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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대학으로 간 아버지, 남한에 남은 가족의 선택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김일성대학 초대 도서관장 김수경 ①


(서울=오마이뉴스) 백창민-이혜숙 기자 = 분단 이후 남북한 도서관에서 일한 수많은 '도서관인'이 있다. 남한뿐 아니라 북한에도 많은 도서관이 있고, 북녘 도서관에서 일한 사람 역시 적지 않다. 많은 인재가 남과 북의 도서관에서 일했다. 그 중 가장 뛰어난 석학(碩學)은 누구일까?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유력한 사람은 '천재 언어학자' 김수경(金壽卿)이다.

김수경은 1918년 5월 1일 강원도 통천군 통천면 서리 13번지에서 태어났다. 통천은 함경남도 안변군의 남쪽, 강원도 고성군 북쪽에 위치한 땅이다. 그의 아버지 김선득(金瑄得)은 평안북도 신의주(新義州)에서 판사로 일하다 사직하고, 전라북도 군산(群山)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1925년 8월 7일 김수경의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군산으로 이주했다.

1930년 김수경은 군산제일보통학교(지금의 군산중앙초등학교)에 이어, 1934년 군산중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군산중학교는 일본 학생을 위한 학교였고, 전라북도에서 유일한 중학교였다. 김수경이 다닐 무렵, 군산중학교 전체 학생 중 조선인은 10% 내외였다.

경성제대를 거쳐 도쿄제대로

▲ 군산중학교 시절 1933년 3월 4일 촬영한 군산중학교 송별 기념사진이다. 당시 군산중학교는 전북에서 하나뿐인 중학교였다. 제일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수경이다. 군산중학교 졸업 후 김수경은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했다. ⓒ 김혜영

5년제 중학교 과정을 4년 만에 졸업한 김수경은, 1934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예과를 거쳐 1937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한 그는, 언어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경성제대 시절 김수경에게 언어학을 가르친 스승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다.

당시 고뱌야시 히데오는, 저명한 언어학자로 주목받고 있었다. 훗날 고바야시는 경성제대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로 김수경을 꼽았다. 고바야시는 김수경과 인연을 <敎え子>(오시에고, 제자)라는 수필로 쓰기도 했다.

1940년 3월 31일 경성제대를 졸업한 김수경은, 그해 4월 30일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대학원 언어학 강좌에 진학했다. 도쿄제대에서 김수경은 비교언어학 관점에서 조선어를 연구했다. 지도교수는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였다. 오구라 신페이는 1926년 문을 연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의 초대 관장을 지낸 사람이다.

일본 유학 중이었던 김수경은 윤동주와 송몽규 사례처럼, 창씨개명을 피할 수 없었던 걸로 보인다. 1943년 3월 1일 김수경은 도쿄제대 문학부에 야마카와 데스(山川哲)라는 이름을 새롭게 기재했다. 김수경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군산의 '산'(山)과 통천의 '천'(川)을 따서 성으로 삼고, 철학을 전공했다는 의미로 이름을 '철'(哲)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김수경은 군산이 배출한 가장 뛰어난 '석학'이자 '도서관인'일 것이다.

1943년 3월 17일 김수경은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한 이남재(李南載)와 경성 부민관에서 결혼했다. 같은 해 여름 경성으로 돌아온 김수경은, 혜화정 74번지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1944년 그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학 연구실 촉탁이 되었다.

해방이 되자 김수경은 경성대학 자치위원회 법문학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해 12월에는 경성경제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1922년 경성고등상업학교로 출발한 경성경제전문학교는, 국립 서울대학교가 출범하면서 서울대 상과대학으로 편입된다. 이즈음 그는 진단학회 재건에도 관여했다.

김석형, 박시형과 함께한 '북행길'

▲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 시절 뒷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김수경이다. 김수경은 국립도서관 초대 관장 이재욱과 몇 가지 접점을 가지고 있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선후배 관계이고, 이재욱 관장과 절친한 이희승과 도쿄제대에서 함께 공부했다. 해방 후 김수경은 진단학회 재건에 관여했다. 이재욱은 진단학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바 있다. ⓒ 김혜영

1946년 5월 6일 김수경은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학구적으로 보이는 김수경은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을까? 경성제대 법문학부 시절 김수경은, 도서관에서 러시아 신문을 탐독했다. "(부속)도서관에 비치된 소련 신문 <이스베스티야>(Izvestiya)와 <프라우다>(Pravda) 지는 김수경(金壽卿 철학과 12기생)의 독차지나 마찬가지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와 절친했던 경성제대 동문 김석형(金錫亨), 박시형(朴時亨), 신구현(申龜鉉)이 모두 월북한 점을 고려할 때, 학창 시절부터 김수경은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45년 일본 패전 이전에 '김수경은 이미 공산당원이었다'라는 소문이 있었다.

1946년 5월 10일 김수경은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의 <조선서지>(朝鮮書誌) 서론 부분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조선문화사서설>(朝鮮文化史序說)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 책의 번역 작업을 김수경에게 권한 사람 중 하나가, 전 카프(KAPF) 서기장 임화(林和)다.

김수경이 1946년 북으로 향하면서, 우리는 그의 저작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조선문화사서설> 외에 <세 나라 시기 언어 력사에 관한 남조선 학계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평양출판사 1989년)이 <고구려.백제.신라 언어 연구>(한국문화사)라는 제목으로 영인 출간되었을 뿐이다.

1946년 8월 23일 미군정은 경성대학을 비롯한 10여 개 관립학교를 하나로 합쳐, 국립 서울대학교를 출범하는 안을 발표했다. 미군정이 서울대 설립을 추진하자, 1946년 9월부터 '국립 서울대학교 안 반대 투쟁'이 일어났다. 이즈음인 1946년 8월 17일, 김수경은 등산모와 반바지 차림으로 삼팔선을 넘었다. 훗날 북한을 대표하는 역사학자가 되는 김석형, 박시형과 함께 떠난 '북행길'이었다.

1946년 5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종합대학 창설준비위원회를 만들고, 대학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해방 직후 경성대학(옛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주요 고등 교육기관은 서울에 자리했다. 이 때문에 북조선종합대학(지금의 김일성종합대학)은 교원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북조선종합대학 창설준비위원회는 남조선 대학교수를 대상으로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교수 인력 확보에 대대적으로 나섰다.

교수 위촉장을 받고 평양으로 간 김수경은, 8월 20일부터 김일성종합대학(김대) 문학부 교원이 되었다. 1946년 김수경과 함께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발령받은 사람은 도상록, 김지정, 박극채, 전평수, 이재곤, 김한주, 황영식, 유연락, 우형주, 곽대홍, 계응상, 한필하, 홍성해, 최용달, 조영식, 강대창, 도유호, 김종희, 최응석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제국대학 출신으로, 서울대 전신인 경성대학 교수였다.

14개 언어를 익힌 '언어의 천재'

▲ 1942년 도쿄제국대학 도서관 앞에서 이희승과 함께 도쿄제국대학 유학 시절 김수경은 정해진, 이희승, 김계숙과 교류했다. 이희승의 회고에 따르면, 조선인 유학생은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도쿄제대에서 김수경과 함께 공부한 김계숙(金桂淑)은, 훗날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1962~1968년)을 지낸다. 사진 왼쪽이 김수경이다. ⓒ 김혜영

1946년 10월 1일 개교한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총장은 김두봉이다. 1949년 9월 시점에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에는 조선어학과, 조선문학과, 신문학과 3개 학과가 있었다. 김수경은 조선어학과 창립 멤버로 '강좌장' 자리에 올랐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강좌장'은 부장급으로 월 급여가 2500원이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장이던 김일성의 급여가 4천 원이던 시절이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이 김수경 같은 뛰어난 인재를 교수로 모시기 위해, 얼마나 파격적인 대우를 했는지 알 수 있다.

1949년 11월 김수경은 북한에서 처음으로 '부교수' 자리에 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하나였다. 북한 학계에서 그가 얼마나 촉망받았는지 알 수 있다. 1947년 김수경이 발표한 <용비어천가 삽입자음고>(龍飛御天歌 揷入子音攷)는 '지금도 이 논문을 뛰어넘는 연구가 없다'라는 평가가 남한 국어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북한은 '노동'(勞動)을 '로동'으로 표기한다. 두음법칙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음법칙 폐기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김수경이다. 1947년 6월 그가 <로동신문>에 기고한 논문은, 두음법칙 폐지에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해방 이후 북한은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한자를 배제하고 한글을 전용으로 쓰는 문자개혁 과정을 거쳤다. 김두봉과 함께 김수경은 북한의 문자개혁을 이끌었다. 조선어문연구회를 이끌면서, 1949년 발간한 <조선어 문법> 편찬을 주도한 사람도 김수경이다.

김수경은 언어학자답게, 여러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한 걸로 알려져 있다. 1945년 해방 무렵까지 김수경이 익힌 언어는 14개(그리스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조선어, 일본어, 중국어, 몽골어)에 이른다. 이 중 7개 언어는 '직독직해직강'(直讀直解直講)이 가능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언어의 천재'였다.

경성제대 시절 김수경의 스승이었던 고바야시 히데오도 "그의 끝을 모르는 어학 실력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라는 회고를 남긴 바 있다. 언어에 대한 자질도 뛰어났지만, 김수경은 누구보다 언어 습득에 노력했다. 신혼 시절 아내 이남재가 이발을 해줄 때도 김수경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남북으로 나뉜 가족

▲ 경주로 신혼여행을 떠난 김수경 이남재 부부 김수경과 이남재는 1942년 친구 결혼식에서 들러리로 만났다. 이남재는 이화여대 도서관장으로 30년 재직한 이봉순과 이화여전 문과 동기동창이다. 1943년 결혼한 김수경과 이남재는,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생활은 소박하게 생각은 고상하게”(Plain Living and High Thinking)라는 문구를 생활신조로 삼았다고 한다. ⓒ 김혜영

​한국전쟁 때 미군이 노획해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관 중인 <김일성대학 교원 서류철>에는, 김수경의 자필 이력서와 그에 대한 조사서(평정서)가 담겨 있다. 조사서는 김수경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어학 방면에 가장 우수한 자질이 있고, 선진 각국어에 능통. 언어학 분야에 독보적 존재​."

마르(Nikolai Yakovlevich Marr)와 스탈린(Joseph Stalin)의 논문을 비롯한 소련 언어학의 최신 동향을 북한에 적극적으로 소개한 것도 김수경이다. 1954년에 그는 초급중학교용 <조선어 문법> 교과서를 썼다. 이 교과서는 1954년 11월에 1-2학년용만 24만 5천 부를 발행했다. 그가 쓴 이 책은 북한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조선인 사회에서 널리 읽혔다.

1955년 옌벤교육출판사(延邊敎育出版社)는 김수경의 <조선어 문법> 두 권을 합본해서 출간했다. 김수경의 책은 옌벤에서 만 권 단위로 발행했고, 옌벤 조선족의 교과서로 쓰였다. 일본 도쿄에 있는 조총련계 출판사 학우서방(學友書房) 역시 김수경의 <조선어 문법>을 영인해서 출판했다.

1961년과 1962년에 3권으로 출간한 <현대 조선어>는 북한 대학에서 교과서로 쓰였고, 북한 국어학의 기초가 되었다. 북한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까지, 모국어로 조선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김수경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언어학자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4년 그가 쓴 <조선어 문체론>은 북한 최초로 '문체론'을 체계화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은 인민군에 입대했다. 교수와 직원도 전쟁에 동원되기 시작했다. 김수경도 인민군 진격과 함께, 남한 점령지에 선무공작대로 파견됐다. 전남 광주를 거쳐 화순·진도에서 활동하던 그는, 유엔군의 반격이 있자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평양에 있던 김수경의 가족은 그를 찾아 월남했다. 인민군과 후퇴하던 김수경은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북으로 돌아갔다. '이산가족'이 된 김수경 가족의 '긴 이별'은 이렇게 시작됐다. 전쟁 과정에서 김수경은 가족뿐 아니라 아버지도 잃었다. 그의 아버지 김선득은 1950년 9월 25일 인민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북한 언어 분야에 그가 남긴 영향

▲ 1942년 무렵 김수경 그는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도쿄제국대학 대학원에서 유학했다. 도쿄 유학 시절인 1942년 촬영한 사진이다. 원광대 최경봉 교수는 14개 언어를 구사한 천재 언어학자 김수경을 국어학 분야 "최초의 구조주의자"로 평가했다.
ⓒ 김혜영

195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이 설립되자, 김수경은 연구사를 겸임했다. 북한 최고 두뇌를 모았다는 과학원 초대 원장은 홍명희가, 2대 원장은 백남운이 맡았다. 과학원은 사회과학 분야에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를 설치했고, 김수경은 연구실장을 맡았다.

한국전쟁 기간 중에 평안도를 떠돌던 김일성종합대학은 1953년 9월 평양으로 돌아왔다. 김수경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다시 교편을 잡으며 연구에 매진했다. 한국전쟁 이후 김수경은 ​북한의 철자법 제정과 문자개혁을 주도하고, 이 과정에서 '표음주의'가 아닌 '형태주의' 원칙을 강조했다.

1955년 김수경은 북한의 문자개혁을 조사하러 방북한 중국 문화대표단과 교류했다. 1956년 그는 중국과학원 초청을 받아, 홀로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북한뿐 아니라 중국 언어학계에까지 떨친 김수경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 김수경은, 경성제국대학 시절 스승 고바야시 히데오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고바야시는, 한국의 제자 이숭녕(李崇寧)에게 김수경의 소식을 전했다.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에 살던 김수경 가족은, 이숭녕을 통해 아버지와 남편의 생존 소식을 확인했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월북'한 아버지의 존재는 가족에게 부담이었다. 정보기관에서 나온 사람이 김수경의 생사와 행방을 계속 캐묻자, 가족은 결국 그를 '사망'으로 처리했다. 김수경의 생존 소식이 가족에게 전해진 건, 그 이후인 1959년 무렵이다. 1970년대 김수경의 가족은 캐나다로 이주했다. 가족의 캐나다 이민 결정에는, 북한에 있는 김수경의 존재가 영향을 미쳤다.

- 북으로 간 천재 언어학자 김수경, 왜 이곳을 택했나로 이어집니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1년 9월 20일, 월 6:44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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