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서울=오마이뉴스) 박근직 기자 = 2024년 10월 10일,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언론을 통해 발표되자 그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인 <소년이 온다>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소년이 온다>는 5.18을 다룬다. 2014년 5.18 다음날 세상에 처음 나왔으나 그 존재를 모르고 있다가 노벨상 덕분에 알게 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연달아 네 번 읽었다.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앞뒤를 오가며 부분 부분 다시 읽은 것까지 꼽으면 아마 예닐곱 번도 더 될 것이다.

작가는 여섯 명의 주인공을 등장시켜 저마다 겪은 사건을 통해 5.18의 실상(實相)을 보여준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그 열흘이 주인공 두세 명에게는 짧은 인생의 마지막 이야기가 되지만, 나머지 주인공에게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 인생 드라마가 펼쳐진다.

제1장은 주인공 강동호 이야기다. 중3, 열여섯 살 동호는 도청 광장에서 자신의 집 사랑채에 세 들어 사는 동갑내기 친구 정대가 옆구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걸 보고서도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한강은 동호의 눈을 통해 5.18이 어떤 것이었는지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실감나게 보여준다. 전남도청 민원봉사실 복도와 상무관을 중심으로 한 제한된 공간을 통해 벌어지는 사건의 한 자락만 보여주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5.18 전체를 유추할 수 있게 이끈다.

제2장에서 작가는 정대의 원혼(冤魂)을 통해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이 희생자를 알아볼 수 없도록 흰색 페인트를 얼굴에 칠하거나 학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시신들을 석유로 태워버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는 사실을 여과 없이 고발한다.

1986년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김은숙의 시선이 제3장에서 펼쳐진다. 출판사의 직원이 된 스물다섯 살의 김은숙은 어느 날 형사로부터 목이 뒤로 꺾이도록 뺨 일곱 대를 맞는다.

제4장은 5.18 당시 스물세살이었던 '교대 복학생'이 본 광주인데,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1990년에 인터뷰에 응하는 형식으로 그날 이야기를 한다. 그는 계엄군이 마련한 각본에 따라 거짓 자백을 해야만 했는데 심문조서를 쓰는 과정에서 극심한 폭행과 고문을 당했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1년, 마흔셋이 된 임선주는 제5장의 주인공이다. 어느 날 5.18을 연구하는 사람으로부터 자신이 그때 겪었던 일을 증언해 달라는 부탁 편지와 함께 휴대용 녹음기가 담긴 소포를 받는다. 선주는 자신이 겪은 일을 증언할까 고민도 하지만 끝내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다.

제6장은 2010년 동호 어머니 관점이다. 엄마는 전날 아들을 데리러 전남도청으로 갔으나 데려오지 못하고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직접적인 발단은 전날 내려진 전국 비상계엄 확대 조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 직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10월 27일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일부 대도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는 사회 혼란을 막기 위한 조치였으나, 12월 12일 전두환과 신군부의 군사반란 이후 계엄 통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1980년 5월, 전국적으로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자,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는 기존의 부분적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대학 휴교령, 정치 활동 금지, 김대중 등 민주인사 체포 등 강경 탄압을 단행했다. 이에 반발한 광주 시민들이 시위에 나섰고, 이는 5·18 민주화운동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그러니까 비상계엄령 선포 자체가 문제였던 것인데,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가 윤석열 대통령에 의해 내려진 12.3 비상계엄령 선포 이후인 1월 20일에 서둘러낸 책 을 보면 비상계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계엄은 영어 martial law를 한자어로 번역한 것으로 적의 영토를 점령한 군 지휘관에게 왕의 권한을 위임한 데서 유래한다. 기본적으로 포로를 상대하는 군법이기 때문에 법 집행 방식 자체가 야만적이고 잔인했다. 계엄은 그 자체로 나라 전체를 전시상태로 만든다. 살인, 방화, 약탈 등이 정당해지는 '전시 인간성'은 '계엄 시의 인간성'이기도 하다. '뒤집어진 인간성'이 표준이 되기 때문에 권력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포로로 취급하여 영장 없이 체포, 투옥, 고문하고 군사법정에서 재판하거나 아예 재판도 하지 않고 처형하는 게 당연해진다. 헌법에 '전시 또는 그에 준하는 사변' 때에만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도록 규정한 건, 계엄이 인간성 자체를 전복시키고 국가를 '인권 보호 기구'가 아니라 '대민 폭력 기구'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엄령을 통해 인위적인 전시 상황을 만들면 인간 내면의 악마성이 해방된다. 타인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게 되면 사람의 마음은 저절로 악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이미 입증되었다고 전 박사는 밝히고 있다.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지 한강도 <소년이 온다>에서 지적한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문장은 소설 속에서 어떤 책을 소개하는 형식을 띠지만 한강 작가의 속마음일 것이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시상식을 앞두고 열린 강연에서 "잔혹성과 존엄함"이라고 달리 표현했으나 인간이 어떤 군중과 함께 있느냐,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숭고하거나 존엄할 수도 있고, 잔혹성을 띠거나 야만적일 수도 있다고 보았는데 이는 전우용 박사의 견해와 같은 맥락이다.

대통령 윤석열은 정국(政局)을 장악하기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이번 비상계엄이 실패한 데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성장과 국민의 각성이 주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계엄 선포와 동시에 국민들이 국회로 달려가 군인들을 막아서지 않았다면, 국회의원 190명이 모여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 시키지 않았다면, 계엄에 동원된 군대의 지휘관과 장병들이 대통령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무작정 따랐더라면, 우리는 5.18보다 더한 일을 당했을 것이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국민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을 거치며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제단에 피를 뿌렸고, 그분들의 희생 덕분에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그 토대가 탄탄해졌고 뿌리가 더 깊어졌다.

국민의 각성도 그렇다.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노력한 덕분에 국민의 민도(民度)가 엄청나게 높아졌다. 때마침 영화 <서울의 봄>이 2023년 11월 22일에 개봉하여 순식간에 관객 수 천만을 돌파했고, 한강 작가가 작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주요 작품인 <소년이 온다>가 크게 주목을 받았다.

두 작품 모두 살인마 전두환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이 작품들을 통해 국민들이 비상계엄의 위험성을 미리 학습한 상태였다. 다시 말해 미리 예방주사를 맞았던 셈이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