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케인 칼럼] 오늘, 리영희·장하준·이창천의 저적이 던진 질문들

(올랜도) 김명곤 기자 = 최근 미국 조지아주에서 발생한 한국인 노동자 집단 체포 사건은 단순한 비자 규정 위반을 넘어선다. 약 300명이 넘는 한국 국적 노동자들이 불법체류 혐의로 체포되었고, 일부는 사슬에 묶인 채 수송되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국내 여론이 크게 출렁였다.

이들은 현대차의 전기차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 파견된 기술자들로, 한국 기업이 미국에 수십조 원을 투자하고 수천 명의 고급 인력을 파견한 바로 그 ‘동맹국’의 땅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미국은 자국의 법을 집행한 것일 뿐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절차와 태도다. 동맹이라면 최소한의 협의, 통보, 조율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사후 대응에만 나섰고, 국민의 분노는 정부의 태도에까지 향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자연스럽게, 오래된 질문 하나를 다시 꺼내들게 만든다. ‘한미동맹’은 지금,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요즘 한미관계를 바라보는 마음이 복잡하다. ‘동맹’이라는 이름이 주는 체질적 안도감이 있는 한편, 그 이면에 깔려 있는 어떤 불편함과 기시감도 함께 느껴진다. 마치 오래된 관계 속에서 점점 침묵이 늘어나고, 어느 순간 말도 제대로 꺼낼 수 없게 되는 상황처럼 말이다.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이름들이 있다.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는 리영희, 장하준, 그리고 최근의 이창천. 리영희는 지식인의 독립성과 사유의 자유를 주장하며 한국 사회의 지적 식민성을 파헤쳤던 진짜 언론인이다. 장하준은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의 틀에 갇히지 않고 스스로의 경제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외쳐온 캠브리지 경제학자이고, 최근 주목을 받은 이창천은 외교관의 시선으로 한미관계의 비대칭성과 숭미주의를 조목조목 비판한 실무자이다.

서로 다른 시대와 영역에 살았던 이 세 사람은, 한국 사회와 국제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이들의 시선은 다시 한 번 소환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리영희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사회는 지적 식민지다”

'사상의 은사' 리영희의 고전적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는 한국 사회가 미국 중심의 지적 질서 속에 길들여져 있다고 비판했다. 리영희는 한국이 자신만의 시선과 언어로 세계를 바라보지 못한 채, 미국의 가치와 이익을 곧 '객관'이자 '보편'으로 받아들이는 구조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건은 그의 지적이 여전히 유효함을 드러낸다. 미국이 설정한 비자 규정과 법 집행 절차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고, 한국은 그 틀에 맞춰 설명하고 해명하며 따라가야 했다. 설사 일부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동맹국의 국민’이 미국 내에서 그토록 모욕적인 방식으로 체포될 수 있다는 것은 한국이 미국의 규칙 안에서만 존재를 허용받고 있다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리영희는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언어로 세계를 말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여전히 ‘아니오’다.

장하준 "그들의 조언을 그대로 따르면, 절대 그들처럼 성장할 수 없다"

경제학자 장하준의 명저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선진국들이 자신들은 보호무역과 국가주도로 성장해놓고, 개발도상국에게는 자유무역과 규제 철폐를 강요한다고 비판했다. 장하준은 이런 조언들이 실은 선의가 아니라,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전략임을 드러낸다.

이번 사건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미국은 노동법, 이민법, 안전 규정 등을 내세워 한국 기업의 인력 운용을 규제한다. 그런데 정작 이 규정은 수시로 자국 이익에 따라 적용 강도나 방식이 달라진다. 이전까지는 어느 정도 묵인되던 기술자 파견이, 이제는 일방적 단속과 처벌로 이어졌다. 이유는 단순하다. 미국 노동조합과 정치권이 ‘자국민 우선’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그동안 투자 유치라는 목표 아래 미국의 기준에 순응해왔다. 그러나 그 대가는 불균형한 책임과 위협이었다. 장하준이 말한 것처럼, 강자의 틀 안에서만 움직이는 국가는 결코 그 강자처럼 될 수 없다.

이창천 "동맹은 설계되어야지, 숭배되어선 안 된다"

전직 외교관 이창천은 <브라보 한미동맹>에서 한국 외교가 미국의 입장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자국민보다 동맹국의 기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 구조를 '숭미(미국 숭배)'와 '멸한(한국 멸시)'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외교의 비대칭 구조를 분석한 용어다.

이번 사건에서도 한국 정부는 신속하고 강경한 대응 대신, ‘미국과의 관계’를 우선 고려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체포된 노동자들은 구금 상태에서 미국 언론의 일방적 프레이밍 속에 ‘불법체류자’로 규정됐고, 정부는 뒤늦은 유감 표명과 대사 초치에 그쳤다.

이창천은 말한다. "외교는 눈치가 아니라, 국민의 권익을 중심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외교가 설계되지 않으면, 복종이 되고 관성이 된다.

이번 사건은 ‘한미동맹’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감정과 관성에 기댄 언어인지를 드러낸다. ‘같은 편’이라는 말은 쉬워도, 실제로 같은 대우를 받고 있는지는 묻기 어렵다. 국민의 권리가 침해당했을 때, 그 동맹은 얼마나 실질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단지 ‘외교적 구호’에 불과하다.

우리가 원하는 동맹은 존중과 자율, 그리고 투명성 위에서 작동하는 구조여야 한다.

체포·구금 등 국민의 존엄과 안전이 걸린 사안에선 최소한의 사전 협의와 절차적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외교, 경제, 산업정책에서 미국의 전략에 종속되지 않고 한국 스스로 판단하고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에게 설명할 수 없는 외교는 신뢰받을 수 없다. 동맹도 결국 민주주의 안에서 존재해야 한다.

‘대한미국’이 아닌, ‘대한민국’의 외교를 향하여!

리영희는 말한다. "진실은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는 없다." 장하준은 경고한다. "강자의 조언을 그대로 따르면, 결코 그들처럼 될 수 없다." 이창천은 강조한다. "동맹은 설계되어야지, 숭배되어선 안 된다."

세 사람은 모두 한미동맹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한다. 진정한 동맹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비대칭적 구조와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

지금은 묻고, 말하고, 다시 설계해야 할 시간이다. 우리의 외교는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동맹’이라는 말은 국민에게 무엇을 보장해주는가?

이 질문들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대한미국'이 아닌, '대한민국'의 외교를 가능케 하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