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의 소리> 창간 55주년, 함석헌 선생을 다시 떠올리다

(서울=오마이뉴스) 김성수 기자 = 함석헌은 20세기 한국현대사에서 '씨알'이라는 개념으로 민중의 자각과 실천을 강조했던 사상가이자 행동가였다. 그는 종교인으로서, 교육자·언론인으로서, 무엇보다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시대의 어둠에 맞선 저항의 목소리를 남긴 인물이다.

1901년 평안북도 용천 사자섬, 함석헌은 작은 어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의사였고 함석헌은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였다. 이는 어린 시절 그의 사상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며 자랐다. 3.1운동이 터졌을 때 그는 18세의 학생이었고, 이 운동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 해방'이 하나의 실천으로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에게 보여줬다. 이후 그는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와 일본유학 시절, 그는 조선의 독립과 민중의 자각 그리고 기독교 진리 사이에서 방향을 찾으려 애썼다.

함석헌이 본격적으로 사상가로 활동한 것은 1930년대 이후였다. 그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모교인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김교신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한다.

성서적 시각에서 조선현실을 비판한 이 잡지는 일제감시와 탄압을 받았지만, 민족주의와 신앙을 결합한 지식인 운동의 요람이었다. 함석헌은 이 시기 노자와 장자의 철학에 깊이 빠져든다. 강압과 위계, 전쟁과 지배가 아니라 '무위(無爲)'와 '자연(自然)'을 따르는 도가(道家)의 삶은, 당시 파시즘과 제국주의가 휩쓸던 동아시아 현실에 대한 대안이었다. 그는 이 도가적 직관을 성서해석과 접목해 자신만의 종교관을 형성했다. 교리를 따르기 보다 '살아있는 진리'를 따라 사는 종교, 제도교회보다는 '양심과 내면'을 따르는 신앙의 길이었다.

해방정국 그는 북한 평양에서 소련군정하에 문교부장으로 잠시 공직을 맡기도 했지만 곧 사임하고 1947년 목숨을 걸고 월남한다. 월남 후 그는 언론과 강연을 통해 민중과 만나는 길을 택했다. 그의 글과 강연은 해방 후 혼란 속에서 한국사회가 어떤 '정신'을 회복해야 할지를 묻는 작업이었다.

그는 예수의 삶을 따르되, 교회권위와 배타적 교리에 갇히지 않으려 했다. 불교·유교·노장사상 속에도 진리가 있다고 봤고, 종교 간 경계보다는 '삶으로 증명된 진리'를 중요시했다. 이는 이후 그가 '씨알'이라는 개념을 통해 민중의 영적주체성을 강조하는 기반이 된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한국사회는 박정희 군사독재시대로 진입했다. 함석헌은 이 시기 퀘이커리즘에 큰 영향을 받는다. 퀘이커는 17세기 영국에서 출발한 종파로, 내면의 빛(Inner Light)을 중시하며 비폭력, 평화, 양심자유를 신앙의 핵심으로 삼는다. 그는 퀘이커 예배방식, 침묵 속에서 자기내면과 영을 경청하는 태도에서 깊은 영감을 얻었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55년 전인 1970년 4월 19일, 함석헌은 4.19혁명 10돌을 맞아 <씨알의 소리>라는 월간지를 창간, 박정희 정권의 사이비 언론에 맞서 '언론의 게릴라전'을 펴나간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얼어붙은 야만의 시대에 그는 "자유언론 없으면 죽음"이라는 일념으로 "돈도 되지 않는 잡지를 사재를 털어서" 시작했다. '씨알'은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존엄한 주체로서의 개인을 뜻한다. 씨알은 작고 미약하지만, 진실을 따르는 민중의 힘이 역사주체라는 함석헌의 믿음을 담고 있다.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를 통해 박정희 독재에 비판적 목소리를 꾸준히 냈고, 민주화운동, 민중과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씨알' 사상은 단지 상징어가 아니다. 그것은 민중을 '대상'이 아닌 '주체'로, 종교를 '위로부터계시'가 아닌 '아래로부터 증명'으로 이해하려는 급진적 사유다.

그의 말대로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더 위대하다." '씨알의 소리'로 알려진 사상가인 그는 그래서 한국현대사에서 '진리의 길'을 묻는 이들에게 여전히 강력한 상상력을 제공하는 인물이다. 비폭력저항, 양심의 자유, 영적사유를 통해 민주주의와 신앙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그의 사유는 동서양을 아우른다. 그런 그를 이해하려면 단지 기독교의 틀만으로는 부족하다.

함석헌이 가장 깊이 영향을 받은 종교운동은 퀘이커리즘 이었다. 퀘이커는 영국 청교도혁명 시기 등장한 급진신앙운동으로, 제도화된 교회와 성직자권위를 부정하고 '내면의 빛'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강조한다. 이들은 '모임집'에 모여 침묵 속에서 영을 체험하며, 전쟁과 폭력을 거부하고 사회정의 실현에 헌신했다. 함석헌은 퀘이커리즘에 접하면서 "참된 종교는 마음속의 빛을 따르는 양심적인 삶"이라는 생각에 깊이 공감했다.

특히 '신비주의적 인식론', '비폭력 평화주의', '개인과 공동체의 유기적 관계'는 퀘이커 핵심정신이자 함석헌의 '씨알사상'과도 통한다. 씨알은 작고 미미하지만, 거대한 민중의 집합적 힘을 상징하며 역사주체로 작동한다. 이는 제도와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진실을 스스로 증거하는 퀘이커신앙태도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 퀘이커 '내면의 빛' 사상은 함석헌에게 신앙의 개인화, 주체화를 가능하게 한 원천이었다. 외적권위보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영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군사독재시기를 거치며 함석헌 저항정신과 실천윤리의 뿌리가 되었다. 그는 기독교를 단지 교리나 조직으로서가 아니라, 양심의 호소에 응답하는 '살아있는 진리'로 보았다. 퀘이커 침묵예배, 비폭력 저항, 사회적 책임은 모두 그에게 실천적 종교의 전범이었다.

함석헌은 서양 기독교, 특히 퀘이커 전통에서 '내면의 빛'을 발견하고, 동양 도가에서 '무위'와 '자연의 도'를 통찰했다. 그는 이 둘을 대립시키기보다 통합하며,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신앙의 실천적 모습을 강조했다. 이는 이후 민중신학이나 참여신학의 선구적 형태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함석헌은 당시 한국 정통교회나 국가, 정권 모두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그는 정치권력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고, 교회제도 울타리에도 갇히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를 '불온한 기독교인' 또는 '이단자'라 불렀다. 하지만 이 '불온성'이야말로 함석헌의 신앙과 실천이 살아 있는 증거였다. 신앙이 현실에 침묵하고, 제도와 권위에 복속될 때 그는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를 물었고, 그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함석헌 사상에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흐름은 노자와 장자, 즉 도가사상의 영향이다. 그의 기독교와 퀘이커의 영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유차원을 노장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노장의 '도' 개념을 살아 있는 진리, 존재 근본흐름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고정불변한 교리보다 끊임없이 생동하는 진리를 강조하는 방식이다.

노장의 '무위자연' 정신은 함석헌 사유방식과 글쓰기 태도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억지로 바꾸기보다 존재흐름 속에서 진리를 실현하려는 태도, 억압에 대한 저항이면서 동시에 초월의 자유를 추구하는 실천철학이 바로 그것이다. 장자의 '소요유'는 현실의 얽매임을 넘는 자유로운 사유가능성을 제공했다. 현실참여와 초월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그는 늘 역사의 한복판에 서서도 마음은 '도'의 흐름에 맡기려 했다.

이러한 노장적 영성이 함석헌 기독교 해석에도 영향을 줬다. 그는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체계나 배타적 구원틀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다양한 진리와 전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증명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이는 그가 말한 '생각하는 백성'이 되기 위한 정신적 토대였다. 그래서 그는 늘 "생각하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무력한 순종보다 비판적 사고를, 복종보다 질문을 던지는 신앙을 그는 원했다. 그의 신앙은 늘 현실을 향해 열려 있었고, 역사의 아픔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퀘이커리즘과 노장사상이 단순한 '외래 사상'이 아니라, 함석헌의 '생각하는 삶'과 '살아 있는 진리' 추구에 이렇게 깊이 스며들었다. 이를 통해 그는 동서양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창조적 융합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융합은 단지 이론적 관심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현실참여 지식인이었고, 그의 사유는 언제나 '현실'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글은 단지 사상이 아니라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가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단지 역사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쓰기 이자 그가 살았던 권위주의시절 억압구조를 넘어서는 실천 선언이었다. 퀘이커리즘의 '양심의 소리', 노장의 '도', 기독교의 '말씀'은 함석헌에게서 하나의 유기적 정신으로 녹아 있다.

함석헌은 단순히 서구기독교 수용자가 아니었고, 동양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양자를 비판적으로 수렴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 사유의 개척자였다. 이 길은 '씨알'의 길이다. 미미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씨알, 깨어 있고 생각하며 저항하는 씨알의 생명력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퀘이커의 내면의 빛, 노장의 무위를 하나로 엮은 그의 사상은 단지 과거유산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다시 써야 할 사유의 미래다.

그래서 함석헌의 글은 오늘 한국사회, 오늘의 종교, 오늘의 민중과 지식인에게 묻는 하나의 성찰이자 질문이다. 제도와 교리, 권위와 위계에 갇힌 신앙과 학문이 어떻게 '살아있는 진리'를 증명할 수 있는지를, 우리는 그의 삶과 사유를 통해 되물을 수 있다.

지금 우리사회는 극단적 양극화와 진영대결, 소통단절 속에 놓여 있다. 종교는 여전히 폐쇄적 교리와 권위중심적 제도로 머물러 있고, 지식인은 권력과 자본에 유착해 자기검열에 익숙해졌다. 이런 시대에 함석헌은 다시 묻는다. "생각하는 씨알이 되었는가?"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오늘 우리가 다시 들여다보고 생각하는 것도 그래서 단순히 20세기를 살았던 한 지식인의 생애를 복원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어떤 존재로, 어떤 사회를 함께 가꾸며 살아야 하는지 성찰하는 질문이자 추구해야 할 길이다. 그는 침묵 속에서 내면의 빛을 들으려는 사람, 국가폭력이 난무하던 시절 진실 앞에 두려움 없이 서려는 사람, 약하고 보잘것없지만 역사주체로 살아가려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씨알'의 정신이 다시 필요하다.

우리의 신앙과 정치, 사상과 삶이 길을 잃은 지금, 함석헌이 걸었던 길은 다시 하나의 좌표가 될 수 있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그 길 위에서 우리가 다시 시작하게 만든다. 오늘 혼란에 휩싸인 우리사회는 다시 길을 묻고 있다. 진리는 무엇인가? 사회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때 우리는 '함석헌'이라는 이름을 다시 불러야 한다. 또 그것이 우리가 지금, 함석헌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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