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극장 몰래 뚫고 들어가다 붙잡힌 이야기

1950년대 중반. 내 초등학교 4-5학년 시절 이야기다. 6.25전쟁으로 전 국토가 거의 초토화되고 아직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이어서 국민 대다수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이다. 우리 신문의 절대독자층인 20-30대들에게는 아마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렵던 시절에도 영화라는 것이 있었다. 아직 TV도 없었고 라디오도 아주 귀하던 시절이었다. 서울에도 극장이 손꼽을 정도로 많지 않던 시절이어서 시골에는 읍내에 창고 같은 극장이 한두 개 있을 정도였다.

영화라고 해도 오늘날의 넓고 큰 칼라화면에 실감 나는 음향 시스템 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10mm라는 정사각형의 작은 흑백 화면에 한 사람의 변사가 영화 속의 대사를 혼자서 그럴 듯 하게 읽어주는 무성영화였다.

그러나 그 시절의 영화가 지금의 영화보다 재미없었겠다고 생각하면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그 시절에는 정말 볼거리나 오락 등 즐길만한 것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영화는 사람들이 보고 즐길 수 있는 최고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자라던 시골은 읍내에서도 40여리나 떨어진 농촌이었다. 읍내에 한 번 나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덜덜거리는 버스가 하루에 한두 번 다니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 중에 혹시 읍내에 나가 영화라도 보았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날 밤 그 집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영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주인은 말솜씨를 총동원하여 그럴듯하게 영화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마을 사람들은 이야기를 들으며 때로는 혀를 끌끌 차기도 하고 눈물도 글썽이며 같은 감동에 젖어드는 것이었다.

마을 공터에 가설극장 들어오던 날

5학년 때였던가, 봄날이었다. 면 소재지에 있는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신작로 옆 공터에 가설극장이 설치되고 있었다. 2-3m 정도의 기다란 장대를 빙 둘러 세우고 널따란 광목 포장을 둘러치는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 영화다" 우리들의 입에서 저절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가. 영화가 들어오다니, 일년에 고작해야 두세 차례 들어오는 영화가 아니던가. 우리 개구쟁이들은 공연히 마음이 들떠 집으로 달려갔다.

마을에 들어서니 마침 영화 홍보반이 순회 중이었다. 지게에 커다란 스피커를 짊어진 사람을 뒤에 따르게 하고 변사가 마을을 돌며 영화 홍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친애하는 동네 주민 여러분! 오늘 밤 면사무소 근처 공터에 영화가 들어왔습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감동의 영화 '검사와 여선생' 기대하시라! '검사와 여선생'. 기회는 오늘 밤 한 번 뿐입니다. 눈물의 영화 '검사와 여선생'이 오늘 밤 여러분을 모십니다."

마을 조무래기들 10여명이 신이나 쫓아가고 있었다. 그런 홍보 자체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여간 신기하고 신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부고 숙제고 다 팽개치고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우리들은 가설극장으로 달려갔다.

가설극장 주변은 조무래기들이 많이 모여들어 있었다. 입장료도 없이 공연히 마음이 들떠서 나온 아이들이다. 물론 우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모님에게서 입장료를 타내는 건 아예 꿈도 꿀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냥 무작정 가설극장 주변에 모여드는 것이다.

가설극장 포장 주변은 몇 미터 간격으로 경비가 삼엄하다. 조금만 한눈을 팔거나 빈틈이 보이면 어느 새 포장을 들추고 잽싸게 안으로 들어가는 조무래기들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경비가 삼엄해도 조무래기들은 포기하지 않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영화인데 쉽게 포기하겠는가. 그리고 계속 기다리노라면 영화가 종반에 접어들 무렵에는 틀림없이 포장을 모두 걷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돈이 없어 못 들어가고 서성대는 아이들을 위해서라기보다 영화가 끝난 후 한꺼번에 흩어지는 사람들 때문에 포장이 찢어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포장을 걷어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는 것이다. 겨우 영화의 끝 부분만 본다는 것은 너무 재미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드디어 기회를 포착하였다. 우리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청년에게 친구의 형이자 동네 주먹패거리인 청년이 담뱃불을 붙이는 짧은 기회가 발생한 것이다

"한 번 눈감아주면 안되겠나"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우리 일행 몇 명이 잽싸게 포장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뿔싸, 거의 성공이라고 쾌재를 부르려는 순간 거센 손길이 내 엉덩이 쪽 옷깃을 잡아챘다. 가볍게 끌려나온 나는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런데 붙잡혀 나온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또 한 명의 친구도 같이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XX들 너희들 잘 걸렸다."

경비를 서고 있던 청년이 손을 치켜들었다. 꼼짝 못하고 얻어맞을 찰나였다.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 때 또 다른 굵직한 목소리가 그 청년을 제지시켰다.

"어이, 형씨, 걔네들 내 동생들이야, 한 번 눈감아주면 안 되겠나."

바로 그 형이었다. 친구의 형형이 그 때 나서 준 것이다. 경비청년 앞에 떡 버티고 선 친구의 형은 청년을 눈빛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어느새 주변에는 몇 명의 청년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른바 텃세라는 것이다. 지역 주먹패들을 배려하지 않으면 가설극장을 하기가 어렵던 시절이었다.

사태를 파악한 청년이 한발 뒤로 물러섰다.

"뭐, 그렇게 합시다. 형씨 동생들이라니…."
"그럼, 기왕에 봐 주는 것, 화끈하게 얘들 안으로 넣어주쇼. 다른 애들은 다 들어갔는데."

친구의 형은 내친김에 확실하게 더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그러죠, 뭐. 너희들 빨리 들어가라."

변사에게 듣는 '검사와 여선생'

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그렇게 보고 싶던 '검사와 여선생'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영화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영화는 한 탈옥수 남자를 숨겨준 일로 남편의 오해를 사 칼부림까지 당하다가 오히려 남편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법정에 서게 된 여인의 이야기였다. 여인은 담당검사가 된 옛날 초등학교 교사 시절에 돌보아주었던 가난한 제자의 도움으로 무죄가 밝혀져 석방된다는 줄거리다.

"선생님! 저 ○○○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선생님의 그 인자했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검사님이. ○○○라고요?"

여인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숙이고 있다가 간신히 머리를 들고 검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인의 뇌리에 옛날 제자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것이었다.

배우들이 해야 할 대사를 변사가 대신 읊조렸다. 영화의 장면이 바뀔 때마다 때로는 여자의 목소리, 때로는 구슬픈 목소리로 변사가 관중들을 울리고 있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여자들은 대부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감동에 젖어들었다.

그렇게 가설극장이 들어와 2-3일 동안 2-3편의 영화를 상영하고 떠나면 학교 교실에서나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영화 이야기가 며칠씩 계속되었다. 오히려 영화를 보지 못하고 듣는 사람들이 더 감동에 빠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 시절, 배고프고 먹고살기도 힘들던 시절이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여리고 어쩌면 더 감성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를 픽션이 아니라 사실처럼 받아들여 더욱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던 시절이었다.

영화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던 시절 이야기다. 그러나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영화, 그래서 모처럼 기회가 주어지면 어떻게 해서든지 영화를 보려고 기를 썼던 것이다. 시골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일년에 겨우 한두 편의 영화밖에 볼 수 없어 늘 아쉽고 목말라했던 시절이었다. / 이승철 기자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