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g Il soon biography5 022019 [print]

'국대안 반대' 앞장서고 서울대 미학과 입학
[무위당 장일순평전 5회] 해방된 나라의 국립대 초대 총장이 미군 장교라는 것에 분노하며



▲ 장일순 선생 무위당 장일순 선생 ⓒ 무위당 사람들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 = 해방 한해 전인 1944년 봄, 장일순은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이다. 문과계열이 아닌 공업전문을 택한 것은 일제말기 징병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해방이 되었다.

장일순이 17살 되던 해이다. 일제 폭압기에 태어나 한참 감수성이 예민하던 17살에 해방을 맞았다. 경성공업전문학교가 서울대학 공과대학으로 바뀌고 장일순은 2학년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진로는 평탄하지 않았다.

미 군정청은 1946년 8월 23일 군정법령 제102호를 통해 경성제국대학ㆍ경성의전ㆍ경성치전ㆍ경성법전ㆍ경성고공(高工)ㆍ경성고상(高商)ㆍ경성고농(高農)을 통합하여 국립 서울대학을 신설하고, 총장에 미군 장교를 임명한다는 국립대학교 실시령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식민지교육 반대', '학원의 자유와 민주화' 등을 내걸고 교수ㆍ교직원ㆍ학생들의 반대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었다. 장일순도 격렬하게 반대운동에 나섰다. 명색이 해방된 나라의 국립대 초대 총장이 미군 장교라는 것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2월 초에는 서울대학교 9개 단과대학에서 일제히 반대운동이 일어나자 군정장관 러치 소장은 상대ㆍ공대ㆍ문리대에 3개월간 휴교령을 내렸다.

이보다 앞서 11월 1일부터 서울 각 대학에서는 등록거부ㆍ동정맹휴가 시작되어 1947년 5월 남한의 학생총수의 절반인 4,956명이 제적되고, 교수 총수의 3분의 2인 380여 명이 해임되었다. 결국 미 군정은 손을 들고 수정법령을 공포함으로써 국대안 반대 투쟁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1947년 8월 14일 제적학생 3.518명이 복적되었다.

장일순도 이때 복적이 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공과대학을 다니지 않고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한다. 미학과 제1회생이 된 것이다.

"형님이 워낙 책을 많이 보시고 철학적 사유를 하시다보니, 당시 미학과가 철학을 가르쳤어요. 그래서 그 과를 선택하시게 된 것 같아요. 형님은 진정한 학문은 철학이라고 생각하셨어요" (주석 1)

장일순이 미학과를 선택한 것은 그의 성품이나 이후의 사유와 행로로 보아 본령(本領)을 찾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에게 이공계열은 성향이 맞지 않았을 것이다. 해방공간의 어수선한 정국에서도 장일순은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는 원주지역 청년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서울 유학생이 드물었던데다 다방면에 역량이 보여서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뒷날 장일순과 더불어 민주화운동과 한살림운동을 헌신적으로 전개한 언론인 출신 김영주(무위당만인회 고문)의 증언이다.

내가 무위당 선생을 처음 본 것은 1947년 경,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무렵쯤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원주를 떠나 서울에 있는 중학교(경기중)에 다니고 있었다. 토요일이면 수업이 끝나자마자 청량리역으로 직행해 기차를 타고 원주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토요일 오후 원주행 열차에 올라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내가 타고 있는 객실 복도로 대학생복을 입은 청년이 뚜벅뚜벅 걸어와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숱이 많은 머리에 부리부리한 눈, 오똑선 콧날의 대학생. 나는 이 사람이 서울대에 다니는 장일순이라는 이름의 고향 선배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한달 전쯤 기차가 원주역에서 정차했을 때 그가 옆 칸에서 내리는 것을 본 적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무위당은 서울대 미학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도 나처럼 서울서 유학을 하면서 주말이면 기차를 타고 원주에 있는 집으로 내려오곤 했다.

대학생이 드물었던 시절에, 그것도 시골 원주에서 서울대에 다니는 장일순은 고향사람들의 자랑이었다. 나는 그전까지 무위당 선생을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공부 잘하고 똑똑한 수재 장일순"이란 이름을 어른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터라 그의 이름이 귀에 익숙해 있었다.

어떤 날은 그이와 내가 같은 열차 칸에 타고 있었던 때도 있었다. 서로 좌석은 멀찍이 떨어져있었지만, 대학생인 고향 선배와 같은 객실에 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주석 2)

주석
1> 앞의 <둘째 동생 정화순 인터뷰>.
2> 김영주, <내 삶속의 무위당>, '무위당 사람들' 제공.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19년 2월 23일, 토 4:14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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