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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호산나칼럼] 유교적 목회를 탈피하자
성경적 목회관을 따라야 할 한국교회

최근 한국인의 낮은 청렴도가 신문 지상에 보도되었다. 세계 146개 나라들 중 한국은 47위이고 싱가포르 5위, 일본 24위, 대만은 35위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복음화 된 나라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가히 충격적이다.

청렴도에서 불교나 무교가 아직도 지배적인 나라들인 싱가포르, 일본 그리고 대만보다 한국이 훨씬 뒤떨어진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들 나라의 불신자 또는 이교도들보다도 못하다는 뜻이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그렇게도 자랑한 양적 성장은 속 빈 강정과 같았다. 하나님의 교회 마당에 맛을 잃은 소금들만 잔뜩 쌓여있다는 뜻이다.

목회자는 '주장하는 자' 아닌 '섬기는 자'


기독교가 그리 왕성하면서도 한국인의 부패성은 왜 이리도 심각한가? 이 원인을 유교의 통치 철학에서 찾아본다. 중국인들도 이미 버린 유교가 유별나게 한국에서 더 강하고 왕성하다.

유교 문화권에서 지도자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백성은 지도자의 말을 무조건 듣고 따라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지만 한국교회는 이런 유교적 권위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복당했다. 이 위에 무속의 영향으로 한국 교인들은 목회자를 무당 같은 존재로 여기며 두려워했다.

그 결과 한국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능동적으로 연구하는 자세가 부족해서 대체로 목사의 말과 그의 설교만 듣고 만족한다. 이 덕분에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마치 유럽의 중세 암흑시대 신부들처럼 큰 권세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불완전한 인간이 지나친 권세를 누리면 나태해지며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고후 1:24). 바울은 성도의 믿음을 주관할 수 있을 정도로 존경 받는 사도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완강히 부인하고 섬기는 자로 남았다.

여기 '주관한다'는 단어는 '주인으로서 종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종에겐 자기 의지가 없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행하면 된다. 목회자가 성도의 믿음을 주관하려 한다면 성도의 인격은 목회자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놓인다. 성도의 영적 성장은 전적으로 불완전한 목회자에게 의존된다. 이것은 이미 비성경적이다.

목회자는 유일한 선생이요 주인이신 예수님을 닮도록 성도들을 돕는 자이기 때문이다(마 23:10). 성도들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유교식의 목회는 결국 교인들의 성숙을 저해시켜 역으로 한국교회를 부실하게 만든다. 한국교회 목회자는 성경의 목회를 바로 따르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이같은 유교식 목회를 한다.

목회자는 주장하는 자세를 버리고 양 무리의 본이 되도록 서구 목회자들보다 더 자기부정에 힘써야 한다(벧전 5:3). 목회자의 이런 노력과 경건 훈련은 상당 기간 계속되어야 한다. 이때 성도들은 목회자의 훌륭한 본을 보고 배우며 한국교회가 달라지고 한국 사회도 서서히 변화할 것이다. 소명자가 자기 부정에 힘써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목회자는 지식의 전달자 아닌 사랑의 전달자

주지적(主知的) 목회란 주로 지식에 치우친 목회를 뜻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오"(고전 13:2). 지식이 은사 중 하나로 취급되며 사랑과 비교됨은 한국교회에 하나의 충격이다.

사도 바울은 지혜와 지식이 사랑을 겸할 때만 비로소 이웃과 사회 그리고 교회에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뒤집어 말해 사랑을 겸하지 않은 지혜와 지식은 무용하거나 오히려 해롭다는 뜻이다.

한국의 비교적 큰 교회들은 새로운 후임목사 자격으로 신학박사학위를 요구한다. 그러나 목회는 신학 지식만 아닌 사랑을 요구한다. 목회자는 지식 전달자가 아니라 사랑의 전달자이기 때문이다. 신학이 목회를 위해 존재하지만 신학박사 소지자가 반드시 목회를 훌륭히 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작지 않은 목회 경륜을 통해 성도들을 진정 사랑할 줄 아는 목회자라면 마땅히 그가 초청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의 주장대로 지혜와 지식은 은사에 지나지 않는다. 은사는 직분을 잘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다(고전 12:4~6). 이 점에서 지혜와 지식이란 은사는 기능적이다. 그렇다면 이 은사들은 목회자의 인격 성숙과 무관하다. 주지적 목회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9~10).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무리 많은 지혜와 지식을 소유해도 결국 부분적으로 알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들이 소유한 지식과 지혜는 언젠가는 폐해질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면 왜 오늘 목회자들이 지식 일변도의 자세를 보이는가? 유교 문화권에서 지식이 인격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사의 즉각적인 효과가 주는 매력 때문이다. 지식의 은사가 탁월한 목회자는 사람들에게 금방 알려져 사랑과 존경을 받고 그에 맞는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관점에서 목회자란 사랑이 겸해진 지식의 소유자여야 한다.

목회는 신학과 달리 종합 예술이다. 그리고 신학은 지식 자체가 대상이지만 목회는 사람이 대상이다. 이 점에서 지식의 은사는 반드시 사랑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지식의 냉철함과 예리함은 사랑으로만 제거되거나 완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목회자에게 자기 부정에 대한 부단한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소명자는 교만케 하는 지식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자기 부정에 힘쓴다. / 장창수 (목사)
 
 

올려짐: 2005년 3월 21일, 월 12:5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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