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자네집 정원 13]

(*그동안 연재하던 김명곤 기자의 농사일지 ‘아톰의 정원’을 ‘옥자네집 정원’으로 고쳐 연재합니다. '옥자'는 어린 시절 김 기자를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가사 도우미 아지매입니다.)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 올 봄 옥수수 농사를 지을 양으로 옥수수 낱알을 사다가 빈 땅에 박어 두었더니 봄비에 순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우후죽순처럼 여기 저기 뽀족 뾰족 솟고 있었는데요, 하 여리고 귀여운 고놈에 홀딱 빠지고 말았습니다.

더욱 즐겁고 신기했던 것은, 그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잿빛 퇴깽이(귀여운 토끼를 이르는 전라도 방언)가 울타리 구멍을 뚫고 들어와 옥수수 밭고랑을 타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맑은 눈을 가진 조그만 퇴깽이가 아침 저녁으로 출입하는 것을 보면 머릿속까지 맑아지고 절로 미소가 나왔습니다.

처음엔 뾰죽입으로 옥수수 여린 잎을 뜯어먹는 모습이 귀엽기만 해서 “요놈, 적당히 먹고 가그라!” 그러며 놔 두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와서 서리를 했으나 몇 군데만 듬성듬성 파먹는 정도였죠. 20~30미터 거리에서 망원경으로 놈의 눈과 입을 보는 것도 즐거웠고, 먹는 모습이 정말 앙증맞았습니다.

퇴깽이놈을 막으려고 나무로 만든 날렵한 맹견과 돌로 만든 고양이를 밭 가장자리에 세워 두었습니다. 며칠 간 뜸한 것을 보고는 ‘별일 없겠지’ 그러며 딸애가 사는 펜실베이니아 랭카스터로 여행을 갔습니다. 전기, 전화, 자동차 없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랭카스터 애미쉬 마을도 때마침 옥수수밭 천지였습니다.

그런데요 플로리다로 돌아온 날 아침, 뒷마당 옥수수밭을 보고는 기겁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이고, 그 귀여운 것들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집을 비운 사이에 몽땅 서리를 맞은 겁니다. 오래 전에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빈 땅만 있으면 심는 버릇이 있어서, 유학생 시절에도 연 40달러를 내고 큰 방 서너 개 정도의 농대 땅을 빌려 농사를 지은 적이 있는데요, 배추농사가 정말 잘 되었습니다. 어렷을 적 눈동냥 실력으로 키운 것인데도 시장에 내다 팔 만큼의 탐스러운 포기배추를 거둬낼 수 있었습니다.

어느해 배추농사에서 겪었던 일을 잊지 못합니다.

초겨울 바람이 불면 모두 뽑아서 동네잔치할 꿈을 꾸고 있었는데요, 어느날부터인지 한 두 포기씩 싹둑싹뚝 잘라낸 흔적이 보였습니다. 시험기간이 끝난 어느날 아침, 밭두렁에서 털썩 주저않고 말았습니다. 어느놈인지, 배추꼬랭이 몇 개와 홀쭉한 못난이 배추 몇 포기만 남겨두고는 포기 배추만 몽땅 잘라 간 것입니다.

익명의 배추도둑으로부터 받은 충격은 짧고 강렬해서 황당, 공허 그 자체였습니다. 옥수수 도둑으부터 느낀 감정은? 씁쓸한 뒷맛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고 오래 갈 듯합니다. 오냐, 오냐 받아들인 맑은 눈의 퇴깽이 녀석이 처음 짓는 옥수수밭을 망가뜨렸으니… 망가진 꽃밭을 서럽게 노래한 김민기의 심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그래도 한결같이 살이 되고 힘이 되는영양소를 제공하는 식물들이 늘 농장을 채워주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이웃들과 ‘노나메기’할 정도로 늘푸르게 자라는 부추, 항상 꼿꼿하게 자라서 듬직한 대파, 늘 고소한 맛으로 식욕을 돋구는 들깻잎, 진녹색만으로도 보는 이를 힐링하는 반들반들 풋고추, 톡쏘는 맛으로 정신 바짝 들게 하는 달래… 이들이 크게 위안을 줍니다. 옥수수 농사 한 해 ‘패농’으로 옥자 네집 농장이 ‘폐농’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옥수수는 내년에 또 심으면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