한 하늘 길
당신의 은은한 눈빛 머물고
당신의 생명 몸짓 넘실대는,
살붙이 사랑 멈추지 않는
나 서 있는 끝 길

- God의 길과 ‘god’의 길

기억은 헌신이다

예수에 대한 기억이 단순히 그에 대한 추억追憶이 아니라면 참 기억은 그를 향한 우리의 헌신을 촉발시킨다. 왜냐하면 ‘나를 기억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결국 ‘나처럼 행하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5)

그래서 기억은 헌신으로 이어지고, 헌신은 예수 체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영적인 기억을 쌓아가게 한다. 예수 기억과 우리 헌신의 만남은 성찬식에서 예수의 몸으로서 빵이 쪼개지는 상징적인 모습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 모습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쪼개어 우리에게 생명을 나눠주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 또한 그의 삶을 본받아 남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나누는 헌신의 삶을 다짐하게 된다.

성찬식은 예수께서 자신을 ‘산제사의 제물’로 드렸듯이 우리 또한 살아 있는 산제사로 드리는 삶으로 결단하는 시간이다. 나 자신을 깨뜨리고 쪼개고 비워서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제사로서 삶을 확증하는 순간인 것이다.

예수의 희생과 고난을 경험하는 성찬식은 우리 자신을 그 앞에 다시금 헌신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식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앞에서 다시금 삶을 바치는 헌신의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자신을 헌신한다는 것은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남을 위해 자신을 하나의 선물로 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헌신은 일방적인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헌신은 자기성화의 길이다. 영어의 ‘희생犧牲’을 의미하는 단어 sacirfice는 sacrum facere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문자적인 뜻은 ‘성스럽게 하다to make sacred’ 또는 ‘신성하게 하다to consecrate’이다.15) 이 말을 풀어서 이해하면 우리가 성스러운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헌신은 바로 자신을 성화시키는 길임을 알 수 있다.

성찬식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예수의 삶이 압축되어 있다. 예수는 자신의 몸과 피를 하나님께 받치므로 거룩한 삶의 극치를 보여주셨다. 도덕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의 순결과 거룩함을 성숙시켜나갈 수도 있지만 자신의 부요함과 교만, 욕심을 모두 내려놓는 결단으로 이어지는 진정한 헌신은 우리의 존재를 성화시켜나가는 지름길이 된다.

성찬식을 통해 다시금 자신을 헌신하는 자기성화 과정은 또한 단순히 종교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내면의 성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사회에서 억압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투신을 통한 성화로 이어진다. 성찬식에 참여하는 공동체의 헌신은 사회에서 고난 받는 이들과 동참하고 그들의 참 해방을 향한 실천 활동으로 번져나갈 것이다. / 김진 목사 (예수도원 이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