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견고해진 신분사회... 한국에 희망은 있을까

(서울) 박순우 기자 = <한국이 싫어서>(2015년 5월) 장강명 작가가 10년 전에 발표한 소설 제목이다. 지난해 영화로도 만들어져 배우 고아성씨가 주연을 맡아 열연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6~7년 전쯤이었다. 대화체로 쓰여진 데다 구구절절 내가 직접 겪은 일들이 서술되어 있었기에 책은 쉽게 넘어갔다. 최근 영화를 본 뒤 다시 책을 펼쳤다. 몇 년 사이 휘발됐던 켜켜이 숨겨진 내용들이 눈에 들어왔다. 책이 출간된 지 10년, 한국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단언컨대 한국은 이 소설 속 환경에서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은 더 좋지 않은 쪽으로 심화되고 있다. 주인공인 계나는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난다. 계나가 한국을 싫어하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집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미모가 출중한 것도 아닌 계나에게 한국은 살기 너무나 힘든 곳이다. 반대로 말하면 한국은 좋은 대학을 나오고, 집에 돈이 많고 외모가 출중해야 살기 좋은 곳이 된다.

계나가 한국 대신 선택한 곳은 호주다. 호주가 그렇다고 지상낙원인 것은 아니다. 그곳도 계나가 살아가기에 녹록지 않다. 영어를 잘 못하던 시절에는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돈을 받고 일해야 했고, 거실에 커튼을 치며 셰어하우스에서 살아야 했다. 돈을 조금 모아 형편이 나아지지만, 예상치 못한 일에 휘말려 전재산을 날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호주에는 한국과 다른 지점들이 있다.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임금 격차가 없고, 7시 출근 4시 퇴근이 칼 같으며, 정직원이 되면 일 년에 한 달은 휴가를 즐길 수 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고, 큰 병에 걸리면 국가가 의료비를 책임진다. 그곳에도 차별이나 부당함은 존재하지만, 한국보다는 훨씬 덜하기에 계나는 호주의 삶이 자신에게 더 맞다고 느낀다.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는 신분사회, 계급사회라는 단어가 부유했다. 계나가 싫어하는 한국 사회는 모두가 신분상승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회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학교를 가고, 직장을 다니고, 연봉을 받고, 집을 사고, 차를 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회. 작가는 계나의 입을 통해 이 사회를 적나라하게 꼬집는다.

"스펙을 철폐해야 한다느니 학벌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태가 잘못됐다느니 떠들어 대면서 정작 자기들은 스터디 멤버를 뽑을 때조차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더라니까." - 55p

"정말 우스운 게, 사실 젊은 애들이 호주로 오려는 이유가 바로 그 사람대접 받으려고 그러는 거야. 접시를 닦으며 살아도 호주가 좋다 이거지. 사람대접을 받으니까. 한국에서는 수도권 대학 나온 애들은 지방대 나온 애들 대접 안 해 주고, 인서울대학 나온 애들은 수도권 대학 취급 안 해 주고, SKY 나온 애들은 인서울을, 서울대 나온 애들은 연고대를 무시하잖아. 그러니까 지방대 나온 애들, 수도권 나온 애들, 인서울 나온 애들, 연고대 나온 애들이 다 재수를 하든지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아마 서울대 안에서는 법대가 농대 무시하고 과학고 출신이 일반고 출신 무시하고 그러겠지." - 186p

이렇게 신랄한 비판을 하는 계나지만, 그 역시 신분제를 완전히 초월하지 못했다는 게 후반부에 드러난다. 계나의 동생 예나의 연애 상대는 미래가 불투명한 음악인이다. 예나가 그 남자와 결혼까지 생각하자 계나는 자신이 호주에 간 것은 신분이 오를 가능성이 있는 방향으로 한 일이지만, 예나가 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오히려 신분을 더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한다. 낮은 데서 추락하는 게 더 위험하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이 소설은 신분제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이 역시 결국 계급사회의 틀에서 벗어나 사고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에게 신분이라는 것이 얼마나 뼛속 깊이 각인된 틀인지를 보여준다. 현대에도 신분사회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자본주의 사회의 틀 안에서 오히려 더 공고해지고 있다. 학력과 연봉으로 포장된 능력주의야말로 신분사회를 더 교묘하게 유지시키고 있지 않은가.

지나친 사교육은 아이의 신분을 어떻게든 끌어올리려는 부모들의 몸부림이다. 끼리끼리 놀라며 어릴 적부터 친구를 직접 만들어 주는 부모들도 많다. 소위 진보 인사라며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앞장서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도, 뒤에서는 자녀들에게 고액 과외를 시키고 대치동을 뺑뺑이 돌리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도 차마 인지하지 못한 계급적 사고관에 갇힌 부모들은 오랜 기간 아이들을 기르며 은연 중에 자신의 편견을 노출할 것이다. 그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것이 편견인지도 모른 채 또래 문화를 형성하며, 더 왜곡된 가치관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깔보는 사회 분위기가 변하지 않는 한, 입시제도를 바꾼다 한들 서울대를 수십 개 만든다 한들, 한국 사회는 여전히 헬조선일 것이다. 직업이나 직장에 따른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 한, 사회안전망을 촘촘히 깔고 부를 재분배하지 않는 한, 이런 사회 분위기는 결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싫어서>를 다시 읽고 가장 절망스러웠던 건, 10년 전 출간된 책이 다루고 있는 한국 사회의 문제가 단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모든 문제가 더 심화되고 있다. 지역 간의 불균형, 학력의 격차, 연봉의 격차, 삶의 불안정성 등. 그 사이 아이들은 훌쩍 자라 어느덧 내 키를 넘보고 있다.

40년 조금 넘는 인생을 살면서 이민을 심각하게 고민한 건 딱 두 번이었다. 이십대 남들 다 대기업 취직을 준비할 때 혼자 꿈을 좇다가 실패하고 난 뒤, 어느 기업도 나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첫째 아이를 한국의 교육 현장으로 들여보내는 날을 몇 달 앞두고. 내 몸은 심한 거부 반응을 보이며 몸부림쳤다. '한국에 살기 싫다.'

한 번은 부모의 반대로, 한 번은 남편의 반대로 무산됐지만, 나는 여전히 종종 이민을 꿈꾼다. 다른 나라가 유토피아라서 그런 게 아니다. 한국 사회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내 아이들이 곧 마주하게 될 이 사회의 민낯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문득 지난해 청소년 자녀 둘을 데리고 갑자기 독일로 이주한 지인이 떠오른다. 독일어도 제대로 구사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꿈을 품고 떠난 그들.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