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통치 200년 후 드러난 영국의 흔적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 플로리다 동북부 세인트 어거스틴에서 영국이 통치하던 1700년대의 군사 방어시설 흔적이 발굴됐다. 스페인의 오랜 통치 이후 드물게 남은 영국의 유산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도시 고고학자들은 지난해 가을, 1781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영국군 요새의 해자(요새 둘레에 만든 방어용 구덩이)를 발견했고, 올해 2월 세인트 어거스틴의 링컨빌 지역에서 발굴을 마쳤다. 이 지역에는 현재 단독 주택 건설이 예정돼 있다.

"세인트 어거스틴에는 약 20년간 영국이 통치했던 시기가 있다"라고 도시 고고학자 안드레아 화이트는 말했다. "당시 영국은 이 지역에 7개의 요새를 세웠다고 알려져 있지만, 고고학적으로 실체를 발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라고 했다.

세인트 어거스틴은 미국에서 유럽인이 가장 오래 거주한 지역으로, 스페인은 1600년대 후반에 성채인 '산마르코 요새(Castillo de San Marcos)'를 건설했다. 이 요새는 현재 국립기념물로 보존돼 있다.

스페인 성채를 넘겨받은 영국, 직접 구축한 방어선은 처음 발굴

1763년 영국이 플로리다를 통치하게 되면서 기존 스페인 방어시설을 인계받았지만, 서쪽 강에서의 공격 가능성에 대비해 새로운 전초기지를 세웠다. 그러나 영국의 통치는 미국 독립전쟁과 함께 1783년에 종료되며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졌다.

화이트는 "이 요새들은 영국이 직접 만든 유일한 방어선이다. 대부분은 스페인이 만든 시설을 재활용했을 뿐"이라며 "이번 발견은 잊혀졌던 영국의 역사를 되찾는 데 의미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번 발굴은 1986년 세인트 어거스틴 시가 제정한 고고학 보존 조례 덕분에 가능했다. 해당 조례는 개발 전 고고학 조사를 허용해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할 수 있도록 한다.

이번 발굴지에는 1700년대 초 아메리카 원주민 선교지가 있었고, 이후 농장이 형성됐으며 남북전쟁 이후 링컨빌 지역이 조성됐다.

화이트는 "고고학적으로 많은 시기의 흔적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로 해자를 발견해 매우 흥분됐다"라고 전했다. 이번에 확인된 해자는 폭이 약 4.5미터에 달했다.

수천 개 식물 씨앗 발견…식물 방어벽 가능성도

비록 요새의 정확한 크기나 형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현장에서 수천 개의 식물 씨앗이 발견됐다. 연구팀은 인간과 식물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식물민속학자와 협력해 구조물의 용도와 건설 방식을 분석 중이다. 스페인 단검 선인장이나 부채 선인장과 같은 식물들이 침식 방지 또는 방어 목적으로 사용됐을 가능성도 있다.

건설을 맡은 제이슨 하이드거켄은 "세인트 어거스틴의 매력 중 하나는 바로 역사다"라면서 "이 지역에서 살고 사업을 한다면 역사 보존을 위한 인내심이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세인트 어거스틴 시는 지난 40년간 1200건 이상의 고고학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으며, 스페인 식민지 시대뿐 아니라 4000년 전 원주민 마을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을 조사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