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나 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어지니교회) = 추석 선물을 받았다. 각종 과일이 풍성해졌다. 가장 많은 것은 샤인 머스켓이라는 포도다. 캠벨을 좋아하는 아내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다. 포도 외에도 각종 외래 과일들로 사과와 배는 점점 그 자리를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우리 집에 과일이 풍성해졌다.
과일은 열매다. 나는 옥상 화분 농사를 통해 먹거리를 하나 길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잘 알고 있다. 직접 기른 쌈 채소, 고추, 오이, 가지와 같은 것들을 먹을 때면 행복하다. 그것을 길러내는 과정이 힘들면 힘들수록 그 효과는 더 커진다. 올해처럼 기온이 높을 때에는 작물들도 몸살을 앓는다. 고추가 달리지 않고, 오이는 암꽃만 피어 가지만을 뻗을 뿐 오이가 달리지 않는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옥상과 아래 화단을 오르내리며 내가 나른 물의 무게는 아마도 몇 톤은 될 것이다. 물론 운동 삼을 수도 있지만 내가 들인 노력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경제성이 전혀 없는 무의미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늘 작은 농사를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배운다. 그래서 가능하면 작물들이 천수를 다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사실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화분 농사와 화단 농사는 근본적으로 좁은 면적일 수밖에 없다. 먹을 수 없게 되면 제거하고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나는 자기 몫을 다하고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으려는 그들의 노력이 가상하다. 그래서 아깝지만 그들이 피워내는 꽃을 보는 것으로 그들을 키우는 보람을 바꾸었다. 새삼 생명을 기른다는 것, 생명의 소중함을 그들을 통해 느낀다.
다른 소득도 생기고, 전에는 몰랐던 농사법도 배우게 된다. 토마토의 경우나 오이의 경우 늙어 죽은 것 같은 줄기에서 새로운 줄기가 솟아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거기에도 열매가 달린다. 또 그렇게 나온 토마토 줄기를 상토에 심으면 뿌리가 나와 하나의 성체가 된다. 내년에는 토마토 모종을 종류별로 하나씩만 살 예정이다. 곁가지를 키우면 거의 무한정으로 번식이 가능할 것 같다.
옥상의 빗물을 모으는 일도 보통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빗물을 모으기 위해 밤잠을 자지 않고 옥상을 오르내린다. 벌레를 잡아주는 일도 세심해야 가능한 일이다. 이제는 벌레들의 속성도 알게 되고 그놈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알게 되어 잘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도 생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또 그것이 자연의 순리라는 것을 알지만 결국 어느 정도 이기적인 생각은 오히려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 벌레들과 함께 작물을 나누어 먹는다는 사고를 지닌 분들을 보면 존경심이 든다.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그들이 밉고, 그들을 제거할 때마다 통쾌한 기분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어쨌든 나는 이 일을 통해 열매라는 것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최근 가끔씩 보기도 하는 전원주택 매물에서 내가 가장 흥분하는 부분은 잘 자란 과수가 있는 정원이나 밭이다. 과일이 열릴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과일나무는 그래서 내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로 인식된다. 어려서부터 감나무가 있는 마당을 로망으로 삼았던 나는 이제는 토종 다래를 비롯하여 각종 과일 나무들에게 매료되고 있다.
사과나무에는 사과가 열린다. 아니 사과만 열린다. 얼마나 당연한 말인가.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나무에 비유한다.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라는 열매를 맺는 나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라는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이 당연한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실종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열매를 맺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온통 자신의 하는 일이다. 기사를 보아도, 글을 보아도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그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은 그들의 열매가 아니다!!!
열매는 모든 일들이 끝난 후에 맺히는 결과물이다. 생각을 해보라. 만일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는 일이 아니라 사과가 열리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에 모든 힘을 기울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렇다. 사과를 맺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에서 일반적인 현상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교인수가 얼마나 늘었는지, 교회가 얼마나 선한 일을 많이 했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 곳에 다니는 교인들 역시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에 온 관심을 쏟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자신의 일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또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해 놓은 선 더미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해 놓은 악 더미에서 악한 것을 낸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행위는 결과로서 열매일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엔 에움길이 존재한다. 그 에움길이 무엇인지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여준다. 그들의 행위는 거룩했고 온전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괴리의 정체를 예수님은 위선이라 하셨다.
그렇다. 행위에는 위선이 존재할 수 있고, 그럴 경우 그런 사람은 "회칠한 무덤"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행위를 강조하지만 행위 자체를 열매로 파악하지는 않는다. 행위는 열매가 될 수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 위선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열매가 될 수도 있고, 위선이 될 수도 위선이 될 수도 있는 행위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이 구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특히 자신을 판단하는 데 결정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사고다.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위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 매료되어 스스로를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열매와 위선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겸손함이며 작아짐이다. 열매인 행위는 행위자를 겸손하게 만들고 작게 만든다. 그 행위는 하면 할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알게 해준다. 하지만 위선인 행위는 하면 할수록 자신의 위대함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제자들의 자아가 부풀지 않을 수 있는 영적 비결이다.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자신이 맺고 있는 열매를 분별하는 이 가을이 될 수 있도록 성찰의 시간을 가지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가졌으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위선의 열매를 맺는 카인의 후예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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