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 하면 떠오르는 추억

내가 어렸을 적, 어머니를 따라 노량진시장에 가면 꼭 맞닥치는 사람이 있었다. 다들 먹고 살기 바빴던 시절이었음에도, 덕칠이, 또는 떡칠이라고 불리는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는 것뿐이었다. 누구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큰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이승만 박사", "김일성", "북진" 이런 말들이 대여섯 발 거리에 있는 사람에게 간간히 들리는 정도였다.

그가 말을 그칠 때는 먹을 것을 얻을 때였다. 그나마 곱게 미쳤던지, 덕칠이는 남의 물건을 마구잡이로 집어가는 짓은 하지 않았다. 손도 내밀지 않고, 그저 먹고 싶은 것 옆에 조용히 서있는 것, 그것이 그의 구걸방식이었다. 그 때 그의 시선은 마치 물건에 관심 없다는 듯이 애먼 곳을 바라봤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그나마 덕칠이에게 남은 자존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가 과일 리어카 옆에 서서 말없이 해장국집을 보고 있으면 과일장사 아저씨는 투덜거리면서 일어나 한 귀퉁이 썩은 사과를 집어줬고, 해장국집 앞에서 과일 리어카를 보고 있으면 뚝배기에 밥과 선지가 가득 담긴 해장국이 쟁반에 담겨 나왔다. 비록 가게에 들일 수 없어서 길바닥으로 내주는 식사였지만 아주머니는 깍두기를 푸짐하게 챙겼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 광경은 마치 덕칠이가 요구하지도 않은 것을 사람들이 알아서 내놓는 꼴이었다. (후에 <대부> 2편에서, 노점상이 "선물로 드리는 것이니 가져가시라"고 하니까 지역 보스가 된 로버트 드 니로가 "언제든지 부탁할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하던 장면에서 덕칠이 생각이 나서 웃은 적이 있다.)

시장골목 가운데 있는 목판 우동집의 긴 나무의자 뒤켠에 서있으면, 건너편에서 양말이며 속옷을 팔던 노점상 아주머니가 "우동집 아줌마, 덕칠이가 나보고 우동 달래" 하면서 깔깔거렸다. 우동집 아줌마가 "돈 가져왔어?" 하고 물어보면 그는 주머니를 뒤지는 척 했을 뿐, 한번도 돈을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너 정신 말짱해지면 외상값 다 갚을 거지?" 하는 우동집 아주머니의 다짐에 고개만 끄덕이면 됐다.

뿐만 아니었다. 가끔 떡장사 할머니는, 그의 요구하는 몸짓이 없음에도, "덕칠아 이리와" 하고 불러서는, 어제는 어디서 잤니? 아침에는 뭘 먹었니? 이런 말들을 주절주절 뱉었지만 덕칠이는 언제나 그랬듯이 노코멘트. 떡장사 할머니는 "저기 공동수도에 가서 세수하고 손 씻고 와" - 마치 옆집 애한테 하듯이 타일러서 씻으러 보내놓고서는 인절미 몇 개에 고물을 듬뿍 묻혔다.

시장에 있는 천안상회 아주머니와 어머니는 무척 친하셨던지, 우리 집이 경기도 광주로 이사했다가 다시 의정부로 이사해서 자리를 잡기까지 몇 년이 지나는 동안, 어머니는 노량진 부근의 그 많은 친척들을 제쳐놓고 천안상회 아주머니를 보고 싶어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던가 5학년 때던가, 어머니와 함께 서울 나들이를 하면서 천안상회에 들렀는데, 그 때 내 눈을 놀라게 한 것이 있었다.

덕칠이가 여전히 "이승만"과 "북진통일"을 중얼거리며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어렸던 나는, 당시만 해도 추웠던 그 겨울들을 어떻게 났을까 하는 걱정보다는, "덕칠이 할머니"라 불리던 떡장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누구에게 떡을 얻어먹었을까 하는 것이 더 궁금했었다.

그 후로 또 몇 년이 흘렀고,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우연히 찾아간 의정부 시장의 목판 우동에 끌려, 시장 드나드는 재미를 맛보게 되었는데….

하하 세상에 이럴 수가. 거기에도 '덕칠이'가 있었다. 비록 모습이 다르고 중얼거리는 대사는 달랐지만, 그건 분명 '덕칠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 나이의 곱이 되서 내가 출판사를 하던 십 몇 년 전에도 지방으로 수금하러 다니면서 심심치 않게 '덕칠이'를 봤다. 동대구역 옆 시장에서는 경상도 사투리를 하는 '덕칠이'를, 광주 양동시장에서는 전라도 말을 하는 '덕칠이'를….

하지만 이제 어느 시장에도 '덕칠이'는 없다.

'덕칠이'가 죽은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덕칠이'의 존재를 귀찮게 여겨 어디 딴 데로 갔는지 나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어느 시장에서나 볼 수 있었던 '덕칠이'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라진 것은 과연 '덕칠이'뿐일까?

그를 받아주고 먹여주던 풍경이 사라졌고, 우리의 마음 속에서도 덕칠이가 있던 공간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가물거리는 기억이요 과거에 대한 향수일 뿐이다.

이제 나는 안다. 사람들이 덕칠이를 먹여준 것이 아니라 덕칠이가 사람들을 지켜줬다는 것을.

어느 날 갑자기 미치고 싶어질 때, 너무도 답답한 현실에 미친 척이라도 해야 살 것 같을 때, 그것이 받아들여질 공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는 아파트 빈방에 쭈그리고 앉아 흐느끼며 절규하리란 것을.

혹자는 덕칠이가 죽었다고 하고 혹자는 어디로 갔을 것이라 한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그를 잃어버린 것이다. 아니, 잃어버렸다는 사실마저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 정병태 기자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