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시대별곡] 그 시절, 귀했던 선풍기를 둘러싼 풍경

(서울) 김종성 기자 = 선풍기가 많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아직은 귀하던 때의 이야기다. 선풍기에 대한 '무식'이 신문지상에서 유머의 소재가 됐다. 갓과 도포 차림의 지방 신사가 선풍기를 쳐다보는 삽화가 그려진 1939년 7월 14일 자 <조선일보> 4면은 이 신사가 정전 때문에 멈춰선 선풍기를 보더니 "흥, 선풍기도 별 게 아니군"이라며 "바람이 업스니까 안 돌아가는 걸"이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을 묘사한다.

기상 전문가인 반기성 케이웨더 센터장이 2011년에 쓴 <워렌 버핏이 날씨시장으로 간 까닭>은 "케이웨더가 기온에 따른 상품의 매출을 분석해 본 결과, 선풍기는 21도, 살충제는 25.5도, 수박·아이스크림·맥주는 27.5도, 에어컨은 27.5도 이상에서 고매출을 기록했다고 한다"라는 분석 결과를 소개한다.

평균 기온이 지금보다 낮았던 1940년대와 50년대에도 한여름에는 30도를 넘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기온이 20도 중반이 되면 인위적인 냉방 장치가 필요하므로, 선풍기의 존재를 잘 아는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물건에 대한 기대감이 당연히 컸다.

선풍기 풍향에 민감했던 시절

그러나 선풍기가 대중화되려면 시간이 좀 더 흘러야 했다. 백화점에 출시된 선풍기 사진과 함께 보도된 1962년 6월 9일 자 <경향신문> 4면 기사 '선풍기 사용법과 사용하는 방법'은 선풍기에 대한 이 시절 사람들의 정보 수준을 반영한다.

이 기사는 "정면에서 바람을 쏘이면 기분이 나빠지는 수가 있다", "1미터 이상 떼어놓고 사용할 것"을 권고한 뒤, "무더운 밤 창가에 놓으면 밖의 깨끗한 공기를 실내에 넣을 수 있다", "비 오는 날이나 급할 때 세탁물을 빨리 말리는 데 사용한다" 같은 꿀팁을 제공한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선풍기 보급이 이전보다 확대됐다. 1949년 8월 13일 자 <조선일보> 2면 중간에는 경부선 및 호남선 급행열차의 1등칸·2등칸에 선풍기가 설치된다는 보도가 실렸다. 박상일 경향신문사 주필이 1963년 6월 15일자 자사 신문 3면에 쓴 칼럼에는 "해방 덕분에 여름철이 되면 우리나라에서도 룸쿨러(room cooler)나 선풍기 등을 사용하여 시원한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견디도록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라는 대목이 있다.

해방 이후에 갑자기 한국 제조업과 한국인 구매력이 성장한 것은 아니다. 일본인들이 귀국하면서 그들의 경제력이 일부 한국인들에게 이전되고, 미군 주둔으로 인해 미국인들의 생활방식이 전파된 결과가 선풍기 보급의 확대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1950년대 후반까지는 선풍기가 귀했다. 1958년 7월 10일자 <경향신문> 1면 최하단은 서울 사람들의 여름나기를 묘사하면서 "한강이다, 냉맥주다, 부채다, 빙수다 하는 것은 극히 평범"하다고 한 뒤 "선풍기 등은 말마따나 한국 가정에는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1959년 9월 23일 자 <동아일보> 3면은 미군 부대에 근무하는 29세 박내석의 일가족 5명이 피살된 사건을 보도하면서 "박씨 집은 비교적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왔고 텔레비·선풍기·녹음기·오토바이 등이 있는 집"이라고 전했다.

선풍기의 희소성은 장면 총리가 당선된 직후에 내각 인선을 둘러싼 민주당 분위기에서도 표출된다. 장면내각 출범 이틀 뒤에 보도된 1960년 8월 21일자 <동아일보> 2면은 이 정권의 2인자가 될 국회의원 오위영(1902~1978)의 집에 모여 인선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정치인들을 거론하면서 "오위영 씨 집에서 선풍기를 틀어놓고 연락만 받고"라는 표현을 썼다. 비싼 선풍기를 틀어놓고 그 집에 죽치고 있는 정치인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묻어나는 기사다.

1958년 11월 10일 자 <경향신문> 3면 하단은 서울 충정로의 한미재단 창고에서 선풍기 10대가 도난된 사건을 보도하면서 대당 가격이 3만 환이라고 전했다. 그달 7일 자 <동아일보> '상황(商況)'에 따르면, 쌀 1가마니는 1만 2500환선 미만이었다. 이때의 선풍기 1대는 쌀 2.4가마니였다.

농업생산성이 낮아 '쌀값'이 아닌 '쌀의 가치'가 지금보다 높았던 그 시절에는 쌀 2.4가마니가 주는 무게감이 훨씬 컸다. '선풍기는 시기상조'라는 위 보도가 같은 해 7월에 나온 것은 그만한 비용을 치르고 선풍기를 장만하는 게 힘들었음을 보여준다.

텔레비전 리모컨을 쥔 자가 집안의 헤게모니를 쥐었던 시절이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선풍기가 귀하던 때는 선풍기 온·오프와 풍향을 결정하는 자가 그 공간의 지배자였다. 강성태 상공부장관 집무실을 1955년 8월 27일에 방문한 것으로 보이는 경향신문사 기자는 "강 장관을 향하여 장관의 뜻대로 돌아주는 선풍기"라고 29일 자 자사 신문 1면에 썼다. 장관이 자기 쪽으로 바람이 불도록 하면서 방향을 약간씩 조정하는 모습을 그렇게 묘사했던 것이다.

1962년 8월 6일 자 <경향신문> 4면은 "손님이라고 선풍기를 독차지할 순 없다"라며 남의 집에 갔을 때는 "땀이 걷히면 '고마웁니다' 인사하고 일단 껐다가 주인에게 바람을 돌려보낸다"라고 선풍기 에티켓을 알려준다. 선풍기 풍향에 민감했던 그 시절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선풍기조차 없었던 부통령의 응접실

선풍기를 둘러싼 역학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민주당 소속인 장면 부통령의 집무실 풍경이다. 대통령과 부통령의 동일 당적이 요구되지 않은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당선된 장면 부통령의 응접실에는 선풍기가 없었다.

이승만은 부통령제도에 관한 개헌을 운운하면서 장면 부통령을 흔들어댔다. 그런 시점에 발행된 1958년 7월 1일 자 <조선일보> 1면 우하단은 "선풍기조차 없는 응접실"이라는 말로 부통령실을 묘사했다. 일반인들에게는 선풍기가 귀하지만 장면의 지위를 감안해 '선풍기조차 없다'라며 자유당 정권에 포위된 그의 처지를 전해주는 기사다.

선풍기조차 없는 응접실에서 기자를 만난 장면은 "내 개인을 떠나서라도 내게 (대통령) 계승권이 있다는 양해하에 국민들이 투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임기 중에 계승권을 빼앗게 하려는 것은 법리상이나 정치도의상으로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불평을 토로했다.

강성태 상공부장관에 대한 위의 1955년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시절에는 장관 집무실에도 선풍기가 있었다. 1955년 7월 31일에 나온 <동아일보> 1면 중간의 또 다른 기사에는 외무장관 집무실의 선풍기가 언급됐다. 한국전쟁 휴전 전날 보도된 1953년 7월 26일 자 <경향신문> 2면은 총리실 직원들이 "선풍기 바람을 벗삼아" 한적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도했다. 1950년대 중반에 이랬는데도, 1958년 당시의 부통령실에 선풍기가 없었던 것이다.

장면 부통령은 마지막 임기의 여름이 다가오기 직전에 4·19혁명을 맞았다. 이승만이 곧 하야하고 부통령이 대통령을 승계하리라고 예상하기 힘들었던 1960년 4월 23일, 그는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승만의 사임성명 발표는 사흘 뒤에 있었다. 장면의 사임으로 인해 이승만의 제자인 허정 외무장관이 대통령권한대행을 맡게 됐다.

부통령직을 사임하지 않고 대통령 대행을 맡았다면, 장면은 그해 여름을 시원한 집무실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 대신, 그해 8월 19일의 장면내각 출범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 대행이 되어 국정을 책임져야 했다면 7·29 총선에 출마하기가 현실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었다. 부통령직을 일찍 그만둔 것은 총선에서 당선되고 의원내각제 총리가 되는 데 도움이 됐다. 결과적으로 보면, 네 번째 여름이 오기 전에 부통령실을 신속히 탈출한 것이 그 개인에게는 잘된 선택이었다.

1960년 여름은 12년 만에 이승만 없는 여름이었다. 그래서 선풍기가 있든 없든 탁 트인 가슴으로 견뎌볼 만했다. 국민 정서 측면에서 본다면, 그해 여름은 선풍기가 없더라도 시원한 계절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선풍기 보급이 빨라졌다. 1964년 4월 9일 자 <조선일보> 5면에 따르면, 1962년에 서울 중류가정 출신의 여자고등학생 1000명 중에서 40% 정도는 자기 집에 선풍기가 있다고 응답했다. 1976년 7월 29일 자 <조선일보> 1면은 선풍기를 "서민의 시원한 벗"으로 지칭했다. 선풍기를 갖고 정적을 골탕 먹이거나 자기 위세를 과시할 필요가 없게 된 상황이 이승만 몰락 직후부터 점차 조성됐던 것이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