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거노인 전원엽 할아버지의 사연

지난 밤 늦게 전화를 하신 분이 누굴까 궁금했다. 수화기 너머 들려 온 "그거 18년만에 처음 찍은 사진이라서"라는 말이 밤새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꿈속에서도 그 분 사진을 찍어드려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잠을 설쳤다.

마침 오늘(2일)이 북제주군 자활후견기관에서 독거노인들을 위한 따스한 밥상을 차려드리는 날이었기에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여 빨리 카메라를 들고 집을 나서 김녕체육관 식당으로 향했다.

내가 상상했던 그 분은 아니었다. 지난 봄부터 찍은 사진들을 살펴보면 그 분도 어딘가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오늘 찍어서 바로 현상해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어제 전화하셨죠?"
"어이구, 뭐 그랬다고 오늘 이렇게 직접 오셨어요. 난 그냥 사진 찍으신 분이 목사님이라고 해서 반가워 전화했을 뿐인데요."
"그래도, 18년만에 처음 찍으신 사진이라고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그래요, 얼추 18년 된 것 같네요. 주민등록증 만들 때 찍고 한 번도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18년만에 사진을 찍게 된 사연을 들려주셨다.

8년 전 이곳 제주에 정착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할아버지는 월남전 이야기부터 꺼내놓으셨다.

"집에서 부모님들은 대학에 가라고 했지만 군대에 지원했어요. 월남전에 참전을 했죠. 어느 날 밤이었어요. 밖에서 '살려달라!'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어둠 속에서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사람은 넘어져 있고, 그를 구타하는 사람은 씩씩거리며 그를 죽일 듯 달려들었어요. 순간 베트콩인 줄 알았어요. 권총을 들어 그를 쐈는데 심장을 맞았는지 즉사했어요.

그런데 사건 후에 알고 보니 대위였어요. 내가 중위였을 때였죠. 그 때부터 사형, 무기징역 그리고 성탄절 가석방으로 출감하기까지 내 인생은 끝난 것이었죠. 그냥 사형당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50이 넘어 성탄절에 가석방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어요. 이미 부모님들은 다 돌아가신 상태였고…. 그 나이에 배우자 만나야 고생만 시킬 것 같아 독신으로 지금껏 살고 있답니다."

월남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때 할아버지의 두 눈은 충혈되었다. 그 사건이 있던 날 밤 달빛이라도 조금 있었다면, 적군과 아군을 구분할 수 있는 표시달린 모자를 대위가 쓰고만 있었더라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이후 이런 삶을 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 날 이후 그의 삶은 그렇게 그에게서 등을 돌린 것이다.

"제주에 정착한 후에 그래도 별 걱정 없이 살고 있습니다. 마을 이장님이 집을 구해 주었고, 동네 청년들이 도와줘서 늙은 몸 하나 먹고사는 것은 지장이 없었지요. 정부에서 한 달에 4만 원 정도 돈이 나오는데 월세 4만 원 내면 한 푼도 없지만 내 한 몸 사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대부분 무료로 이용을 하거든요. 친척도 없고 내 한 몸이니 세상에 대한 미움도 미련도 없어요. 언제든지 제가 쓰러지면 장기기증을 할 수 있도록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는 돈 한 푼 없는 가죽장지갑을 꺼내들었다.

"여기에 사진을 끼워놓고 가끔씩 보고 싶습니다. 크게 말고 이 지갑에 들어갈 정도로 뺄 수 있나요?"
"그럼요. 뺄 수 있지요."

할아버지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월남전 이후 그 일그러진 삶으로 인해 세상을 원망할 법도 한데 그저 초월한 듯했다. 그리고 홀로 살아간다는 것, 그 외로움으로 인해 경제적인 부족함이라는 것이 더욱 더 그의 삶을 후려칠 것 같은데도 그저 담담했다.

"그래도 오랫동안 감옥 생활을 하니까 그것이 편하더군요. 그런데 그래도 자유라는 것이 뭔지 지금 혼자 사는 것도 편해요. 제가 감옥에 있을 때 성경책을 읽었어요. 창세기에서부터 말라기,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몽땅 읽었죠. 그래서 그런지 사진 찍으신 분이 목사님이시라고 해서 그냥 한 번 전화 해 본 겁니다. 반가워서."

18년만에 찍혀 봤다는 사진, 사진을 찍기 위해 벤치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는 그냥 할아버지가 아니라 부끄러운 세계사의 한 페이지 한 줄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역사로 보였다. 할아버지에게 꼬치꼬치 캐묻지 못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을 꺼내 자꾸만 난도질하는 것 같아서 더 이상 묻지 못했다.

"할아버지, 제가 이른 시간 내에 현상해서 지갑에 넣고 다니시기 좋게 코팅해 드릴게요."
"어이구, 난 그냥 18년만에 사진기 앞에 서봤다는 것만으로도 기쁜데요."

부끄러운 전쟁, 추악한 전쟁이었던 월남전. 21세기에도 이 추악한 전쟁은 이라크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월남전과 이라크전의 주역은 미국이다.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하는 것인가? 그 전쟁의 그늘에서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이들과 치유될 수 없는 상처로 인해 아파해야 하는 고통을 그들은 왜 감내해야만 하는가?

"그때 내가 대학에 가라는 부모님 말씀만 들었어도 다른 삶을 살았을 거예요. 그래도 이게 내 삶인데 어쩌겠습니까. 남은 삶 그저 덤덤하게 살아야지요."

제법 찬바람이 불어오는 김녕바다.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시는 할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에서 구부정하게 굽어버린 역사를 본다. / 김민수 기자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