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다 변해도 변할 것 같지 않던 어머니의 변신

1993년 11월, 늦은 나이에 동갑(33) 처녀와 결혼식을 올렸던 잉걸 아빠.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세상에 둘도 없이 탁 트인 어머니와 속이 꽉 찬 여자, 부러울 게 없었다. 그렇게 두 여자와 동거를 시작한 그해 겨울. 잉걸아빠는 행복에 겨워 앉은 자리마다 오줌을 지리고(?) 다녔다. 입은 찢어져 늘 귀에 걸렸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구름 위를 걸어 다녔다.

세상 모든 어머니가 질투를 해도 당신만은

어머니는 어디 가나 이해심 많기로 소문난 분이셨다. 1989년, 예순둘 연세에 총각아들 따라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으로 오시자마자 동네를 평정해버렸다. 자잘한 다툼과 알력이 꽤 심한 안노인들 잔돈푼 내기 화투판에서도 어머니는 학으로 비유되셨다. 단 한 번도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으셨다. 사리판단 분명하고 다툼이 있을 것 같으면 아예 양보부터 해버리는 어머니를 그 누구도 싫어하지 않았다.

결혼 직전, 아내는 홀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조금은 겁내고 있었다. 그런 아내에게 나는 "세상 모든 어머니가 질투를 해도 우리 어머니는 아니다"라고 확신에 찬 눈빛으로 그 이유까지 조목조목 설명해 결국 설득을 했다.

시작은 꿈결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웃으셨고 아내 역시 최선을 다했다. 고부갈등? 남 얘기였다. 홀어머니 외아들 문제 있다? 역시 강 건너 얘기였다. 누구네 홀어머니가 아들 내외 자는 방을 엿보다가 대판 싸움이 났다느니,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사생결단이 났다느니, 누구네 아들이 출장 간 사이 한 품은 며느리가 밥을 아예 안 해주는 통에 병든 노모가 결국 병원에 실려 갔다느니 등등 모두 딴 나라 얘기였다는 말이다.

그러던 어머니의 말수가 점점 적어지기는 했지만 되룽되룽한 나는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런 우리 가정에 잊지 못할 사건이 발생한 것은 몇 달 뒤였다.

결혼 이듬해 아내가 임신을 했다. 임신 석 달째인 1994년 3월 말. 안양 대동문고에 책 사러 나갔던 나는 동네 선배 음식점에 아무 생각 없이 전화 한 통을 걸었다. 별일 없으면 와서 점심이나 같이 하자고 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형수 생일이었다. 고깃집에 거방지게 차려진 상을 보고 빈손이 무안했지만 선배는 괘념 말라고 했다. 선배는 집에 전화해 아내와 어머니를 모시라고 했다.

"어머니는 화투 치러 가셨어요."
"그럼 당신만이라도 나와요. 갈비가 아주 일품이야. 어머니는 어차피 저녁에야 오실 테고. 여기서 갈비 좀 싸가지고 가면 되니까."

입덧이 심한 아내였는데 그날은 모처럼 회가 동하는 모양이었다. 실컷 먹고 마시며 떠들다가 오후 세 시 무렵에야 소갈비 댓 근을 싸들고 일어났다. 집에 도착해보니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처음에는 아내가 잠그기를 깜빡 잊은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었다. 문소리가 나자 어머니가 인기척을 내셨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어머니의 눈빛에 당황했다. 차갑다 못해 싸늘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봄날은 가고, 엄동설한 북풍한설 몰아치다

"내가 없어져야겠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니들, 짜고 어디 다녀온 거
아니냐?"

자초지종을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뼈 빠지게 키워 놨더니 계집년 치마폭에 휘감겨 벌써부터 어미는 안중에도 없구나', '내가 이 꼴 보자고 목숨 걸며 삼팔선 넘어온 게 아니다', '내가 일찍 안 왔으면 니들끼리 나가서 잘 처먹고 다닌 일 죽어도 모를 뻔 했구나', '니들 허구한 날 어미만 나가면 이 짓거리였냐?' 등등 내 어머니가 아닌 듯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보다 못한 아내가 나서서 소갈비 봉투를 내보이며 오해라고 아무리 말씀 드려도 소용없었다. 어느새 눈물범벅이 된 아내는 지쳤는지 주저앉아 숨죽이며 울기 시작했다. 그런 아내를 칼끝 같은 시선으로 내려다보시던 어머니는 소갈비 봉투를 들고 베란다로 가더니 밖에다 휙 던져버렸다. 그리고 뼈에 박히는 말씀을 거푸 뱉으셨다.

"빨갱이 굴속에서도 살아온 내가 네 년이 시어미 몰래 서방 꼬드겨 처먹다가 남은 거나 뒤치다꺼리할 줄 알았냐? 쟤, 이런 아들이 아니었다. 네 년이 오고부터 내 아들이 변했어!"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폭풍이 지나간 뒤 어머니는 당신 방에, 아내는 안방에, 나는 서재에, 그렇게 갈라졌다. 아무리 곱씹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어머니만큼은 절대 아니라고 믿었건만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모든 어머니가 질투를 해도 내 어머니는 절대 아니라고 그렇게 믿어왔는데.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밤새도록 조각상처럼 앉아 있었다. 살이 떨렸다.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할지 딱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동녘이 희붐하게 밝아올 무렵, 나는 어머니가 왜 그러셨는지 그 이유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로소 어머니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연세를 드셨어도 어머니는 여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 숙명을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아내가 걱정이었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던 나는 아들이요, 연인이요, 남편이었던 것이다. 어머니 얘기를 들어주는 살가운 딸이요, 동네에 소문난 효자에 자랑스러운 피붙이였다. 그런데 장가들더니 집에만 들어오면 안방행이 아닌가. 어미 방부터 들러 어깨며 허리며 주물러주고 곰살맞기만 하던 아들이 다녀왔다는 인사 한마디 쓱 던지면 안방으로 들어가 통 나올 생각을 안 하니 배신감마저 느끼셨겠지.

다음 날부터 우리 집 분위기는 흉가가 따로 없을 정도였다. 식사 때마다 숟가락 젓가락 부딪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샌드위치 신세가 바로 이런 것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지옥이었다. 현관 복도를 지나면 왼쪽은 어머니 방, 오른쪽은 안방이었다. 어머니 방에서 지체하면 아내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안방에서 안 나오면 어머니 눈초리에 서리가 맺혔다. 아내는 "오직 당신 하나만 보고 시집왔는데 내가 이런 고통 받을 줄 몰랐다"며 울먹였다. 어머니는 "마누라 치마폭에 휘둘리는 놈 치고 큰일 하는 놈 못 봤다"시며 내 등짝을 치셨다. 나는 서재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어머니를 설득하려고, 또 아내를 이해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무소용이었다. 설득과 이해시키기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아내가 없을 때는 어머니랑 맞장구를 치며 아내 흉을 봤다. 안방에서는 아내의 베갯머리송사를 끈질기게 들어줬다. 아내가 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 무조건 "당신 말이 맞아"라며 다독였다. 비밀이 새서는 절대 안 될, 그야말로 피 말리는 작전이요, 모험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어머니는 아들이 역시 당신편이라고 생각하셨다. '며느리'에게 뺏긴 게 절대 아니라고 여기게 되셨다. 아내는 누가 뭐래도 이 남자는 자기편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식사 때 다시 대화가 오가게 되기까지 나는 체중이 7kg이나 빠져버렸다.

내가 웃으며 아내와 얘기하면 어머니 눈빛은 "그래봤댔자 걔는 내 아들이야"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와 내가 곰실곰실 이야기 나눌 때 아내 눈빛은 "어머니, 그러셔봤자 그이는 제 남편이에요"라고 말했다. 잉걸아빠 눈 밑에 '다크 서클'이 그때부터 급격하게 깊어졌다는 사실을 두 여자는 꼭 알아야만 한다.

지금은 친 모녀보다 더 가까운 두 여자, 그러나

전쟁 발발 두 달여 만에 종전협정을 맺게 되었다. 이후로도 크고 작은 갈등이야 항상 있었지만 두 사람은 친 모녀가 되어갔다. 손자 잉걸이를 품에 안고부터 어머니는 아예 아들은 거들떠 보지 않으셨다. 두 여자가 점점 아삼륙으로 맞아떨어지더니 둘이서 내 흉 보는 재미로 '티타임'을 갖기 시작했다. 내 흉 보거나말거나, 없는 흉보는 것도 아니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게 우리 집 평화는 다시 돌아왔다.

올해 어머니는 일흔여덟이시다. 애지중지 손자 잉걸이를 키워내셨는데 이제는 많이 아프시다. 약해지셨다. 그래도 나보다는 아내를 찾으신다. 하실 말씀도 아내한테 하고, 무슨 부탁도 아내한테 하고, 아내가 없으면 불안해 하신다. "나 아픈 티 절대 내지 마라"시며 꿋꿋하다. 두 여자, 나 모르는 비밀이 많다. 가끔은 지팡이를 짚고 윗집에 잠깐잠깐 화투치러 가시기도 한다.

"어머니 집 비운 새 우리끼리 어디 맛있는 거 먹으러 가면 어쩌시려고?"
"그러거나 말거나!"
"그럼 옛날에 나 신혼 때는 왜 그러셨수?"
"모르지. 네 아버지가 바람피울 때도 질투 같은 거 안 했는데, 너 장가들고 마누라랑 새새거리니까 눈이 뒤집히더라."
"그럼 지금은?"
"말아라, 쟁그랍다. 난 잉걸이 하나면 된다."
"그럼 잉걸이 장가들 때까지 사셔야지."

지팡이를 내짚다말고 어머니가 뒤돌아보신다. 하회탈 같은 합죽웃음을 보여주시는데 왠지 쓸쓸하다. / 이 동 환 (오마이뉴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