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들의 맹목적 애국주의속에 깃든 악을 비판하신 예수님

인간과 역사, 그리고 개인과 구조를 함께 삐뚤어지게 하면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앞날에는 불길한 어두움을 안겨다 주는 것, 바로 그것이 죄악이라 하겠다. 개인이나 집단이 탐욕의 포로가 되고, 교만의 주체가 되고, 독선의 화신이 될 때 죄악은 최악으로 발악하게 된다.

그런데 죄악이란 스스로를 미화하는 버릇을 갖고 있다. 탐욕을 고상한 희망으로 변장시키고 교만을 자신감으로 둔갑시키며 독선을 정의로 위장한다. 이 같은 위장이 먹혀들수록 억울한 고통과 불안한 공포는 커지기 마련이다.

특히 이 같은 악이 집단의 속성이 될 때 더욱 위험하다. 왜냐하면 집단의 독선과 탐욕은 전쟁을 미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갓 보낸 지난 20세기의 역사에서 그러한 비극을 직접 체험했다. 더욱이 집단의 독선과 탐욕이 '종교적' 열정 곧 광신적 열망을 지닐 때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하게 된다. 히틀러의 광기가 바로 이 점을 증언해 준다.

얼마 전 나는 히틀러에 대한 기록 영상물을 보았다. 그는 초인(bermensch)으로 그리고 구세주로 자처하였다. 놀라운 것은 그가 예수로 자처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시작하였으나 완성시키지 못했던 사명을 자기가 완성시키겠다고 했다. 정의와 영광을 외치면서 그 이름으로 아멘! 을 외치는 그의 광기 어린 육성을 듣는 순간 나는 전율하였다. 그의 모습은 사랑의 화신 예수님이 아니라 악마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에게는 함께 아파함(compassion)이 없었다. 오로지 경쟁과 승리가 있을 뿐이었다. 바로 이 같은 살벌한 가치를 육화시키기 위해 1936년 베를린에서 올림픽 한마당을 연 것이다.

그런데 이 올림픽 잔치에서 그의 우생학적 이데올로기에 결정적 타격을 입힌 사람 둘을 우리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올림픽 잔치의 꽃은 아무래도 마라톤이며 또한 100m와 200m 같은 단거리 달리기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종은 히틀러가 경멸했던 흑인(제씨 오웬)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인내심 있게 달린 선수는 게르만 민족이 아니라 바로 한국인 손기정씨였다. 이들의 승리는 단순한 체육의 쾌거가 아니라 정치사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종교화된 나치 체제를 이겨낸 사건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나치의 '종교적 광기'가 천 백만의 인간을 살육했음을 기억할 때, 더더욱 두 분의 승리는 의미 있다고 하겠다.

사정은 조금 다르나, 지금 강대국의 애국심 강조가 우리를 얼마간 불안케 한다. 9·11 사건 후 미국 같은 초강대국의 애국심은 세계의 양식(良識)과 양심을 불안케 할 뿐 아니라 양심적인 미국 언론을 떨게 하고 있다.

지난해 대선과정에서 미국 당국은 9·11 이전에 알 카에다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가 있었음에도 이것을 가볍게 여겨 수 천명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비판이 일게 되었다. 미국의 부통령은 이 같은 비판을 비애국적인 짓이라고 비판했다. 미국 같이 열려 있다는 국가에서도 이 같은 애국심의 횡포가 염려스러운 수준에 이르고 있는 듯 하다. 올해로 일흔 셋이 되는 미국의 원로 방송인 댄 레더(Rather) 씨는 지난해 5월 16일 BBC 방송과의 대화에서, 이 같은 상황에서도 비겁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언론 현실을 이렇게 개탄하였다.

"당당하게 일어서서 그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들이 원치 않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비애국적인 것이다. 우리의 아들과 딸, 남편과 아내를 전장으로 내몰아 죽음에 직면케 하는 그들이야말로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레더 씨의 이 같은 소리가 옛날 이스라엘 예언자의 목소리로 들렸다. 아니,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의 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상황을 보면, 밖으로는 로마의 제국주의적 정책이 펼쳐지고 있었고, 안으로는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성전 세력과 회당 세력의 율법주의적 강제력은 대단했다. 예수님의 종말론적 메시지와 실천, 그의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행동은 이들 종교적 기득권 층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열린 밥상공동체나 무상의 치유행위, 그리고 성전 숙청은 우상화되다시피 한 유대교적 정체성 또는 선민의식에 직접 도전한 것이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지나친 애국주의(율법주의적 민족의식) 속에 깃들은 악을 보신 것이다. 그들의 종교적 열광주의와 위선적 처신을 주님은 신랄하게 비판했다(마태 23장).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적 열광과 민족적 애국심은 필경 예루살렘과 성전을 비참하게 폐허로 만드는 전쟁을 일으키게 될 것임을 미리 예견하셨다. 그리고 그 비참함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 속에 담긴 참 인간사랑, 사회사랑, 국가 사랑의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한다. 스스로 착실한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지도자들의 애국심 부추기기가 현대적 바리새인들의 열정으로 보이는 것이 나의 착각이기를 바란다. / 한완상 (전 통일부총리-새길교회 평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