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제경이의 글을 읽고 배꼽을 잡았습니다

모처럼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녹차 향을 음미했다. 외국 방송인데 재미있는 NG장면과 동물들이 연출하는 폭소유발 화면들을 편집하여 보여주는 프로그램에 채널을 멈추었다. 저녁시간 부담 없는 웃음을 선사하는 볼만한 프로라 생각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TV화면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던 아내가 이번엔 원고지 묶음을 들추며 배꼽을 잡는다. 워낙 웃음을 참지 못하는 아내지만 아예 터진 웃음보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왜 그래? 어, 어, 이 사람이…, 내 참."
"이거…. 이거 제경이가 쓴 글인데 좀 읽어봐요."
"사람도, 무슨 내용이길래 정신을 못 차리나?"

초등학교 5학년 제경이의 이름과 글 제목 '우리 남한과 북한'이 200자 원고지에 쓰여 있다. 호국보훈의 달을 앞두고 학교에서 글쓰기 과제를 내준 모양이다. 글 성격과 제목으로 보아 전개될 내용이 어떠하리라는 짐작이 들지만, 평소 정리가 잘 안 되는 녀석이 장장 원고지 10장 분량의 글을 썼다니 자못 궁금함이 고개를 든다.

'우리 남한과 북한은 빨리 통일 됐으면 좋겠다.'

뭐, 시작은 잘 된 듯싶다. 진지함이 엿보이고, 무엇보다 글에서 말하고자 한 것을 미리 밝히고 시작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기에 무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의 흐늘거리는 필체도 또박또박한 '모범형'이다.

그러나 그 느낌은 불과 원고지 3장을 넘기지 못한 채 무너졌다. 금강산 관광을 다녀오신 외할머니로부터 전해들은 북한의 가난한 실상을 소개한 것까지는 그럭저럭 봐줄 수 있었다. 6·25 한국전쟁을 말하며 급격히 흐트러지기 시작한 논조가 그야말로 녀석 특유의 '좌충우돌' 논리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3년 동안 벌어진 6·25 전쟁 때문에 죄 없는 사람이 죽고 이산가족도 많이 생겼으니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민간(백성)들과 싸우신 분들과 이산가족들은 아무 죄 없이 천명을 거스르지 않고 천명에 순종했을 뿐인데, 인생은 천명과 수명 모두를 거침없이 잔혹한 삶(잔혹하게 만드는 것) 같다.

천명에 순종하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정의감이 있는 일을 해도, 악의적인 일을 해도 삶은 흐르는 물과 같이 일사천리(로) 가기에 수명이 끝나면 인생도 끝나고, 인생이 끝나면 정의감 있는 삶과 악의적인 삶으로 분열되어 있던 인생이 한번 하늘로 가면 모두 없어지나 보다.'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대충 이해가 가나 '천명'이니 '인생'이니 하며 문자를 들먹인 대목을 읽으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어지는 문장은 더욱 점입가경이다.

'아무리 고된 시련이 있다 해도, 아무리 부귀영화만 누리면서 태평성세한 삶을 산다 해도, 삶은 한 번 끝나면 부귀영화와 태평성세한 인생도 끝나는 법. 사람은 그 긴 인생을 살면서도 사람의 욕심이란 만족이 없는 법. 그리하여 중국의 진시황도 인생을 더 살려고 불로초를 구하려다 50세라는 짧은(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듯이 사람의 욕심이란 끝도 있어야 한다.

이렇듯이 사람의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미로 같은 것이다. 북한은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 결국 욕심이 죽음을 일으킨 것과 마찬가지다. 그냥 천명을 믿고 살면 복이 올지 모르는데 땅 욕심 때문에 전쟁을 일으켜 패배를 할 경우가 십중팔구인데, 왜 목숨을 건 도박을 하며 불속의 밤을 주우려 하는지, 일단 마음이 결합하지 않아서인 것 같다.'

평소 컴퓨터 게임을 하지 않는 시간이면 '삼국지'나 '꾸러기 한문숙어', '명심보감', '허풍이의 사서삼경' 등 역사나 한자에 관한 책을 즐겨 읽은 탓인지, 이곳저곳 잘도 찍어다 붙인 모습이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한두 줄에 불과한 것을, 이렇듯 장황하게 풀어놓은 것은 역시 정리가 잘 안 되는 녀석의 성격 탓이리라.

결국 전쟁의 책임은 남한에도 있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애초 통일을 이루었어야 한다며 그래도 전쟁이 없는 나라에 태어나 살게 해주신 조상님들에게 감사하다는 내용으로 글은 마무리 됐다. 물론 어김없이 한자성어가 사용돼 끝까지 배꼽을 움켜쥐게 만들었다.

'내가 전쟁이 존재하는 곳에 태어났으면 그 목불인견의 광경을 보고야 말았을 텐데. 지금 이렇게 태평성세를 유지하고 이렇게 공부를 하면서 행복하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돌아가신 조상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다. 조상님을 보면 꾸벅 절을 하고 싶다.'

반복해서 읽어 보았지만 딱히 어느 부분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잘 나가다가 느닷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논리와 대책 없이 동원된 용어들 때문이다. 글 내용을 요약하자면 '전쟁은 없어야 하고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녀석 특유의 '철학적' 논리전개에 감히(?) 가위질 할 부분을 찾아내기도 힘들다.

제경이를 불렀다. 녀석도 엄마아빠의 '박장대소(녀석에게 전염된 듯)'에 멋쩍은 표정이다. 문제성 있는 몇 소절을 엄마가 읽어 내려가자 깔깔거리며 스스로도 억지 동원된 단어들이 어색함을 인정한다.

"제경아, 글은 유식함을 과시하기 위한 게 아니야. 잘 쓰는 글이란, 우리가 평소 사용하는 쉬운 단어들을 이용해서 충분히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하면 되는 거란다. 그런데 제경이 한자성어 실력은 아빠도 못 당하겠는걸."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쨌든 짧은 일기쓰기에만 익숙해져 있던 녀석이 원고지 10장에 달하는 '대작'을 완성한 것만으로도 흐뭇한 마음이 든다. 스스로도 대견스런 모양이다. '좌충우돌'로 상징되는 제경이의 글쓰기 실력이 '일취월장'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성락 기자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