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신앙'과 화해하지 못한 이들에게 [print]

[탐독의 시간] 정신실 <슬픔을 쓰는 일>(IVP)

(서울=뉴스앤조이) 구권효 기자 = '죽음'은 내게 낯선 주제다. 38년간 살면서 가까운 가족이나 친한 지인의 죽음을 경험한 일이 없어서 그런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한번은 연예인 유재석이 방송에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나도 그와 비슷하다. 유재석은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막상 죽음을 생각하면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것도 있는 것 같고. 무섭다기보다는 갑갑하다. 어떻게 되는지 모르니까. 그래서 좀 생각하다가 '에이' 하고 말아 버린다"고 했다.

6월 말 출간된 <슬픔을 쓰는 일>(IVP)은 그래서 손을 대기가 어려웠다. 이 책은 저자 정신실 작가가 어머니 별세 이후 6개월간 쓴 '애도 일기'다. 정 작가의 어머니 이옥금 권사는 2020년 3월 11일, 향년 96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개인적으로 '슬프기로 작정한 영화'는 잘 보지 않는 편인데, 제목부터 '슬픔을 쓰는 일'인데다가 주제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니, 너무 작정하고 슬플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순전히 팬심(?) 때문이다. 나는 정신실 작가의 전작 <신앙 사춘기>(뉴스앤조이)를 읽으며 자주 나 자신을 발견했고, 그때 이후로 그의 팬을 자처하고 있다. 어렸을 적에는 어머니의 신앙을 내면화했다가, 머리가 커지면서 그 신앙을 미워하고 반항했고, 이제는 화해하는 중이라는 정 작가의 고백이 마치 내 얘기 같았다. 정직하게 돌아보건대, 나는 엄마의 신앙과 '화해하는 중'은 아니었기에 정 작가가 좀 더 우러러보였다.

자연스럽게 정 작가 어머니 이야기도 내 엄마 이야기 같았다. 그야말로 '전통적인 신앙인'. 주일성수를 목숨처럼 사수하는 신앙을 가진, 인생의 굴곡을 기도와 예배로 통과해 온 사람이다. 저자의 생생한 묘사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어머니는 한번 만나 본 적 없어도 왠지 누구인지 알 것 같은 분이었다. 정 작가가 작년 3월 14일 페이스북에 어머니의 장례 소식을 알렸을 때, 일면식 없는 사람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넘어 조금 낯선 감정을 느낀 이유다.


▲ <슬픔을 쓰는 일 - 상실의 늪에서 오늘을 건져 올리는 애도 일기> / 정신실 지음 / IVP 펴냄 / 256쪽 / 1만 3000원

신앙의 사춘기를 지나

<슬픔을 쓰는 일>에는 어머니의 죽음과 딸의 삶이 담겨 있다. 정신실 작가는 중학생 때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여읜 후 늘 "죽음을 짊어진 삶"을 살았다. 39년간 어머니의 죽음을 걱정하며 마음속에 '상복'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또 준비했던 어머니의 마지막을 맞았지만, 상황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마침 급격히 확산되던 코로나19 때문에, 돌아가시기 한 달 전부터 요양병원에 계셨던 어머니를 면회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수십 년 준비했던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죽음이 결코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정 작가가 통화로 어머니에게 찬송을 불러 주는 장면이었다. 돌아가시기 3일 전부터 하루에 한 번 있는 면회 시간에 동생이 전화를 걸어 주면 정 작가는 어머니와 만났다. 어머니는 이미 숨쉬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정 작가는 "말이 나오지 않아 울기만 하다" 자기도 모르게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다음 날, 그다음 날도 동생이 가서 전화하고 제가 찬송하고 엄마는 호흡으로 함께하고. 셋이 그렇게 엄마가 사랑하던 찬송으로 연결"됐다고 했다.

"교회의 딸로 태어나 교회 여자로 자란" 정 작가는 나이 40이 넘어 '신앙의 사춘기'를 경험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교회 보이(boy)'로 자란 나도 그가 경험한 신앙 사춘기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에게 '모교회'는 말 그대로 '엄마-교회'다. 엄마의 가르침이 곧 교회의 가르침이었고, 교회의 요구가 곧 엄마의 요구였다. 그 가르침과 요구를 따르며 살다가,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렇게 엄마의 신앙과 결별을 선언한 때가 있었다.

"예배, 주일, 주일성수에 대한 엄마의 집착과 고집이 얼마나 나를 옥죄었던가. 엄마 잔소리의 8할은 예배, 주일성수였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살어. 주일성수 혀라. 주일날 돈 쓰지 마라. 너 가정 예배 드리니? 애들 기도로 키워야 혀. 기도ㅤㅂㅐㄲ이는 ㅤㅇㅗㅄ다….' 어려서부터 들었던 잔소리를 쉰이 넘도록 들었다. 어릴 적엔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그저 엄마 존재하는 곳의 BGM이라고 생각했다. 반골 기질이 강한 나는 어려서부터 일단 반발하고 봤다. 엄마의 모든 것, 특히 신앙생활에. 반발하고 미워하면서도 엄마의 그것을 고스란히 내 것으로 가져왔으니 비극이었다. 마흔 무렵 뒤늦게 신앙의 사춘기를 겪었다. 엄마와 교회를 싸잡아 미워했다. 말 그대로 사춘기 아이 가출하듯 엄마와 교회를 떠나왔다. 10여 년의 방황이었다." (220쪽)

엄마와 내 사이가 나쁜 건 아니다. 난 때로 살갑게 전화도 하는 나름 괜찮은(?) 아들이다. 하지만 신앙 문제만큼은 여전히 결별 상태다. 정 작가 표현대로라면 나는 여전히 신앙 사춘기다. '엄마'로 대표되는 '이전의 신앙'은 구시대적이며 틀렸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엄마의 신앙 체계에서 '가나안 성도'는 있을 수 없는 개념이다. 잘 이야기해 보려 해도 결국엔 싸움이 돼 버린다. 아마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지 않을까? 이게 단순히 세대 차이인지, 한국교회가 시대에 뒤처져서 나타나는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죽음은 여전히 낯설지만 모두가 겪게 될 일이라는 것은 안다. 언젠가 나도 엄마와 헤어질 것이다. 그때도 엄마와 나의 신앙은 여전히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얘기하면 싸움만 되는 상태일까. 그런 의미에서 정신실 작가가 어머니에게 찬송을 불러 주는 장면은, 내게는 신앙 사춘기를 지나 엄마의 신앙과 마침내 화해한 자녀의 모습으로 보였다. 외람된 표현이지만, 그래서 감격스럽게 읽었다. 나도 언젠가 엄마에게, 엄마가 좋아하는 찬양을 불러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 정신실 작가의 전작 <신앙 사춘기>와 이번에 출간한 <슬픔을 쓰는 일>. 두 책을 함께 읽는 것도 좋겠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허튼 위로

<슬픔을 쓰는 일>을 읽으며 또 한번 확인한 사실은, '교조적인 위로'는 슬픔에 빠진 사람을 더욱 황폐하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기독교는 죽음과 가장 밀접한 종교다. 모든 기독교 전통은 2000년 전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고 신앙하고 해석하고 기억하는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죽음 전문 종교인 것이 무색할 정도로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서툴다. 예수 죽음에 집착한 나머지 사람 죽음에는 무관심해서일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맞닥뜨린 이에게 '좋은 곳에 갔으니 슬퍼할 일 아니다'라고 말하는 건 기독교인밖에 없을 것이다.

"줄곧 누군가에게 그 말을 들을까 두려웠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찬송이 울리고 상여 뒤에 붙어 걷던 길이었다. 찬바람 부는 허허벌판에 혼자 버려진 느낌으로 걷고 있었다. 며칠 사이 내게 일어난 일이 믿어지지 않았던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내 곁에 다가오신 아버지 친구 목사님의 한마디, '울지 마라. 너희 아버지 천국 가셨다. 좋은 곳에 가셨는데 왜 우느냐?' 순간 가슴에 콱 박혀 버린 그 말로 인해 빼앗긴 시간이 애달프다.

마땅히 슬펐어야 했다. 울고 울어서 더는 울 필요가 없을 때까지 울었어야 했다. 나는 어쩌자고 그 말을 또렷하게 듣고 마음에 새겼을까. 좋은 곳, 천국에 가신 아버지를 두고 슬퍼하는 것이 죄로 여겨졌다. 죄를 지으면 천국에 갈 수 없고, 아버지는 이미 당도한 천국에 내가 가지 못하면 다시는 아버지를 만날 길이 없으니, 슬퍼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그리워 슬퍼지면, 그리운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 슬퍼하지 말아야 했다. 슬픔, 그리움, 외로움 같은 감정들이 마땅히 미워해야 할 죄라고 믿었고, 그러한 감정에 빠지는 나를 미워했다.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버지에게 닿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니.

그 대신 그리움과 슬픔은 '종교적 열심'으로 대체했다. 하나님 아버지가 그 좋은 곳에 내 아버지를 인질로 잡아 두고 '불꽃 같은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것 같았다. 천국 입성 자격 검증을 위해 내 죄를 낱낱이 기록하고, 매일 저울로 달아 보실 것 같아 신앙생활에 집착했다. 아버지의 넓고 따뜻한 품을 잃고 허허벌판에 선 아이가 하나님 아버지마저 단단히 오해하며 살아온 시간이 아쉽고 서럽다.

엄마 품을 잃은 지금, 누군가 그리 말할 것만 같아 지레 겁이 나서 방어막을 치게 된다. '울지 마라. 네 엄마 좋은 곳에 가셨는데 왜 우느냐?' 신앙의 이름으로 허튼 위로를 건네 올까 두렵다. 아무도, 그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 해서는 안 될 말이다." (92~94쪽)

한 사람의 죽음이나 국가적 참사 앞에서나 꼭 한 번은 이런 소리가 나온다. 기독교인들이, 특히 목사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충분히 슬퍼하고 애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죽음 앞에서, 모든 일에 정답을 알고 있다는 오만함을 드러내기보다는 차라리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사람답다.

"슬픔에 싸인 사람에게 다가가 위로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어설픈 말을 하느니 가만히 손잡아 주는 것이 좋다. 아니, 손을 잡아 주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슬픔이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어쩔 줄 모르는가. 엄마의 장례식 직후, 흑백 세상을 살던 나는 만나는 누구라도 붙들고 엄마 얘길 하고 싶었다. 누구라도 그저 엄마에 대해 물어봐 줬으면 싶었다. 엄마의 마지막 날이 어떠했는지,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엄마가 싫었던 때, 엄마가 좋았던 때… 무엇이든 물어봐 주면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었다. 그것이 어렵다면 제대로 치르지도 못한 장례식 절차라도 물어봐 줬으면. 그러나 누구도 물어 주지 않았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로 할 수 없어서였음을 안다. 우리 모두 죽음 앞에서 어쩔 줄 모른다. 죽음은 이렇게 가까이 있고, 이렇게나 명징한 인간의 운명인데, 쉽게 입에 올리지 못해서 일단 피하고 보려 한다. 나 역시 슬픔에 잠긴 사람 앞에서 그랬었다." (173쪽)

작년 6월 취재차 정신실 작가와 만난 적이 있다. 페이스북에서 어머니 장례 소식을 본 지 3개월 만에 만나는 것이었는데, 당시 나는 위로의 말 한마디도 건네지 못했다. 외려 취재 내용과 상관없이 내 이야기나 털어놓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어쩔 줄 몰랐던 것이다. "이렇게나 명징한 인간의 운명" 앞에서.

'미친년 글쓰기'


▲ 정신실 작가는 전문 심리 상담가로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슬픔을 쓰는 일>은 좀 당황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글이다. 기자로서 스킬 위주로 글쓰기를 배운 나에게, (저자 본인 말대로) 이런 '미친년 글쓰기'는 생소하다 못해 살짝 부담스럽기도 하다. 치유하는글쓰기연구소 박미라 대표가 추천사에 쓴 것처럼 "그도 그럴 것이 부모를 떠나보내는 일이 맨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 직전부터 '탈상脫喪'에 이르기까지, 딸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이만큼 적나라하게 쓴 책은 아마 없을 것 같다.

자기 상태를 알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나만 해도 어떤 사건을 기사화하는 것보다 나 자신에 대해 쓰는 게 몇 배는 어렵다. 정신실 작가가 이런 솔직한 고백을 쓰고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글쓰기로 사람을 치유하는 일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 작가는 현재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소장으로, 글쓰기·에니어그램·꿈을 도구로 심리 상담을 하고 있다. 신앙 사춘기를 지나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을 글로 써 나가며 다른 사람들도 돕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아직 엄마의 신앙과 화해하지 못한 나에게 정신실 작가는 좋은 선생이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낯설지만, 여전히 그의 글에서 나를 만난다. <슬픔을 쓰는 일> 맨 뒤에는 '애도의 계절을 함께 지나온 책' 목록이 있다. 그가 읽었던 책들을 틈틈이 따라 읽어 보려 한다.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나도 엄마와 내 이야기를 써 봐야겠다. (본보 제휴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1년 8월 16일, 월 12:1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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