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진담] 우리는 아직 희망을 고집할 수 있는가

(올랜도) 김명곤 기자 = 지난 19일 대선 투표가 진행되고 속속 개표 결과가 나오는 걸 밤새 지켜봤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입맛은 쓰고 귓속은 왱왱거렸고 가슴은 벌렁거렸고 머리 속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무슨 놈의 역사가 이런 역사가 다 있나…” 얼굴이 벌개져 나도 모르게 방 천정을 향해 소리치고 말았습니다.

아, 언젠가 그랬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본 한국역사> 에서 절규했었습니다.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되는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그래도 또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 놓고 나면 찢어 버리고 싶어 못견디는 이 역사, 찢었다가 그래도 또 모아대고 쓰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이 역사. 이것이 역사냐? 나라냐? 그렇다, 네 나라며 내 나라요, 네 역사며 내 역사니라.”

섭리사관적 역사해석으로 유명했던 함석헌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몽골족의 침입, 임진왜란, 박정희의 쿠테타 등 끊임없는 내우 외환으로 굴곡된 역사 속에 살아가는 우리 백성들의 고난의 삶을 이렇게 통탄했었습니다. 그런데 함 선생이 해석한 대로 우리 민족의 이런 고난에 정말 하늘의 ‘뜻’이 있다는 말인가. 지금으로서는 천지가 아득할 뿐입니다.

“국적 포기하겠다”는 동포, “모국을 향해 통곡한다”는 원로 언론인

분노와 허탈감을 곰삭이고 지내던 터에 얼풋 스쳐 지내던 동포 한 분이 “신부님과 약속했다, 문재인이 졌으니 국적을 포기하겠다”며 신문에 ‘국적 포기선언 광고’를 내겠다는 전갈을 해 왔습니다. 이심전심이었습니다.

바로 전날에는 박정희 시절 국내외에서 민주화 투쟁을 했던 원로 언론인이 저에게 이메일을 보내왔었습니다. 내용인즉슨 “현 사태가 무지한 노인 층 때문에 좌절감을 주었더라도 딱 한번의 통곡으로 끝내고, 모국의 정치적 발전을 위해 꾸준한 노력이 있길 기대하며 마음 속으로 성원을 보내네. 모국을 향해 통곡하며...” 이었습니다. 저도 통곡을 하고 싶어 졌습니다.

기막힌 일입니다. 저는 "박근혜 후보만 아니라면 누구라도…”라는 생각으로 이번 대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난 17대 대선 과정에서는 이명박 후보가 박근혜 후보를 누르고 한나라당 후보가 되는 걸 보고 ‘그나마 다행’이라며 안도했을 정도로 ‘박근혜 만은 안된다’는 생각을 심저에 갖고 있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저에겐 문재인이냐 안철수냐도 문제가 안되었고, 이정희든 강지원이든 김순자든 조갑제든 지만원이든 문제가 되지 않았을 터 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제가 박근혜 후보에게 무슨 철천지 원한이라도 있어서 그러는가 보다고 지레 짐작하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문재인이 되면 ‘노무현의 한’을 풀어줄 것이라 기대하는 ‘노빠’가 아니냐고 힐문할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달리는, 문재인이 되면 남북관계가 경제가 분배문제가 복지나 교육이 확 달라지는 새 세상이 올 것 같아서냐고 반문하는 분도 있을 듯 합니다. 해외 동포들 가운데서는 아마도 재외동포청이 생기고 이중국적문제도 해결되고 재외선거제도도 개선될 거고… 등 어떤 혜택을 누릴 것 같아서냐고 물어올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박근혜에게 무슨 철천지 원한이라도 있냐고요?

모두가 아닙니다. 저는 물론이고 제 가족이나 친척이 박정희 시절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거나 재산을 빼앗긴 적도 없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가슴 저리게 좋아하는 정도의 ‘노빠’도 아닙니다.

5년여 동안 파탄이 날 대로 나서 더이상 내려갈 것도 없는 대북관계는 국내외 훈수꾼들의 압력에 의해 ‘아무래도 안되겠다, 달래면서 가자’는 쪽으로 흐를게 뻔해 보이고, 국제경제와 밀접하게 연동이 되어있는 국내경제는 부처님 손바닥에서 놀기 정도가 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분배나 복지 교육은 중층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온 구조적인 문제라서 5년 안에 그 무슨 큰 성과를 기대하기에는 누가 손을 대더라도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수십년을 기다렸다 수만리를 달려가 투표한 재외선거에서 보셨다시피 재외동포들은 본국에서 크게 혜택을 주지 않아도 고국을 걱정하고 어떻게든 도움이 되려고 할 만큼 의식이 성숙해 있습니다.

저는 정치 허무주의를 내세우려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근거없는 낙관주의를 들이대며 ‘누가 해도 마찬가지다’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뭣 때문에 박근혜는 안 된다는 것이냐고요?

단 한가지, 국민적 자존심 때문이고 ‘역사 바로세우기’ 때문입니다. 더이상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쪽팔리는 역사’를 사는 ‘2등 국민’, 아니 ‘하등 국민’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이지요.

외국에 아무리 현대차를 많이 팔아도, 아무리 삼성 전자제품이 인기가 있어도, 걸그룹이나 싸이가 엄청난 군중을 몰고 다녀도 어쩌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한국 소식에서 ‘독재자의 딸’이라는 단어로 우롱을 당하는 역사를 사는 국민은 불행한 국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거 전.후에 외국의 언론매체에서 박근혜 후보를 가리켜 ‘독재자의 딸’이란 레테르를 붙여 보도한 것을 아직도 많은 국민들은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있는 듯 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 잘 먹고 잘 살아도 ‘졸부’라는 손가락질을 당하는 부자가 있는 것처럼, “너희가 요샛날 밥술깨나 뜬다고 난리인데, 희대의 독재자의 딸을 다시 대통령으로 삼으려 하다니… 아직 미개국 아니냐” 는 얘긴데, 그걸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새누리당과 보수 언론이 ‘스트롱맨의 딸(strongman’s daughter)’을 제논에 물대기 식으로 ‘강력한 지도자’ 또는 ‘실력자의 딸’ 등으로 해석한 것에 당황한 미국의 언론이 인터넷 판에서는 ‘독재자의 딸(dictator’s daughter)’로 고쳐 올린 것이나 유럽의 언론도 같은 ‘독재자의 딸’로 명기한 것은 바로 나라 밖에서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반증일 터입니다. 오죽했으면, 국가기간 통신사인 <연합뉴스>의 편집국 기자들이 ‘실력자의 딸’이라고 번역한 자사의 정치부장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했을까요.

‘밥맛 나게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

제가 더 걱정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가 난장판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반동적인 역사에 가담한 자들에게는 시효가 없다’며 나중에라도 처벌하는 것이 상례가 되어왔는데요, 도대체 우리 나라에선 친일파도 유신 독재의 부역자들도, 학살자들도 아무런 역사의 단죄가 일어나지 않고 버젓이 백주 대낮을 활보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죽을 맛이라는 것이지요. ‘그 딸에게 역사적 책임을 되물림하는 일은 가당치 않다’고 하는 분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가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억지춘향식 두둔에 불과할 따름이겠지요.

뭐 당선이 되기위해서는 못할 짓이 없다란 생각에서 인지 박 후보가 인혁당 사건이나 유신 독재 등 일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어정쩡한 사과 제스처를 취하긴 했지만 고개가 갸우뚱거려지고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 때 상황에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본 분들에게 유감’ 운운 하는 말들로 정리되기에는 우리의 굴곡진 현대사가 주는 역사의 무게가 너무 무겁단 생각을 한 것은 저 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과’는 반성하고 ‘바름’을 향하는 역사가 우리 땅에서도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일본으로부터 갓 독립한 신생 조국에서 누구나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어도 (일제에 견마지로한) 박정희 만은 안된다’고 장준하 선생이 주장한 것처럼, ‘독재로 점철된 한국의 현대사에서 그 독재에 직.간접으로 이어져 있는 박근혜만은 안된다’는 것이었지요.

이번 선거결과에 통곡을 했다는 원로 언론인이나, ‘국적을 포기하기하겠다’고 선언한 재미교포나, ‘무슨 이런놈의 역사가 다 있나!’라고 소리친 저나 ‘악한 짓은 악하다고 하고 바른 것을 바르다고 인정하는 세상’에 대한 갈망때문에 나온 외마디 였습니다. '밥 제대로 먹여주는 민주주의' ‘밥맛 나게 하는 민주주의’ 세상을 갈망하고 또 갈망했던 터입니다.

제가 문재인 후보의 당선을 바랐던 것은 문재인 개인에 호감이 가서라거나 그의 공약들이 눈에 확 들어오고 실현가능성이 높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한국의 현대사가 굴곡진 역사로 점철되어 있지만 조만간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고, 그것을 실현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을 문재인 후보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똘똘 뭉쳐 부딪친 노력은 그 무모함만을 부각시킨 채 허망하게 막을 내렸고, 역사에 거는 기대감에 체념의 그림자가 강하게 드리워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아직 희망을 고집할 수 있는가

제가 고국의 현실에 힘을 잃고 우울한 상황에 처해질 때마다 다시 펼쳐 읽는 명저가 있습니다. 지난해 작고한 미국의 재야 사학자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위에 중립은 없다>란 책입니다. 힘없어 보이는 민중들이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형성해 온 과정이 체험적으로 그려져 있고, 그 민중들에 거는 무한한 희망이 담긴 책입니다. 그 ‘희망에 대한 고집'을 선언적 언어로 그린 귀절을 저는 특히 좋아합니다만, 오늘은 괜히 허공을 치는 소리로만 들립니다.

“역사는 거대한 적과 맞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함께 싸워 승리한 사람들의 얼굴로 가득차 있다. (중략)

정의를 위한 이런 싸움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바로 인간이다. 잠시라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순간에도 남들과는 달리 아무리 작은 일이지만 무언가를 행하는 인간이다. 또 영웅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아주 작은 행위라도 불쏘시개 더미에 더해지면 어떤 놀라운 상황에 의해 점화되어 폭풍같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중략)

결국 내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나는 희망을 고집한다”

이런 저런 분석과 반성들이 터져 나오고 있지만, 당장에야 체념과 절망을 희망과 기대로 역전시킬 수 있는 별다른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거듭 훼손에 훼손을 거듭해온 민족적 자존심과 역사에 대한 무너진 기대가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까지는 회복될 것 같지 않은 모골 송연한 기분이 앞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어찌해야 할까요.'양심불량층'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앞서고, 역사 허무주의의 그림자에 덮여 있는 지금, 다시 우리는 민중에 대한 희망을 고집해야 하는 것일까요? 울먹이는 음성으로 국적 포기 선언을 한 50대 재미교포를 붙들고 대취하고 싶은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