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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시간: (EST) 2022년 9월 25일, 일 9:34 am
[종교/문화] 종교
 
"신앙은 욕망의 허상 너머 아름다움 볼 수 있는 내면의 힘"
[탐독의 시간] <사랑은 느림에 기대어> 저자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

(서울=뉴스앤조이) 김은석 기자 =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의 글은 품이 넓다. 깊이가 있지만 친절하다. 많이 아는 사람이나 적게 아는 사람이나 막힘없이 읽을 수 있다. 담담하지만 온기가 서려 있다. 성찰할 지점을 묵직하게 후비는데, 마음은 따스해진다.

이런 특징은 그의 편지글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코로나19 감염병이 대규모로 확산돼 사람들이 예배당에 모일 수 없게 되었던 2020년 3월부터 매주 '목회 서신'이란 이름으로 교우들에게 편지를 띄웠다. 올해 4월 출간된 <사랑은 느림에 기대어>와 지난해 출간된 <그리움을 품고 산다는 것>(비아토르)은 그 편지들 가운데 각각 마흔네 통과 스물아홉 통을 연 단위로 엮어 펴낸 것이다. 김 목사의 편지는 한 통 한 통이 설교 못지않게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 때로는 묵직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읽는 이의 마음에 다가선다.

편지의 수신인은 청파교회 교우들로 제한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편지 쓰기가 "교우들과 세상을 향한 말 건넴"(14쪽)이었다고 말한다. 편지의 1차 수신인이 만날 수 없게 된 청파교회 교우들인 것은 분명하지만, 병 속에 담아 물에 띄운 편지처럼 어딘가로 흘러가 우연히 읽게 된 사람에게도 조그마한 울림과 위로가 되길 바랐다.

4월 중순 <사랑은 느림에 기대어>가 출간되자마자 미국으로 떠나 집회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김기석 목사를 5월 25일 서울 용산구 청파교회에서 만났다. 주로 <사랑은 느림에 기대어>에 실린 내용을 토대로 편지와 글쓰기, 코로나19와 교회,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 등에 대해 물었다. 그는 장황한 질문에도 정갈한 언어로 편안하게 대답했다.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 은은히 배어 있던 그의 답변을 간추려 정리했다.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는 사회적 거리 두기로 교우들과 만날 수 없게 된 2020년 3월부터 매주 '목회 서신'을 썼다. 그 편지들 가운데 스물아홉 통과 마흔네 통을 연 단위로 엮어 <그리움을 품고 산다는 것>·<사랑은 느림에 기대어>(비아토르)를 펴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언어 속에 담긴 마음이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 매주 '목회 서신'이란 이름으로 편지를 쓰시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편지는 거리가 떨어져 직접 만날 수 없는 대상에게, 보내는 이의 현존과 같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기에 서신서를 쓴 바울 사도에게는 편지 자체가 강단이었던 셈이지요. 담임목사로서 친밀하게 만날 수 없게 된 교인들에게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은근하게 나누는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편지의 특성상 보내는 사람이 있으면 받는 사람이 있잖아요? 교우 일반을 대상으로 쓴 것이었지만 '목회 서신'이라고 하면, 일반적인 내용이더라도 교우들이 담임목사가 나에게 쓴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마음 자세를 품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죠. 그게 편지를 쓴 이유 가운데 하나고요.

병 속에 담아 물 위에 띄워 보내는 편지처럼, 이 편지가 어딘가로 흘러가 누군가에게 우연히라도 읽히고 가슴에 울림이나 도전이나 위로를 줄 수 있다고 하면, 편지를 쓰는 나의 수고는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전에도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편지 형태의 글을 여러 번 쓰기도 했고요."

- 그래서인지 목사님께서 '편지'라는 매체를 좀 특별하게 여기시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특별히 그렇진 않고요. 편지에는 다양한 스타일을 담아낼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예를 들면 소설·시·희곡 같은 글에는 장르의 한계가 있는데, 편지는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자유롭게 아무 이야기나 할 수 있거든요. 때때로 아주 사적인 이야기를 친밀하게 나눌 수도 있고요. 편지 속에 편지를 보내는 사람의 모습을 담을 수 있는 거죠. 언어 속에 담긴 내 마음이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편지를 써 내려간 거죠."

- 답장을 보내온 교우들이 있었나요?

"더러 있었어요. 제가 쓴 내용에 대한 답장은 아니고, 편지를 받고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또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쓴 답장들이 귀하게 저한테 도달했죠."

- 책에 보면 31년 전에 만난 여고생 제자의 사연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설마 31년 전 편지를 지금까지 보관하고 계셨던 건가' 하고 놀랐습니다. 보통 손 편지를 받으면 다 보관하시는지요?

"지금 그 편지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 내용은 거의 암송을 하기 때문에 인용할 수 있었죠. 의미 있는 편지들은 잔뜩 보관하고 있죠. 재밌는 점은 우리 교우가 아닌 분들에게서 편지가 더 많이 와요. 손 글씨로 정성껏 쓴 편지들을 받으면 잘 모아 두죠."

- 남다른 경험인 것 같네요.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 편지를 받는 목회자는 별로 없을 텐데요.

"그렇죠. 제 가방에는 언제든 편지를 쓸 수 있게 늘 엽서가 들어 있어요. 그래서 보통 누가 정성껏 손 편지를 보내오면 저도 가급적 손 편지로 답을 하려고 하지요. 재작년에는 어버이 주일이 되었는데 교우들이 예배당에 올 수 없었잖아요? 그래서 일흔 넘은 분들에게 손 편지를 써서 보내드렸어요. 거의 70장쯤 되었던 것 같아요. 다들 아주 좋아하시더라고요."


김기석 목사는 언제든 편지를 쓸 수 있게 늘 가방에 엽서를 넣고 다닌다고 했다. 지난달 미국을 방문했을 때 사온 거라며 꺼내 보여 준 엽서들. 뉴스앤조이 김은석.

- 이번 책에 쓰인 거의 모든 편지에 다양한 시인·철학자·신학자의 글을 인용하셨더라고요. 편지글 뿐 아니라 목사님 글을 보면 다양한 책을 언급하고 인용도 많이 하시는데요. 그런 인용문들을 보면서 목사님의 독서 세계를 상상해 보게 됩니다. 독서하시면서 인용하고 싶은 내용들을 따로 메모해 두시는 편이신가요?

"아니요. 그 질문을 더러 받는데, 글쓰기라고 하는 게 참 신비해요. '어떤 내용을 어떻게 써야겠다' 하고 시작하지만 쓰다 보면 다른 길로 가게 되곤 하잖아요? 저는 의식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표출될 때는, 글쓰기 자체가 나를 끌고 가는 방향이 생긴다고 봐요. 그렇게 써 내려가다 보면 어떤 지점에 이르러 책에서 읽은 내용이 떠오르거나, 시구절이 떠오르곤 해요. 그러면 그 책을 꺼내 들고 어디쯤에서 읽었는지 찾아보는 거죠. 책을 읽으면서 훗날 책에 인용하려고 메모해 두는 게 아니라, 말하거나 글 쓸 때 딱 떠오르는 것들을 기억에 의존해 찾는 거예요."

- 그러자면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요?

"그래도 재밌잖아요."

"언어는 세상 바라보는 우리 창문, 다양할수록 세상은 다채롭게 다가와"

- 이 질문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아요. 평소 목사님 글을 읽다 보면 생경한 우리말 한두 개는 꼭 접하게 되는데요. 가령 이번 책에서는 "느껍다", "은결들다", "시뜻하다", "신산스럽다", "괴괴하다" 같은 단어들이 생각나네요. 평소 숨어 있는 우리말을 사용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시는지요?

"일부러 쓰는 면도 있어요. 왜냐하면 어떤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언어로밖에 표현될 수 없는 경험의 세계가 있다는 얘기거든요. 그런데 그 언어가 사라지고 나면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미세한 경험의 세계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거든요. 예를 들어 에스키모인들은 눈이 오는 걸 보면서 묘사하는 말이 스무 개가 넘는데요. 그걸 전부 화이트(white)라고만 표현하게 되면 그 차이들이 사라져 버리는 거죠.

우리는 너무 획일화되고 정량화된 언어만 사용하려는 습관이 있는데, 그러면 세상 속에 있는 신비하고 미세한 차이들을 뭉개 버리게 돼요. 그건 굉장히 폭력적인 행위라고 생각해요.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 경험 세계를 미묘하게 느끼며 삶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맛보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실제로 어떤 현상을 바라볼 때 그 현상을 뭐라고 적절히 표현할지 모를 때가 참 많잖아요? 그런데 그걸 누군가가 표현해 놓으면, '아, 그 경험!' 하고 알게 되는 거죠.

언어는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창문이에요. 인식은 언어를 통해서만 일어납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언어의 창문이 다양할수록 세상은 훨씬 더 다채롭게 다가오죠. 그런 의미에서 의도적으로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지 않지만 정말 이 표현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말들을 씁니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사람들이 '이게 무슨 뜻이지?' 하고 사전을 찾아보길 바라는 마음으로요."

- 저 같은 경우에는 실제로 그렇게 사전을 찾아보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단어들은 어떻게 아시게 되나요?

"간단해요. 저는 수첩을 가지고 다니는데,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발견하면 꼭 찾아서 메모해 둬요. 그리고 시간이 좀 나거나 무료할 때 들여다봐요. 한 서른 번쯤 계속 보면 글 쓸 때 떠올라 사용하게 돼요."

- 메모해서 익히시는 습관이 있는 거네요.

"습관이에요. 낯선 단어를 발견하면 기분이 너무 좋아요."


김기석 목사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발견하면 꼭 찾아서 메모해 두어 익힌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 교우들을 만나지 못해 예배당에서 헛헛하고 적막했던 느낌을 곳곳에 표현하신 걸 보고 '코로나19가 목사님 일상에 미친 타격도 적지 않구나' 생각했어요.

"우리는 늘 일상이 당연히 주어지는 거라고 생각해 왔잖아요? 그런데 일상의 소중함은 언제나 일상이 박탈당했을 때 비로소 그 존재를 드러내지요. 옛날 얘기지만, 데모하다가 잡혀서 구치소에 하루 이틀 붙들려 있다 나오면 세상이 새롭게 보여요. 박탈당했던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니까요. 누굴 만나서 얼굴 보며 대화하고 카페에 가서 차 한 잔 마시는 게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었는데, 팬데믹이 이걸 다 박탈했잖아요.

교회에 있다 보면 교인들과 북적거리던 기억이 크게 떠올랐어요. 예배당에 올라가 보면 오래된 교인들이 주로 앉는 자리가 있어요. 그 텅 빈 자리를 옮겨 다니며 그분들 생각을 하는 거예요. 기도하는 마음이죠. 그리움의 시간들이었고요. 우리 교회 예배가 그렇게 뜨겁진 않아도 은근한 역동성이 있어요. 예배하다 보면 눈물 흘리는 분도 많고요. 그런 모습이 잔잔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으니까 '아, 그분들이 그 감격을 박탈당했구나' 하는 안쓰러움도 있었죠."

팬데믹이 빚은 새로운 교회 풍속도 "구심점 약화했지만 원심력 생겨나"

- 이제는 한국교회 전반에서 온라인 예배가 예배의 한 형식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아요. 최소한 '예배냐 아니냐'의 논쟁은 사라졌으니까요. "꽤 많은 이가 온라인 예배의 유용함과 편리함을 이야기합니다. 오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 좋다고도 말합니다. (중략) 그래도 저는 가급적이면 즐겁게 불편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교회에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고, 옷을 갖춰 입고 (중략) 그런 번거로운 과정이야말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비끄러매는 일이 아닐까요?"(188쪽)라고 쓰기도 하셨는데, 온라인 예배와 현장 예배의 조화를 어떻게 이루어 갈 수 있을까요?

"이제 온라인 예배를 안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사람들이 온라인 예배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몸이 아프거나 멀리 출장을 가신 분들이 예배할 방법이 생겼어요. 저도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온라인으로 우리 교회 예배에 계속 참여할 수 있었어요.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예배의 가능성이 온라인 예배를 통해 열린 것은 사실이죠. 우리 교회에 새로 등록한 분들 중에 꽤 먼 지방에 사는 분이 많아요. 부산에 사는 분도 있어요. 왜 등록하려고 하느냐고 물으니까, 거리가 멀어 매주 오지는 못하지만 서울에 올라오게 되면 꼭 같이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해요. 그러면서 청파교회 교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거기서 살고 싶다는 거예요. 거절하기 어렵죠. 그리고 온라인 예배를 실시간 방송으로 송출하다 보면 '안데스 산맥 밑입니다', '홍콩입니다' 이런 댓글들이 올라와요. 온라인 예배가 형성한 새로운 풍속도죠.

하지만 이렇게 온라인 예배가 편리하다고 해서 거기에만 정착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가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혹은 키르케고르 식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 같은 말을 하지만, 신앙의 본질은 공동체 속에서 구현되어야 하죠. 다시 말해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과도 마주쳐야 하고, 나와 다른 사람과도 함께 무언가를 빚어내야 해요. 그러자면 대가를 좀 치러야 하는데요.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버지니아에 머무는데 필라델피아에서 사역하는 이태후 목사가 찾아왔어요. 내가 다른 일정이 있어 1시간 20분밖에 시간을 못 낸다고 했는데도 왔어요. 3시간 거리를 운전해서. 같이 1시간 20분 산책하고 헤어지려는데 아쉽잖아요? '아니, 이렇게 짧게밖에 못 보는데 왜 왔어요?' 하니까, 웃으면서 팬데믹이 준 교훈 때문이래요. '기회가 있을 때 만나라.' 좀 감명 깊었어요. 어찌 보면 6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은데, 그 낭비가 우정을 만드는 거죠.

예배당에 오는 건 시간과 힘을 들이는 일이지만, 그 자체로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에 가급적 오면 좋겠다는 거예요. 시편을 보면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성전에 도달했을 때보다 성전을 향해 올라가며 부른 찬양들이 큰 감동이 있어요. 성전에 함께 오르면서 동행들을 만나게 되고, 그 동행들과 함께 자기 경험을 나누는 일들이 우리를 풍성하게 만드는 거죠. 우리가 현장에 나와 예배할 때 그런 가능성이 더 커지기 때문에 가급적 예배당에 오면 좋겠다고 말하는 겁니다."

- 온라인 예배를 하는 분들과 현장 예배를 하는 분들과의 코이노니아는 어떻게 이루어 갈 수 있을까요?

"여전히 고민이긴 한데, 저는 1년에 한두 차례 정도 '홈 커밍 데이'를 하면 좋겠다 싶어요. 비용을 좀 들여서라도 흩어져 있는 분들과 한 번 모이면 좋겠어요. 우리 교회가 기존에 해 온 야외 예배나 기차 여행 같은 행사에도 참여하도록 요청하고, 그래서 만날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 청파교회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팬데믹 상황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다가 등록하신 분이 아주 많잖아요. 이 현상은 어떻게 해석하시나요?

"팬데믹이 만들어 놓은 재미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교회의 구심력을 약화시킨 거예요. 예전에는 교인들이 개교회에 묶여서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지냈는데, 현장 예배에 가지 못하게 된 후로 다른 교회 설교도 들어보고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그게 다가 아닌 걸 알게 됐죠. 그렇게 다른 소리를 들어보면서 구심력이 약해지고 원심력이 생긴 거예요. 저는 이 현상이 한국교회 신앙의 빛깔을 조금 다채롭게 만들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고 봐요. 그동안 자기 교회에 만족스럽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은데, 20~30년 다니다 보니까 교회 안에서 맺은 인간관계를 포기하기 어려워 못 떠나다가 팬데믹을 계기로 떠날 수 있게 된 부분도 있어요.

우리 교회에 온 새 신자들을 만나 보면서 느끼는 재밌는 점이 또 하나 있어요. 50~60대 분들은 '그동안 오래 다녔던 교회를 떠나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이 교회가 내 마지막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애기하는데, 젊은이들은 안 그래요. 자기는 아직도 저쪽 교회에서 무슨 일을 맡고 있는데 이 교회에도 등록하고 싶다는 거예요. 언제라도 경쾌하게 떠날 수 있는 친구들인 거죠. 팬데믹이 본토 친척 고향 집을 떠날 용기를 내게 해 준 거죠. 이게 어떤 교회 목사님들께는 끔찍한 현상일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도 있겠다 싶어요. 목회자들이 더 자각해서 공부하고 노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김기석 목사는 자신의 편지 쓰기가 "교우들과 세상을 향한 말 건넴"이었다고 말한다. 사진 제공 비아토르

"욕망의 주류 서사 벗어나 '하나님의 꿈'의 일부가 되는 것"

- 코로나19는 욕망의 벌판을 질주하는 사람들에게 제 꼴을 돌아보라는 "일종의 멈춤 신호"(12쪽)라고 하셨고, "팬데믹 상황은 부산하기만 한 우리의 삶을 단순하게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기후 위기 시대가 요구하는 삶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212쪽)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지난 2년 여간 한국 사회에 일어난 큰 변화를 돌아보면, 일상 회복을 향한 열망은 강했으나 멈추고 전환하려는 움직임은 크게 나타나지 않은 듯합니다. 오히려 부동산, 주식, 코인 등을 통한 자산 증식 욕망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면서 사회문제가 된 것 같아요. 멈춤이 강제되던 시기가 일단락되었는데, 우리 교회와 사회에 방향 전환이 좀 이루어졌다고 보시나요?

"그렇지 않죠. 일상 회복이라고 하는 말은 어쨌든 멈춰졌던 것들이 다시 시작된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볼 부분이 있는데, 옛날로 그냥 돌아가 버리면 그건 일상 회복이 아니에요.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에는 '지금처럼 살면 안 돼'가 강력하게 담겨 있어요. 인간은 성찰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팬데믹 상황이 왜 초래됐는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해석할 수 있어야 잖아요. 신학은 해석이거든요, 설명이 아니라. 이제는 새로운 일상을 살아야 하는 거죠.

그동안 기독교 메시지가 성공 담론 혹은 번영신학과 같이, 내 욕망을 충족해 주는 데 신적 도움이 일어나는 것처럼 얘기해 왔어요. 저는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고 확고하게 생각해요. '세상에서 유능해져야 해', '힘이 있어야 해', '힘 있는 사람이 누리는 게 당연해' 이게 주류 서사죠. 그런데 성경은 그 속에서 새로운 물줄기를 만들어 내는 세계, '대항 서사(counter narrative)'를 이야기해요. 주류 서사가 만들어 놓은 디스토피아 속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게 하나님의 꿈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 대항 서사의 일부가 되기로 작정하는 것이어야 해요.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거꾸로 주류 서사 편에 서서 내 능력 부족한 걸 신앙으로 채우기를 바라는 쪽으로 신앙생활을 해 왔죠.

제가 자주 얘기하는 도식이 있어요. 'H=c/d.' H는 해피니스(Happiness), 행복이에요. c는 캐피탈(capital), 돈이죠. d는 디자이어(desire), 욕망이에요. 자본주의는 행복이 커지려면 돈이 많아져야 한다고 하죠. 그런데 돈은 한정돼 있기 때문에 경쟁 논리가 작동할 수밖에 없어요. 경쟁이라는 것은 배타적이지요. 타자가 나에게 지옥을 안겨 줘요. 이 도식 안에서 살아가면 언제나 불안이 내면화됩니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가 만든 이 도식 안에 삶을 집어넣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옛날에 비해 돈이 많아졌어요. 그런데 그만큼 행복하질 않아요. 욕망이 커져서 그래요. 거꾸로 욕망이 줄어들면 행복이 커지지요. 욕망이 줄어들기 위해서는 내적 든든함이 있어야 해요. 내적 든든함은 나에게 주어진 것들이 제법 아름답고 좋다는 걸 알아차릴 때 생겨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를 보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고 하죠? 오래 보고 자세히 본다는 것은 시간을 들이는 거예요. 시간의 향기가 그 속에서 배어드는 거죠. 그럴 때 무언가에 대해 경탄할 수 있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죠. 그때는 욕망이 나를 지배하거나 불안하게 만들지 못해요.

기독교 신앙이란 욕망이 허상임을 알아차리고 그 너머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기르는 것이에요.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죠. '이 정도는 누려야지'라며 욕망을 슬글슬금 키우죠. 거기에 사로잡히면 늘 결핍되어 있고 행복은 영원히 유보될 수밖에 없어요."

- 내적 든든함을 키워 나가려면 고된 훈련이 필요할 것 같은데, 무슨 비법이라도 있을까요?

"사실 세상이 '인간답게 살려면 이 정도는 누려야 해' 하고 얘기하면 다 넘어가죠. 그럴 때 '나 그거 없어도 돼' 얘기하면 욕망의 힘이 빠져요. 나를 사로잡거나 장악하지 못해요. 자본주의라는 게 빚을 권장하죠. 신용카드라는 게 그런 거잖아요. 빚을 져서 소비할 때는 행복해요. 그다음부터는 갚기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죠. 행복하기 위해 자기 착취의 길로 접어드는 거예요. 예를 들어 '내가 40대 남성인데 중형 세단 정도는 타 줘야지' 생각하며 그 굴레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 그걸 누릴 수 없을 때 불행하다고 느끼게 돼요. 누리는 사람을 보면 선망의 마음이 생기거나 적대감이 생기고요. 그런데 그냥 '난 걷는 게 더 좋아' 이러고 나면 그 욕망이 날 사로잡지 못해요. 그냥 그렇게 사는 거예요. 세상 문화는 우리를 소비에 익숙하게 만들어 가요. 거기에서 탈주하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혼자서는 어려워요.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죠."

- 교회가 삶의 전환을 위해 공동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많이 만들어 내면 좋을 텐데요. 청파교회 안에서는 그런 시도들이 있나요?

"우리 교회 환경부에 속한 사람들 같은 경우에 자기 삶을 바꿔 나가기 위해 서로 자극을 주고 함께 실천하기도 하죠. 그러면서 제법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우리 교우들 가운데는 '청파교회 와서 망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긍정적 변화라고 생각해요. 환경부원들 사이에서 '우리가 이렇게 한가롭게 직장 생활이나 할 때가 아니다'라고 농담처럼 하는 얘기가 있어요. '인생에 소중한 것이 너무 많은데 직장에만 몰두해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거죠. 그래서 정말 하던 일을 내려놓은 사람도 있고요."

- 청파교회는 오랫동안 몽골 '은총의 숲' 사업을 지원해 오기도 했는데요. 기후 위기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교회가 응답해야 할 시대적 요청으로 강조되고 있지만, 아직 커다란 역동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까요?

"저는 간단하게 말해 창조주 하나님을 진실로 믿으면 된다고 봐요.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고백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우연히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뜻을 따라 그분의 숨결 가운데 존재한다는 믿음이 담겨 있거든요. 그러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한다면서 진화론자들과 싸우고 성내는 사람들 보면 제대로 안 믿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땅을 닦달하고 오염시키면서 자기 욕망대로 살죠.

창조 세계는 우리가 함부로 다뤄도 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발견해야 할 대상이에요. 조심스럽게 사뭇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태도를 내면화해야 해요. 그럴 때 나오는 태도가 '겸손'이에요. '겸손하지 않은 기독교인'이라는 말은 사실 형용모순이죠. 창조주 하나님을 정말로 믿게 될 때 우리 속에 생겨나는 감각은 '경탄'이에요. 거꾸로 얘기하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서 빼앗아가는 가장 중요한 능력이 경탄의 능력이에요. 아이가 꽃 앞에 앉아 있는 걸 보면 '영어 단어나 외울 것이지 쓸데없이 왜 그러고 있느냐'고 나무라잖아요. 경탄의 능력이 있으면 아무것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어요. 사람을 대하는 방식, 역사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거죠. 교회가 기후 문제를 논의하고 운동을 한다고 할 때, 이런 내적인 변화를 함께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저 행사를 치르는 데서 그치게 되죠."

"중요한 것은 '성취' 아닌 '진실함', 팔복의 증표가 되는 삶 살았으면"

- 조금 다른 얘기인데요. 목회를 40년 넘게 해 오시면서 교회를 좀 더 성장시켜야겠다거나 더 탁월한 목회자가 되어야 겠다는 조바심에 사로잡힌 적은 없으셨어요?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그건 정말 맹세할 수 있어요. 원래 게을러서인지 그런 욕망은 한 번도 없었어요.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진실한가였지, 내가 얼마나 성취했는가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 갑자기 예전에 어느 자리에서 목회자들에게 매일 책을 200쪽씩 읽으라고 하셨던 게 떠오르는데요. 탁월성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일까요?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왜냐하면 목회자로 부름받았다는 것은 발언권을 갖고 있다는 얘기고, 강대상에 선다는 것은 선포 행위이기 때문에 굉장한 권력이거든요. 사람들을 오도할 위험이 있는 거죠. 선포하는 자가 무지하다든지 자기 욕망을 가지고 그릇된 걸 가르친다면 그것은 지옥에 떨어질 죄거든요. 그러니까 언제나 조심스러워야 하고,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해요. 늘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죠. 그래야 열린 입장에서 배울 수 있어요.

우리 교우들에게도 너무 자기 확신에 찬 설교자들을 믿지 말라고 얘기해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 틀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거나 소설을 읽는 까닭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세계를 낯선 상황 속에 놓아 보기 위해서예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정답이 해체되는 경험을 하는 거죠. 그런데 설교자들은 신학에 정답이 있다는 생각이 강해서 자꾸 사람들에게 답을 제시하려고 해요. 저는 정답을 제시하기는 어렵다고 봐요. 답은 모호한 거죠. 그 모호함을 견디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신앙이지요. 우리 신앙이 '지향'할 큰 줄기는 있지만 그 줄기로 나아가는 미세한 결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거죠."


김기석 목사의 목회 서신을 엮은 <사랑은 느림에 기대어> 와 <그리움을 품고 산다는 것>. 뉴스앤조이 여운송

- "오순절기를 지나면서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화해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사람들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고, 도무지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만나 사랑의 친교를 나누게 해야 합니다. 나와 성향이 다르고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과도 마음을 열고 접촉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159쪽)라는 대목에 밑줄 그은 생각이 나네요. 그런데 우리가 소셜미디어로 조금만 눈을 돌리면, 정치적 입장에 따른 갈라 치기와 누군가에 대한 조리돌림이 횡행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데요.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저는 그런 문화가 정신적 나태함의 발현이라고 봐요. 정신적으로 나태한 사람은 불확실함을 못 견디거든요. 그래서 세상을 흑백으로 보거나 이분법적으로 보는 거예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며 우리와 그들로 나누잖아요. 그리고 그들에게 혐오와 수치를 안겨 줌으로써 내가 정당하고 의롭다는 생각을 강화해요. 인간의 나쁜 버릇이죠. '나는 저들과 달라' 하며 담을 한 층 쌓아 놓고 다시 저쪽을 바라보면 불편하거든요. 그래서 점점 담을 쌓아올리고, 결국 아예 안 보이게 되죠. 그다음부터 저쪽에서 뭐라고 하면 이제 상상을 하기 시작해요. 안 보이니까요. '우리를 해치기 위해 땅굴을 팔지 몰라', '우리 쪽으로 뭔가를 투척할지도 몰라' 하면서 점점 더 저쪽이 싫어지는 거예요.

어쩌면 지금 진보 진영도 반대편을 향해 이러고 있는지 몰라요. 에베소서를 보면 예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담을 당신의 몸으로 허무시고 둘이 만나게 하셨다고 얘기해요. 만날 수 없던 사람들이 담을 허물고 만나야 해요.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상종도 못 할 사람 취급하면 안 되는 거예요. 차이 나는 부분은 묶어 두고 나머지 부분 가지고 만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제법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면, 그때 비로소 '그래도 이런 건 좀 문제 아닌가요?' 얘기하면 서로 소통이 가능해질 수 있어요. 계속 부딪히기만 해서는 아무런 것도 해결할 수 없어요. 늘 성난 표정만 지어서는 세상 안 바뀝니다. 싸우면서도 여백이 좀 있어야 하고, 어떤 때는 껄껄 웃기도 해야죠."

- "많은 이들이 인생을 풀어야 할 과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살아 내야 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지향이 분명하다면 명백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해도 낙심할 것 없습니다. (중략) 성실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209쪽)라는 대목도 마음에 남았는데요. 저 대목 말고도 '지향'이라는 단어를 곳곳에서 강조하셨어요. 일상 속에서 우리가 삶과 신앙의 지향을 어떻게 점검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인생을 '미로'라고 말하곤 하죠. 이게 길이라고 생각해 가다 보면 막혀서 돌아 나오게 되고, 중심에 가까이 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게 되기도 하죠. 중심에 가까이 갔을 때나 밖으로 밀려났을 때나, 내가 어디를 향해 가는 사람인지 늘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요즘 제가 좋아하는 말인데, 우리가 '팔복의 증표'로 한번 살아 보면 좋겠어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했을 때, 심령이 가난하다는 게 말로는 알겠는데 실체가 뭔지 잘 모르겠잖아요? 그럴 때 딱 떠오르는 사람, '아, 심령이 가난한 게 저런 거구나' 느껴지는 삶,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했을 때 떠오르는 사람이 팔복의 증표일 수 있겠죠? 하나님이라는 영원한 중심에 잇대기 위한 중간 목표가 그런 것일 수 있겠다 싶어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말이 있죠? 결국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대충 사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선율을 노래하는 자로 부름받았잖아요? 때로는 조율이 안 되어 있을 때도 있는데, 그러면 그대로 사는 게 아니라 '아이고, 조율이 잘 안 됐네' 하면서 너무 꽉 조였으면 좀 풀고, 너무 느슨하면 조이면서 사는 거예요." (본보 제휴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2년 6월 07일, 화 6:24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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