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시오니즘을 분리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뉴욕) 김기대 목사(미주 뉴스앤조이 논설위원) =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비극을 보며 세계 시민들은 할 말을 잊고 또 잃는다. '제노사이드'라는 단어가 일상어가 되어버린 이 상황은, 이스라엘 건국 초기에 존재했던 또 다른 가능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주류가 되지 못했던 한 지식인의 목소리, 바로 유대 신비주의 연구의 대가 게르솜 숄렘(Gershom Scholem)의 사상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숄렘이라면 현재의 시오니즘이 이 지경까지 이르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설은, 단순한 희망적 사고가 아니라 핍박받던 유대인들이 꿈꾸던 나라와는 너무 멀어졌다는 것에 대한 회한이다.

숄렘은 시오니즘의 열렬한 지지자였지만, 그의 시오니즘은 당대의 주류와는 확연히 달랐다. 당시의 시오니즘은 수천 년간의 디아스포라를 끝내고 유대 민족을 '정상적인' 민족국가의 일원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벤구리온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시오니즘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숄렘은 이 '정상성'이라는 개념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망상이라고 경고했다.

북한을 향해서나 쓰일 법한 ‘정상성’, '정상국가’라는 말은 본래는 이스라엘이 원조다. 오스만 제국 스미르나 (오늘날의 튀르키예 이즈미르) 출신의 사바타이 츠비(Sabbatai Zevi)는 1646년 그의 나이 20살에 스스로 메시아라고 선포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추종하며 세력이 커지자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4세는 사바타이 츠비를 체포해 개종을 강요했다. 놀랍게도 츠비(그의 이름을 한글로 ‘제비’로 표기하는 문헌도 있다)는 1666년 이슬람으로 개종, '아지즈 메흐메트 에펜디'라는 이름을 받고 술탄으로부터 녹봉까지 받았다. 이 변절 소식으로 메시아 운동은 순식간에 와해했다.

사바타이 츠비의 변절은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상태가 비정상적이고 위험하다는 인식을 부각시켰다. 유대인이 자신의 운명을 타자의 손에 맡긴 디아스포라 상태에서는 사바타이 츠비와 같은 환상적 메시아사상이나 박해에의 취약성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퍼져나갔다. 이 변절은 유대인의 구원은 정치적 주권을 가진 '정상적인 국민'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상, 즉 정치적 시온주의가 발흥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 유럽에 신구교가 자신들의 종교에 따라 국가를 세우기로 한 1648년의 베스트 팔렌 조약도 영향을 미쳤다. 유대인들만의 종교를 위한 국가, 다시 말해 정상국가의 필요성을 느낀게 현대의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비정상성의 시초다.

독일 출신의 게르솜 숄렘은 발터 벤야민을 비롯해 프랑크프루트파 학자들과 교류하다 1923년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국립도서관의 도서관장을 지냈다. 그는 유대 민족의 본질이 보통의 국가처럼 정치적 주권이나 군사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디아스포라의 고통 속에서 연마된 영적, 윤리적 사유와 끊임없는 메시아적 구원에 대한 열망에 있다고 믿었다. 시오니즘이 단순히 유럽식 민족주의(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생겨난)를 답습하여 힘의 논리에 기반한 보통의 국가를 세우려 한다면, 그것은 유대 민족 고유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일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숄렘에게 이스라엘 땅으로의 귀환은 단순한 영토 회복이 아니라, 유대 민족이 자신들의 윤리적, 종교적 소명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되어야 했다.

숄렘의 이러한 시오니즘 이해는 그의 학문적 성과, 즉 카발라(Kabbalah) 연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숄렘 이전, 카발라는 주류 학계에서 배척받는 미신적이고 비합리적인 사상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숄렘은 평생에 걸쳐 방대한 고문서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며, 카발라를 엄밀하고 실증적인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유대 신비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며 이 분야를 새롭게 개척했다.

숄렘은 카발라가 단순히 비주류의 사상이 아니라, 유대 민족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온 '살아있는 전통'이자 유대인의 심층적인 정신과 영적 에너지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보았다. 그는 유대 민족이 율법과 이성에 집중하는 주류의 길을 걷는 동안, 카발라를 통해 신비적이고 영적인 갈망을 해소하며 메시아를 기다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카발라의 핵심 사상인 '티쿤 올람(Tikkun Olam, 세상의 회복)'이 디아스포라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게 한 원동력이라고 분석했다. 발터 벤야민의 마지막 남긴 말이 ‘티쿤 올람’이란 설도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숄렘은 시오니즘을 수천 년간 잠들어 있던 메시아적 염원이 현대적 형태로 폭발한 것으로 해석했다. 즉, 시오니즘은 단순히 정치적 해방이 아니라, 유대 민족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고 새로운 영적 질서를 창조하려는 카발라적 충동의 발현이었다는 것이다. 숄렘이 카발라 연구 끝에 발견한 하나님은 무한의 존재이기 이전에 자기 제한과 그로 인한 세계의 불완전성(츠짐쭘·깨진 그릇) 안에 존재한다. 그 세계에서 인간은 역사적 책임(티쿤·메시아주의)을 져야한다.

그러나 숄렘이 목도한 현실은 그가 꿈꾸던 영적 비전과는 달랐다. 숄렘은 시오니즘의 변질을 막기 위해 소수의 지식인 그룹 '브릿 샬롬(Brit Shalom, 평화의 언약)'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이들은 오늘날의 사태를 예견한 듯, 유대 민족과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공존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꿈꾼 나라는 한쪽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유대 국가'가 아니었다. 유대인과 아랍인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공존하는 '이중국가(bi-national state)'였다.

하지만 다수의 시오니스트들은 숄렘의 이상을 현실성 없는 공상으로 치부했다. 그들은 철저히 유대인들만을 위한 국가 건설에 몰두했고, 군사력을 통해 영토를 확보하고 민족적 순수성을 유지하려 했다. 숄렘은 이처럼 시오니즘이 카발라로부터 물려받은 영적, 윤리적 소명을 포기하고 보통의 민족국가가 된다면, 그것은 유대 민족의 가장 깊은 본질을 잃어버리는 비극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만약 게르솜 숄렘의 사상이 주류가 되었다면, 오늘의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비전은 '우리'라는 배타성을 넘어 '함께'라는 연대의 정신을 강조했다. '이중국가'라는 개념은 단순히 정치적 제안을 넘어, 유대인과 아랍인 모두가 이 땅의 정당한 주체임을 인정하는 깊은 윤리적 성찰의 결과였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이스라엘은 결국 보통의 민족국가를 택했고, 그 결과는 점령과 봉쇄,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폭력의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사태는, 숄렘이 그토록 경계했던 '정상적인 민족국가'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비정상적이고 비윤리적인 종착역일지도 모른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다, 결국 자기 스스로가 윤리적 원칙을 훼손하고 타인의 삶을 짓밟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게르솜 숄렘의 유산은 이스라엘이 잊어버린, 혹은 애써 외면했던 또 다른 가능성의 역사이다. (본보 제휴 <뉴스 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