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이민사회, 소모적 힘겨루기 그만둬야

‘이민을 왜 왔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이민자들을 분류하면 대략 세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몰아서 몇년에 걸쳐 영주권 수속을 하고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이민 온 경우다. 외항선을 탔다가 기회를 맞아 하선하여 눌러 앉은 경우, 상사 주재원으로 파견 나와 있다가 ‘살기 좋아서’ 귀국을 포기한 경우 등도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는 불안정하고 혼미한 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피해 미국행을 결심한 경우다. 몸서리치는 6·25 동족상잔, 4·19의거, 5·16 군사 쿠테타, 5·18 광주학살 등으로 이어진 정치 사회적 혼란에 진절머리를 치고 ‘자의반 타의반’ 도피성 이민을 한 경우가 이에 속할 것이다.

세번째는 특수 목적으로 이민 온 경우다. 선교를 목적으로 이민 온 성직자들, 학위 취득 후 국내 여건이 여의치 않아 눌러앉은 유학생 그룹, 혹 ‘국위선양 차’ 이민 온 체육인들도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두번째나 세번째 경우의 이민자들 조차도 돈을 악착같이 벌도록 몰아가는 이 나라의 시스템과 분위기를 타고 목숨 걸고 돈벌기에 매달리게 되고, 표면적으로 ‘돈 돈’ 하기가 껄끄러운 부류조차도 역시 돈의 흐름을 적당히 타며 ‘잘먹고 잘살기’ 부류에 합류하게 되는 것 같다.

결국, 우리 이민자들은 ‘기회의 나라’ 는 ‘돈 벌기에 가장 좋은 나라’ 로, ‘직업에 귀천이 없는 나라’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가장 알아주는 나라’ 로 인식하는 데 1,2년도 채 걸리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열심히 일해서 부를 축적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있는 있는 일이나, 부의 축적 과정이나 의미있는 분배까지를 깊히 생각하는 이민자들은 그리 많지 않은것 같다. 특히 돈모으기에 함몰된 이민자들이 이민사회를 ‘노가다 판’ 사회로 만들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오로지 돈 벌기만을 목적으로 뜨내기들이 잠시 만나는 노가다 판은 상대에 대한 배려도 최소한의 질서도 없으며, 앞뒤를 안 가린 돈 벌기가 끝나면 금방 남남이 되어 버린다는 특징이 있다. 당초 노가다판은 ‘계산’외에 '관계의 깊이'란 도대체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돈을 모을만큼 모은 이민자들과 돈 모으기에 다소 흥미를 잃어버린 이민자들에게 다음으로 다가오는 것은 ‘파워(힘)를 향한 향수’ ‘명예를 향한 욕구’인것 같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존경(대우)받고 싶은 욕구’라고 갈파한 심리학자 아브라함 마슬로우의 분석은 이민사회에 그대로 들어 맞는 것 같다.

이민사회에서 애초 '민주'나 ‘평화’는 물론, ‘통일’ 과도 상관없는 인물들이 평통위원 인선때만 되면 이 기관 저 기관 줄을 대고 법석을 떠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봉사를 한답시고 출마한 한인회장 후보끼리 벌이는 흑색선전, 비방, 인신공격, 금품살포 등 타락한 선거 풍토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전·현직 한인회장들이 ‘친목을 목적으로’ 결성했다는 연합회 안에서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벌이는 소모적 힘겨루기를 보고 있노라면 마슬로우의 분석이 얄밉기까지 한 정도이다.

이같이 힘을 향한 투쟁 과정에서 파생된 상호 불신은, 남북간의 불신 만큼이나 깊어져 거의 종교적인 수준의 참회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고쳐지기 힘든 이민사회의 고질병이 돼 버린지는 꽤 오래인 것 같다.

이민사회, 돈 좋고 힘도 좋지만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돈이요 힘인가. 이 나라를 찬찬이 살펴보라. 아직도 능력껏 일하고 근검·절약해서 분배의 정의를 실천하며 사는 청교도 후예들이 보이지 않는가. 자원정신(Volunteerism), 기부문화(Donation Culture)가 축을 이루며 자본주의의 폐단을 상쇄시키고 있는 뒷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 김명곤 기자
(1999년 9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