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의 삶과 사상을 왜곡 이용하는 집단들

(뉴욕=미주뉴스앤조이) 양재영 기자 = 종전을 한달 앞둔 1945년 4월 9일 새벽 프로센부르크 강제수용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 디트리히 본회퍼의 삶과 신학이 수십여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후손들은 이러한 현상에서 보여지는 본회퍼의 이미지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본회퍼의 삶은 이미 한 개인의 역사를 넘어 신화화되고 있다. 21세기들어 그의 삶을 다룬 영화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고, 그의 이야기는 전세계에서 베스트셀러로 팔리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기독교 국가주의의 버팀목이 되고 있으며, 트럼프를 지지하는 그룹들이 내놓는 미래 계획들을 정당화하고 있다.

우선, 영화에서 그의 인기는 폭발적이다. 예수의 이야기를 다룬 <선택받은자>(The Chosen)의 투자사인 엔젤 스튜디오가 지난해 11월 내놓은 <본회퍼: 목사, 스파이, 암살자>(Bonhoeffer: Pastor. Spy. Assassin)를 내놓았고, 오는 4월에 또다른 영화 <본회퍼:홀리 트레이터>( Bonhoeffer: Holy Traitor>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본회퍼의 일생을 다룬 영화는 이미 2000년 <본회퍼: 에이전트 오브 그레이스>가 만들어졌으니 21세기에만 벌써 3번째다.

특히 지난해 개봉한 <본회퍼:목사, 스파이, 암살자>에서 묘사된 '총을 든 암살자'로서의 본회퍼의 이미지는 극단적 이념으로 이용될 수 있는 잘못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물론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시도를 사전에 알고 있었고,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 계획을 지지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본회퍼는 이 작전에 깊숙히 개입하지는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본회퍼와 함께 친형제 한 명과 두 명의 매부도 처형됐지만 이는 히틀러의 광기어린 숙청 작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본회퍼의 손자인 슐라이허 타페저는 “이 영화에서 묘사된 (본회퍼의) 모습은 정말 터무니없는 것들이다”며 “그의 신학과 삶의 과정을 완전히 잘못된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영상만이 아이다. 지난해 미국의 대표적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이 만든 트럼프 재선을 위한 극우 정책 보고서 <프로젝트 25>에서도 본회퍼가 등장한다. 케빈 로버츠 해리티지 재단 회장은 보고서에서 본회퍼를 다음과 같이 이용하고 있다.

“오늘날 급진 좌파들은 미국 남부 국경지역의 위기 상황에도 그들의 불법 이민자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아무리 범죄가 증가하고, 학교와 병원들이 부족해지고, 근로자들의 임금이 감소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국경 개방 운동은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값싼 은혜’의 전형적인 예이다…좌파들이 환경운동가들과 벌이는 불륜도 ‘값싼 은혜’의 좋은 예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정책들로 인해 가장 많이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노인들과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취약계층들이다.”

본회퍼 논란의 가장 중심에 섰던 인물은 트럼프 지지자이자 2010년 베스트셀러인 <본회퍼: 목사, 순교자, 예언자, 스파이>(토마스 넬슨, 2020)의 저자인 에릭 메탁사스이다.

그는 조 바이든 후보가 당선된 2020년 대선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며 ‘본회퍼 모먼트’(Bonhoeffer Moment)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본회퍼 모먼트’는 도덕적 위기가 고조되는 순간에는 기독교인들이 정부에 반대하며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그는 이후 동성결혼 합법화 등의 논쟁때마다 본회퍼를 꺼내들어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디트리히 본회퍼의 이야기를 통해 회심하고 있다. 내가 책을 통해 말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과거 독일 사람들은 히틀러가 약속한 장미빛 청사진을 믿지 않고 저항했던 것처럼, 우리도 코로나19 백신이나 2020년 대선과 같은 것들에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

본회퍼 인기는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요즘 연예인급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전광훈은 2020년 ‘문재인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선언문’에서 자신이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본 훼퍼의 길을 선택했다”며 “본 훼퍼의 심정으로 문재인을 책망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해 많은 이들의 안쓰러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장신대 김철홍 교수는 윤석열을 예수급으로 칭송하고 있으니 전광훈이 본회퍼의 이름 좀 잘못 적었다고 책망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본회퍼 가문들은 그의 신학과 행위들이 이러한 극우적 집단에 의해 이용되어지는 현시국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하고 있다. 본회퍼 형제들의 후손 80여명은 지난해 10월 미국과 유럽에서 활기를 치고 있는 극우 운동에 대한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결코 기독교 국가주의와 같은 극우적, 폭력적 운동과 연계를 맺은 적이 없다. 그는 이러한 운동에 대해 강하게, 소리높여 비난했을 것이다.”

손자인 슐라이허 타페저는 극우주의자들의 언급과 행보는 본회퍼 가문이 배우고 유지해온 저항의 전통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어려서부터 할머니는 가문의 저항정신에 대해 늘 말씀하시고 가르쳐주셨다. 그건 단 두 마디로 정리된다. ‘정직하게 행동하라. 진리를 추구하라’(To be to behave in an honest way. To seek for truth)" (본보 제휴 <미주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