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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스페셜리포트
 
트럼프보다 황당... 미국을 혼란에 빠지게 한 보수 지도자
[스페셜 리포트] 미국 보수의 새로운 컨트롤타워


▲ 영화 <자이언트> 포스터 ⓒ 자이언트

(서울=오마이뉴스) 임상훈 기자 = 제임스 딘의 유작 영화 <자이언트>는 1920년대 미국 텍사스의 광활한 대지를 배경으로 한다. 서부개척시대의 끝물에 해당하는 시기라 흔히 생각하는 완전 '무법천지' 모습은 아니다. 영화 속 카우보이 복장의 터프 가이 제임스 딘도 존 웨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현란한 권총 솜씨를 뽐내지는 않는다.

'총질 없는' 서부영화 <자이언트>는 치안 부재 속에서 벌이는 대담하고 무모한 '사나이'들의 활극이 아니다. 새로운 경제, 사회, 문화 패러다임이 해일처럼 밀려와도 전통이라는 땅에서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는 개척 마지막 세대의 삶을 그린 영화다.


유입되는 새 물결이 구체제에 흡수되다 이내 주축세력으로 자리 잡는 것, 텍사스 역사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것이 사람의 물결일 때도 있었고, 산업 구조의 지각 변동일 때도 있었다. 때로는 그 두 가지가 함께 오기도 했다. 때문에 텍사스 인들은 변화에 익숙하다. 동시에 변화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다. <자이언트>의 빅 베네딕트(록 허드슨 분)처럼.

텍사스는 앞서 프랑스, 스페인에 이어 멕시코의 땅이었다. 황무지에 가까운 이곳에 19세기 초 많은 미국인들이 빠른 속도로 이주하면서 그들의 인구수가 곧 멕시코 인을 추월하게 된다. 이에 멕시코 정부는 더 이상의 미국인 유입을 제한하지만 이미 기운 대세는 어쩔 수 없었다. 1836년 텍사스는 멕시코로부터 독립하고 10년 후 미국의 28번째 주로 편입하게 된다.

주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열강들과의 갈등, 협상 과정을 통해 동부, 중부지역 영토를 확장하던 미국은 텍사스 병합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태평양 시대를 열게 된다. 이듬해 워싱턴, 오리건 지역을 병합했고 2년 후 캘리포니아, 네바다, 애리조나 지역까지 멕시코로부터 할양 받아 지금 영토의 윤곽을 완성하게 된다.

공화당의 맏형 텍사스

미국 서부 개척사의 상징 텍사스 주(state)는 현재 알래스카에 이어 두 번째, 본토에서는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인구와 경제 규모도 캘리포니아에 이어 두 번째로, 캐나다 전체 경제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다(한국은 3위 뉴욕 주와 비슷한 수준).

미국 인구-경제의 투톱 캘리포니아와 텍사스가 흔히 비교되곤 하는데 공교롭게 캘리포니아는 민주당, 텍사스는 공화당의 아성 지역이다. 과거에는 반대의 양상을 보인 적도 있었으나 최근 30여년 이래 이러한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캘리포니아는 1992년 대선부터 줄곧 8명의 민주당 후보만 선택해왔다. 텍사스에서는 1972년 이래 13번의 대선을 모두 공화당이 가져갔다.

공화당의 맏형격인 텍사스는 그래서 보수 정치의 주요 의제를 이끄는 역할을 자주 해왔다. 최근의 '심장박동법(Texas Heartbeat Act)'이 대표적이다. 1973년 이래 미국의 모든 여성은 임신 6개월 이전까지 임신중절을 선택할 헌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산모의 치명적 위기가 아니면 모든 낙태를 금지하던 그 이전의 법에 대해 당시 연방대법원이 위헌 판정을 내린 것이다.('로 대 웨이드' 판결 Roe v. Wade, 410 U.S. 113)

외교, 경제 분야에서 뚜렷한 차이가 없는 미국의 주류 진보-보수는 사형제도, 총기 소지, 의료 복지 등 사회 정책 분야에서 분명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낙태도 그 중의 하나로 이 역사적 판결 이후 공화당이 집권하는 주(state) 정부들은 이 법을 뒤집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왔다. 그러다 올해 텍사스 정부가 찾아낸 방법이 '심장박동법'이다.


▲ 일부 시민들이 텍사스 오스틴의 텍사스 주 의사당 밖에서 텍사스 주의 '심장박동법'에 찬성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2021.5.29 ⓒ 연합뉴스

심장박동법이라는 꼼수

1973년 연방대법원 판결의 핵심은 공권력이 여성의 임신중절 결정권을 막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이렇게 되면서 각 주 정부들은 여성의 낙태에 대해 처벌을 내릴 수 없게 된 것. 이번에 텍사스 주정부가 낙태를 금지시키기 위해 찾아낸 우회로는 낙태를 막는 사실상의 주체를 정부 공권력이 아닌 민간에게 넘기는 방법이다.

예들 들어보자. 임신을 한 여성 '갑'이 중절을 원해 의사 '을'을 찾았다. 이때 그 임신의 동반자 남성 '병'이 병원에 함께 갔다. 그리고 차가 없는 이들을 위해 여성의 아버지 '정'이 자신의 차로 이들을 병원에 데려다 줬다. 여성의 어머니 '무'가 데려다 주고 싶었지만 급한 일이 있어 아버지가 대신 동행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얼마든지 가정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다. 그리고 낙태의 자유가 있는 지금까지의 모든 미국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상황이 미국 텍사스에서 벌어진다면 임신 여성 '갑'을 제외한 '을', '병', '정'은 모두 민사 소송에 따라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게 된다. 심지어 병원에 가지 않은 어머니 '무'마저 피고소될 수 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리고 왜 임신 여성 '갑'은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일까? 임신 여성이 처벌을 받지 않는 이유는 연방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 때문이다. 임신중절을 행한 여성을 처벌할 수 없게 한 그 판결. 그래서 올해 5월 텍사스 의회를 통과한 '심장박동법'은 임신 여성 본인이 아니라 임신 여성이 낙태를 할 수 있게 조력한 모든 사람들에 대해 고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관련법 171.208.a).

낙태술을 행한 의사(관련법 171.208.a 1)는 물론이고 그 행위를 도와준 사람(관련법 171.208.a 2), 그리고 실제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낙태 행위를 도우려 의도했던 사람(관련법 171.208.a 3)까지 모두 피고소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따르면 낙태 행위에 대해 공권력이 개입할 수 없기 때문에 텍사스 주 정부가 직접 나설 수는 없다. 그래서 대신 낙태 행위 또는 그 기도를 알고 있는 어느 누구나 시민이라면 고소를 할 수 있도록 하게 한 것이다.(관련법 171.207.a) 신종 산(産)파라치를 양성하겠다는 것.

신고를 한 시민에게는 승소할 경우 무려 1만 달러(약 1186만원)를 제공하도록 했다. 만약 패소하더라도 그에 따른 변호사 비용은 일체 부담하지 않고 그 모든 비용은 주 정부에서 부담한다.(관련법 171.208.b) 이 법은 한 명의 낙태 방조 또는 조력자에 대해 다수의 시민이 민사소송을 걸 수 있다는 점과 다만 그 경우 모든 제소자에게 1만 달러의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섬세하고 친절한(?) 조항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경우는 임신 후 6주부터 적용이 된다. 모든 태아는 6주부터 심장 박동이 시작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이 법의 이름도 '심장박동법(Texas Heartbeat Act)'이다. (정식 이름은 '태아의 심장박동 감지 후 낙태를 포함한 낙태에 관한 개인 민사 소송 권리를 승인하는 법률(Act relating to abortion, including abortions after detection of an unborn child's heartbeat; authorizing a private civil right of action)


▲ 마스크 착용 의무화를 반대해온 미국 텍사스주의 그레그 애벗 주지사(공화당) ⓒ 연합뉴스

보수의 새로운 컨트롤타워

그런데 보통 임신 6주는 여성이 잉태 사실을 알지 못할 수도 있는 시기다. 따라서 이 법은 사실상 모든 낙태에 대해 금지를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임신의 동기가 강간이나 근친상간 등 윤리적으로 비합리한 경우라도 예외가 인정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는 이 법률이 강간범을 근절하게 될 것이라는 '사차원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요컨대 낙태에 대한 법적 책임을 여성에게 직접 묻지 않으면서 더 잔인한 방식으로 몇 배의 도의적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시키고 있는 것이 텍사스 낙태법이다. 공산체제를 극도로 싫어한다는 보수 정권에서 공산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주민 감시제를 통해 연방 헌법을 유린하고 있는 것 또한 아이러니다.

시민단체들의 '심장박동법'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도 연방대법원에서 기각된 상태다. 기발함만큼은 인정해도 될 이 텍사스 법에 대한 가처분 신청을 기각한 이유로 연방대법원은 "복잡하고 유례없는 절차 문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합헌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 것은 사실이라고 답했다. 앞으로 치열한 법적 다툼이 예고되는 이유다.

바이든 연방정부는 텍사스 낙태법에 대해 헌법에 명시된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라며 긴 소송전을 예고했다. 반면 공화당이 집권하고 있는 다수의 주에서는 새로운 낙태 금지 우회로를 찾았다는 환호가 쏟아지고 있다. 이렇게 텍사스는 내년 중간 선거를 앞두고 보수의 새로운 컨트롤타워가 되어가고 있다.

바이든 정부의 출범 이후 특히 중간 선거를 앞둔 텍사스 주지사 그레그 애벗의 튀는 행동은 그것뿐이 아니다. 최근 그는 코로나19 백신 의무 접종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접종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다. 지난 8월에는 델타 변이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할 수 없도록 행정명령을 내렸다.

애벗 주지사의 코로나19 관련 대응은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 등 다수의 다른 극우 인사들과 유사하다. 사회 안전보다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한다. 마스크 착용, 백신 의무화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애벗 주지사 본인이 트럼프 전 대통령, 보우소나루 대통령처럼 코로나19에 감염되기도 했다.

지난 겨울 기록적 한파와 폭설로 텍사스 주 상당 지역이 전기와 수도가 끊기며 많은 인명 피해를 겪었지만 애벗 주지사의 대응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위기 속에서 존재감이 보이지 않는 그의 행정을 두고 차기 선거에 위험하다는 분석이 나왔지만 정작 현지에서는 다른 예상도 나온다. 텍사스의 정치 지형상 웬만한 행정 미숙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 텍사스에서 공화당의 깃발은 한파도 뚫을 정도로 힘차게 휘날린다.


▲ 8월 16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의 주지사 집무실 앞에서 학부모와 학생들이 그레그 애벗 주지사가 학교 내 마스크 착용 의무화 금지 행정 명령을 철회할 것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텍사스주 대법원이 애벗 주지사의 행정 명령은 유효하다면서 일부 지방자치단체와 교육구가 자체 시행 중인 마스크 의무화 조치를 중단시킨 가운데 일부 하위 지자체들은 대법원의 결정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 연합뉴스

텍사스가 미국의 미래?

이렇게 계속되는 불안한 행정에도 불구하고 최근 국내의 한 언론은 텍사스 주를 미국의 미래라며 추켜세웠다. 외신의 한 칼럼을 인용해 진보적 캘리포니아 인구가 줄고 보수의 심장 텍사스의 인구가 점점 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 언론은 그런 텍사스가 부럽다는 사설도 냈다. 실제 캘리포니아의 인구는 최근 들어 점점 줄고 있으며 반대로 텍사스의 인구는 점점 늘고 있다.

하지만 보수의 확장성이라며 좋아하기는 이르다. 캘리포니아의 이주민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이 텍사스로 이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다수는 텍사스의 도시지역으로 이동하는 젊은 청년층이다. 벌써부터 현지에서는 캘리포니아에 넘치는 진보 성향의 유권자들이 보수의 아성 텍사스로 옮겨가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당장 이들이 텍사스의 정치 지형을 바꿀 규모는 아니다. 하지만 텍사스의 보수-진보 간 지지율 격차가 점차 줄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차기 또는 차차기 선거에서는 텍사스 주가 스윙 스테이트(일방적 지지 정당 없이 자주 표심이 변하는 주)로 변할 것이라는 현지의 전망이 나오고 있다. 만약 공화당이 텍사스를 잃는다면 선거, 특히 대선에서는 치명적이다.

과거 멕시코인이 다수였던 텍사스에 점점 몰려드는 미국인들은 얼마 후 그곳을 미국 영토로 바꿔버렸다. 영화 <자이언트>에서 목장을 중심으로 하는 축산 농업 성지였던 텍사스는 석유의 발견 이후 초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점차 유전사업의 중심지로 변해갔다. 오늘날 세계 유가를 결정하는 주요 석유 생산지 가운데 하나가 텍사스다.

하나의 패러다임을 뒤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는 것, 텍사스는 오래 전부터 이런 변화에 익숙한 곳이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1년 10월 22일, 금 2:4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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