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감청 법정공방 '진실게임'으로 전개

불법감청을 지시해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은 12일 첫 공판에서 "원장 재직중에 불법감청을 지시하거나 묵인한 사실이 없다"며 검찰의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국정원과 검찰이 일방적으로 공표한 피의사실과 달리 실체적 진실을 둘러싼 치열한 법정 다툼이 예상된다.

두 원장은 이날 오후 2시부터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최완주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제1회 공판에서 "불법감청을 통해 작성된 통신첩보 보고서를 보고받은 적이 없다"며 검찰의 신문내용을 대부분 부인했다.

검찰은 5시간 동안 이어진 법정신문에서 두 원장에게 "불법감청을 지시 또는 묵인을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계속 던졌지만, 두 전직 국정원장들은 관련 혐의를 철저히 부인하면서 시종일관 검찰과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특히 검찰은 최근 공판이 끝난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의 법정증언을 바탕으로 두 전 원장에게 불법감청을 지시 혹은 묵인하지 않았냐고 수 차례 물었지만, 그때마다 두 피고인은 부인으로 일관해 향후 공판이 '임동원·신건 원장 대(對) 김은성 차장' 간의 '진실게임' 양상으로 전개될 것임을 예고했다.

임동원 "김은성 차장이 '휴대폰은 감청 안되니 원장님도 안심하고 쓰라'고 했다"

먼저 검찰은 임동원 전 원장에게 "재임중 R2(아르 투)라는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와 CAS(카스)라는 이동식 휴대폰 감청장비의 개발 및 운용과 관련된 보고를 받아 알고 있지 않았냐"고 물었으나, 임씨는 "이번 사건으로 국정원과 검찰이 발표했을 때 그 장비들에 대해 처음 알았다"며 이를 전면 부인했다.

임 피고인은 또 김은성 전 차장이 "불법감청의 남용을 방지하려는 등의 목적으로 이동식 감청장비인 카스의 운영지침을 제정하자고 원장에게 건의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한 것과 관련해서도 "그 진술은 난센스"라며 "이해가 안간다"고 말했다.

임씨는 이어 "(국정원 및 검찰 발표에 따르면) 카스는 오래 전부터 개발해 99년 9월부터 사용되었다고 돼있는데 개발시험 단계에서 2000년 5월경에 11개 지부에 사용하다가 한달도 못되어 회수한 실패한 장비다"면서 "기술보안연구소에서 7∼8개월간 성능개발을 했으나 재실패해서 운용하지 못하고 나중에 폐기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임씨는 특히 "2000년 국정감사 한달 전인 9월말∼10월초 국정원 간부식당 오찬중에 휴대폰 감청이 화제에 올랐다"면서 "그 전에도 휴대폰 대 휴대폰 간의 감청은 안된다는 것을 보고받았지만 그때 전세계에서 휴대폰 감청장비를 개발한 나라가 없고 미국의 한 회사가 개발중이지만 아직 개발을 못했는데, 국정원이 휴대폰 감청장비를 개발했는데 실패하고 말았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다"고 소개했다.

아울러 임씨는 "그때 오찬 석상에서 해당 부서장이 '휴대폰은 감청이 안되니 원장님도 안심하고 쓰십시요'라고 말해 간부들이 웃은 적이 있다"면서 "당시 해당 부서장은 김은성 차장이다"고 밝혔다. 당시에는 휴대폰 감청이 안된다고 보고했던 김은성 전 차장이 이제 와서 휴대폰 감청이 된다고 하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임씨에 대한 변호인 반대신문 때도 변호인측은 "김은성 차장이 휴대폰 감청장비를 개발했으나 실패해 휴대폰 감청은 안된다고 말해 임 피고인은 원장 시절에 단 1개의 휴대폰만을 사용했으며 지금도 1개만을 사용하고 있다"고 우회적으로 김씨의 진술을 반박했다.

신건 "통신첩보에 정치인 동향 있었다면 당당하게 정보비서관에게 내줬겠냐"

임 전 원장과 마찬가지로 신건 전 원장 또한 국정원의 업무보고 시스템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하면서 검찰 신문을 조목조목 반박해 눈길을 끌었다. 특히 대검 중수부장을 지낸 신 피고인은 후배 검사의 신문내용을 조목조목 '수정'해 가면서 답변을 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신 피고인은 "원장 재임중 휘하에 차장급이 1·2·3차장과 기조실장, 월드컵안전대책본부장 등 5명이 있었으며 5개 분야가 각각 이질적 업무라서 차장들은 독립적으로 업무를 수행했다"면서 "원장은 R2 같은 장비의 개발사용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고 일축했다.

신씨는 또한 "통신첩보는 단서를 포착하기 위한 것으로 실무부서의 단순첩보는 국정원장까지 보고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내가 받아본 통신첩보 보고서에는 국내인 관련 감청자료로 볼 만한 부분도 없었다"며 혐의사실을 대부분 부인했다.

신 피고인은 특히 "매일 아침 정보비서관을 통해서 받아본 A4 용지 절반 크기의 통신첩보 보고서 테두리의 여백에 지시사항을 메모해 그 부분을 접은 채로 전부 정보비서관에게 건네주었다"면서 "만약 통신첩보에 정치인 동향보고가 있었다면 그런 지시를 쓴 통신첩보를 어떻게 당당하게 정보비서관에게 내줬겠냐"고 반문했다.

이에 검찰이 "피고인을 제외하고 차장과 8국 실무자들은 일치해서 '국내인사에 대한 감청이 있었다'고 진술하는데 그렇다면 원장이 모르는 가운데 이들이 공모해 장기간 불법을 감행한 것이 가능하냐"고 따져 묻자 신씨는 "왜 그런 게 있었다고 진술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면서 "나뿐만 아니라 감찰실장과 다른 차장들도 몰랐다"고 반박했다.

그는 이어 "이번 일이 터지고 나서 이수일 차장을 만나서 물어봐도 '전혀 몰랐다'고 했다"면서 "하물며 담당 차장이 몰랐는데 원장인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반문했다. 고(故) 이수일 전 차장은 신씨의 전주고 후배로서 막역한 관계였다.

이처럼 김은성 전 차장과 8국 일부 직원들의 진술에 의존한 검찰측 주장과 두 원장의 주장이 상반됨에 따라 향후 공판에서는 검찰이 확보한 전직 국정원 직원들의 진술이나 전직 국정원장들의 주장 중 어느 한쪽의 진술은 '거짓말'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따라서 향후 공판과정에서는 김 전 차장의 진술에 의존한 검찰과 두 원장의 변호인 사이에 치열한 '진실게임'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김은성 전 국내담당 차장은 임동원·신건 두 원장 재임기간에 걸쳐 차장을 지냈다. 김은성 전 차장의 전임자는 엄익준씨이고 후임자는 이수일씨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천용택·임동원 원장 시절에 차장을 지낸 엄씨는 재직중인 2000년 5월 병(病)으로 사망했으며, 신건 원장 시절에 차장을 지낸 이씨는 지난 11월 두 원장의 구속 이후 자살했다.

변호인측, 검찰로부터 유죄 인정시 형량조정 제안 있었음을 간접 시사

이처럼 향후 공판이 '진실게임'이 될 것임은 이미 공판 시작 때부터 예고되었다.

신건 전 원장의 변호인인 이상형 변호사는 모두변론에서 "개인적 이해나 사회적 관심에서보다는 역사 앞에 진실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 피고인과 변호인이 이 재판에 임하는 자세다"면서 "7순을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굳이 이 어려운 법정투쟁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은 역사 앞에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과 법조인으로서 살아온 강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변호사는 또 "이 사건 발생 후 기소시까지 피고인이 일신상의 안일을 도모했다면 불구속 기소되거나 기소조차 되지 않았을 수도 있음은 수차례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고 말해 검찰로부터 유죄 인정시 형량조정 제안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그는 또 "역사는 때로 강자에 의해서 미화되기고 하도 왜곡되기도 한다"면서 "그러나 진실에 대한 용기와 믿음이 있기 때문에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변호사는 "재판부가 지금까지의 언론보도나 다양한 정치적 견해에 대한 모든 선입견과 예단을 버리고 심리해주길 바란다"면서 "앞으로 검찰의 공소사실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사실이 아님을 밝혀낼 것"이라고 말해 치열한 법정공방을 예고했다. / 김당 기자 (오마이뉴스 축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