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보와 호동왕자를 만나고 문학의 밤에 흠뻑 취하고...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져 영화 속 이야기가 내 삶의 파편처럼 보일 때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산해내는 다양한 이야기들, 인생 변주곡. 그 속에 비슷한 사연들이 담겨 있는 것을 보면, 생김새는 달라도 사람 사는 게 이 집 일이 저 집 사연인가 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비슷한 리듬을 타며, 노래하고 춤추며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때로 삶의 윤활유 역할을 하며, 꺼져가는 영혼의 불빛을 밝히는 연료가 되는 이야기들, 그게 극장 안이든 밖이든 이야기가 없는 메마른 삶은 상상할 수 없다.

# 에피소드1: 소풍 가던 날, 교실에서 감상한 영화

소풍이 있어 삶이 행복했던 시절, 김밥과 삶은 계란을 챙겨 설레는 마음으로 소풍 가던 날, 갑작스런 빗방울 등장으로 장소가 교실로 바뀌었다. 책걸상을 몽땅 밀어내고 커튼을 쳐 갑자기 교실을 어둡게 만든 다음, 손으로 돌리는 구식 영사기가 쏟아내는 영화 감상. 분명 뭘 보긴 봤다. 그런데 무슨 내용인지 명확히 떠오르지는 않는다이승복 또는 똘이장군 같은 반공 영화 였던 것 같기도 하다.

영화를 본다기에 굉장히 들떴는데 좀 실망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인적이 뜸한 시골이었지만 그 전에도 좀 부지런하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옆 동네 어디에서 "가마니 깔아 놓고 영화 상영한다"는 소식통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어린이를 겁내지 않는 개들이 예고 없이 사람을 무는 낯선 옆 동네까지 가는 게 겁나끝내 못 갔다.

# 에피소드2: 시험 끝난 뒤 전교생이 읍내 극장에서 '람보'를 만나다

시험에 지친 학생들을 위로(?)하기 위해 학교 차원에서 '람보2 영화 감상'을 기획했다. 전 학년이 줄 맞춰 걸어 읍내 강진 극장에 모였다. 전에 <독수리 5형제> <다윗과 골리앗>을 보기 위해 동생들과 함께 들렀던 극장. 가끔 화면이 끊겨 학생들의 탄식과 야유가 터져 나왔고, 종종 화면에 장난기 있는 녀석들의 검은 손(?)이 등장해 몰입을 방해했지만, 고독한 사나이 람보가 등장해 치열하게 싸우는 영화는 재미있었다.

담임 선생님(여성)께서 "과묵한 사나이 람보, 사나이답고 멋지지 않으냐?"고 말씀하셔서 그때 나도 람보처럼 과묵한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고독한 사나이 람보는 내 인격과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 에피소드3: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오페라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고등학교 때 음악에 대한 열정이 굉장한 음악 선생님이 계셨다. 학생들에게 다양한 영역을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신 분이었다. 그 선생님 덕분에 생전 처음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 가 오페라 <호동왕자와 낙랑 공주>를 만났다. 주로 변두리에서 놀다가 서울 중심가로 발을 들여놓으니, 적응이 안 돼 굉장히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화면이 아닌 무대 위에서 직접 펼치는 배우들 연기와 아리아에 난 푹 빠졌다. 구슬픈 노래와 극 분위기가 아직까지 마음에 저장되어 있다. 독특한 체험이었다. 안타깝게도 현실 속에서 나를 위해 북을 찢는 여성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 에피소드4: '문학의 밤'에 빠져 '아름다운 밤'에 취하다

고등학교 때,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에게서 자주 문학의 밤 초대를 받았다. 한번 마지못해 따라갔는데, 아이들이 정성들여 준비한 연극, 콩트, 노래 등이 예상외로 재미있었다. 그래서 누군가 또 다시 초대해 주길 은근히 기대하던 찰나 고맙게도 청년부 회장을 맡은 한 친구가 '문학의 밤'에 오라고 열심히 설득해 주었다.

친구들은 나를 길 잃은 어린 양으로 생각, 예배당으로 끌어당겼을지 모르나 내 목적과 관심은 재미있는 공연 관람(이전에 몰랐던 세계)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친구 교회를 방문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친구는 안 보이고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 주소를 잘못 찾았음을 뒤늦게 감지했다. 그래도 이왕 온 김에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남았다.

학생들이 무대 위에서 펼치는 다양한 '끼'에 감탄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선물까지 받았다. 그날 한 청년이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이란 노래를 불렀는데,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는지 노래를 듣는데 꼭 전기에 감전되는 듯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진 다양한 연극, 콩트 내용은 가물가물한데 그 노래가 끼치는 자극과 영향력, 노래 속에 든 메시지는 강렬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수 없을까…."

다음날 만난 친구는 "너 기다렸는데, 온다고 하고는 왜 안 왔냐?"면서 원망했다.

# 에피소드 5: 고독한 복학생, 축제 때 강의실에서 영화 감상

제대 후 4학년에 복학했다. 축제 때 짝이 있는 청춘 남녀들은 호수 위에 배를 띄워 노를 저어 솔로들의 부러움을 자극하며 놀 때 난 마땅히 마음 둘 곳이 없었다. 한 때는 애인 대신 성경책을 옆에 끼고, 싫다는 사람들을 졸졸졸 따라다니기도 했지만, 4학년 땐 열정이 식었다. 캠퍼스를 배회하며 청춘남녀들이 어떻게 노는지 열심히 구경하며 쏘다녔다.

그 싸늘한 무대에, 복학한 친구가 나타나 "영화 상영하는 곳이 있다"면서 "함께 영화 보러 가자"고 권유했다. 무료 관람이었음에도 생각 외로 관객이 많지 않았다. 실재 인물을 다룬 감동적인 종교 영화 <불의 전차>와 <허드슨 테일러>, 이렇게 두 편을 즐겁게 감상했다. 대학 4년 삶에 쪼들려 그다지 낭만은 없었지만 마지막 축제는 두 편의 영화로 인해 의미가 있었고 기억에 남아 있다.

삶으로 기록하는 고귀한 내 인생 영화

가끔 내 인생이 드라마나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인생 전체가 한편의 대본 없는 영화 또는 드라마라면 통쾌한 역전극(희극)이 되길 기대해 본다.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이야기 조각들, 다양한 인생의 파편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인생 무대에서 생산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몽땅 모인 아름다운 걸작품이기를 꿈꾸어 본다. / 박주형 기자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