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Weekly of Florida   로그인  등록하기

 현재시간: (EST) 2023년 4월 01일, 토 7:01 am
[종교/문화] 종교
 
'소유냐 일이냐'의 함정
[호산나 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어지니교회) = 소유냐 존재냐. 모두가 들어본 말일 것이다. 이것은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라는 책 제목에서 유래했다. 그는 책에서 소유와 존재 양식은 인간에 모두 내재되어있는 특성들로, 둘 중 어떤 양식을 더 개발하느냐에 따라 성격 구조가 달라지고 행복하거나 불행해질 수 있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유적 실존 양식을 버리고 존재적 실존 양식으로 살아야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 책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쾌락주의이다. 신자유주의체제가 말없이 추구하는 것은 쾌락에의 지름길이다.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본, 즉 돈이다. 돈이 가진 유사전능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즉각적인 필요를 가능하게 해준다.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난다. 욕망의 존재인 인간에게 그래서 돈은 물과 같이 자연스럽게 갈증을 느끼게 만든다.

결국 돈은 인간에게 쾌락을 가능하게 해준다. 나는 어느 공원에서 늙은 남자가 대학생 나이의 젊은 여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늙은 남자와 어린 여자도 서로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돈 있는 늙은 남자는 어린 여자에게 돈으로 기회를 제공하고, 어린 여자는 늙은 남자에게 여러 의미의 쾌락을 제공한다. 위윈이다. 그 매개는 물론 돈이다.

책에서 저자는 "극단적 쾌락주의는 … 단 하나의 예외적 인물을 제외하고는 - 중국 및 인도, 근동, 유럽의 인생철학 대가들이 전개해온 '행복한 삶'의 이론에서는 그 뿌리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p.16)

하지만 쾌락은 인간에게 갈증과 같다. '행복한 삶'이란 인간의 죽음 직전에만 의미를 가지는 파랑새이다. 찌루찌루미찌루가 발견한 파랑새는 실제 현실에서는 죽은 앞에서만 보이는 신기루이다. 그래서 아무리 쾌락이 행복한 삶에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거나 실제로 마약과 같은 것을 통해 확인하듯이 불행으로 이끄는 단초내지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자기 눈으로 확인해도 인간은 쾌락에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철학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입증된다. 과학적으로도 최대 쾌락은 절대 최대 행복이 될 수 없다. 자극적인 쾌락에 의한 즉각적인 보상은 단기간에 많은 양의 도파민을 분비하게 하여 행복을 일으킨다. 하지만 너무 많은 양의 도파민이 분비되면 인체는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다음부터는 같은 크기의 자극에 대해 도파민 방출량 또는 도파민 수용체를 줄인다. 그 결과 사람은 점점 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지만, 결코 행복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결국 죽음에 이를 때까지 더 큰 쾌락을 추구하며 자기 몸을 상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반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큰 쾌락을 찾기 위해 약물을 찾는가. 돈은 어떤가. 결국 인간은 아무리 소유냐 존재냐를 생각해도 결국 소유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들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존재에 대한 강조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이 말씀에서 말하는 열매는 존재를 의미한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 좋은 나무가 되는 것도 스스로의 노력이나 수양 혹은 수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가지가 되어야 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결정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좋은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성서가 마치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무의미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행위와 존재는 둘이 아니다. 존재는 행위를 결정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괴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행위와 존재가 다를 수 있다. 그 괴리를 끊임없이 인식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유는 물론이고 행위 외에 존재를 구분하기 힘들게 만드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일이다. 일은 소유인가 존재인가. 일은 믿음인가 행위인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일 역시 행위와 마찬가지로 소유와 존재를 헷갈리게 만드는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일은 훨씬 더 정교하고 교묘하다. 일이 행위라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하지만 현실에서 일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열매로서 존재를 가름하는 시금석으로도 작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일을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행위로 만든다. 인간이 하는 일에서 그 사람의 가치관이 드러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하는 일로 자신을 판단하거나 인정받으려 한다. 이 지점에서 인간과 그리스도 사이의 괴리가 일어날 수 있다. 위에서 살핀 인간의 존재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를 떠났지만 하는 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자신은 물론 타인들에게 인식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위선의 실상이며 진면목이다. 일은 이처럼 행위임이 분명하지만 믿음으로 인식하게 만듦으로써 소유와 존재의 경계를 교묘하게 허무는 역할을 한다.

또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일이 공동선 이 될 때 그 사람을 의심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 믿는다. 그러나 나는 공동선이라는 단어 자체를 불신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라는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지향점을 모호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정의는 단순히 인간의 결핍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의 모든 불평등을 해소하는 사회의 구조변화를 요구한다. 자유, 평등, 평화는 하나님의 정의로 드러나는 사회의 변화이다.

그런데 일이 하나님의 정의를 잠식한다. 일은 단순히 존재와 소유의 벽을 허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공동선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공동선은 사회의 구조변화를 이루지 않고 인간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 기원이 콘스탄티누스의 빈민구제소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가난한 자를 위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으로 인간 사이의 존재의 벽을 허무는 하나님의 정의는 수용할 수 없었다. 그에게 하나님의 정의는 불의이자 무질서였다. 그런 그가 세운 빈민구제소는 이후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에게서 하나님의 정의라는 지향점을 왜곡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근본적인 사회구조의 변화를 도외시한 채 단순하게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라 돈의 길이 되었다.

사회구조의 변화를 도외시한 섬김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뤄내야 할 다른 사명, 즉 섬기는 대상과 하나가 되게 만드는 형제애 역시 그리스도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만일 그런 상태에서 그리스도인 자신이 형제애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위선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을 넘어뜨리는 것은 명백한 반그리스도적 행위가 아니라 가치관이 투영될 수 있는 일이다.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하는 일이라는 착각이 자리할 수 있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빈민구제소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돈의 일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일부를 차용하는 것이다. 부분적인 것은 절대 진리가 될 수 없다. '진리의 조각'은 악마의 손에서 가장 빛날 수 있고 우리는 지금 그것을 보고 있다.

일은 단순히 행위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소유와 존재의 벽을 허무는 또 다른 위험요소이다. 일은 사람의 자아를 부풀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자아를 부풀게 하는 일이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라 돈의 화려한 위장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인의 행위와 믿음, 소유와 존재 사이의 벽이 사라지고 행위와 믿음이 하나가 되고 소유와 존재 역시 하나가 된다. 일은 이 모든 것을 일시에 허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닌 악마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버려야 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가장 영적인 일이 될 수 있다. 모든 소유를 버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 역시 포함한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올려짐: 2023년 2월 20일, 월 4:55 pm
평가: 0.00/5.00 [0]

답글이 없습니다.

   

   
   
https://backtokorea.com/
https://www.koreaweeklyfl.com/news/cms_view_article.php?aid=27229</a
https://www.geumsan.go.kr/kr/
https://crosscountrymortgage.com/joseph-kim/
www.smiledentalfl.com
www.koreahouseorlando.com
https://www.koreaweeklyfl.com/news/cms_view_article.php?aid=24924</a
https://www.koreaweeklyfl.com/news/cms_view_article.php?aid=25798</a
https://www.sushininjafl.com/
www.acuhealu.com
https://www.lotteplaza.com/
https://www.koreaweeklyfl.com/news/cms_view_article.php?aid=25766
www.minsolaw.com
www.GoldenHourAcu.com/
www.easybeautysalon.com/
https://www.koreaweeklyfl.com/news/cms_view_article.php?aid=24925
www.koreaweeklyfl.com/news/cms_view_article.php?aid=24448
https://www.koreaweeklyfl.com/news/cms_view_article.php?aid=26003</a
www.RegalRealtyOrlando.com
https://www.koreaweeklyfl.com/news/cms_view_article.php?aid=24926</a
https://nykoreanbbqchicken.com/
www.koreaweeklyfl.com/news/cms_view_article.php?aid=25073
www.koreaweeklyfl.com/news/cms_view_article.php?aid=25070
www.koreaweeklyfl.com/news/cms_view_article.php?aid=25071
www.koreaweeklyfl.com/news/cms_view_article.php?aid=25296
www.koreaweeklyfl.com/news/cms_view_article.php?aid=25295
www.koreaweeklyfl.com/news/cms_view_article.php?aid=25297
www.koreaweeklyfl.com/news/cms_view_article.php?aid=25072
www.sharingkorea.net
www.ksm.or.kr
www.ohmynews.com
www.newsm.com
www.newsnjoy.or.kr
www.protest2002.org
www.biblekorea.org
www.saegilchurch.net
get FireFox
https://kornorms.korean.go.kr/m/m_exampleList.do
http://loanword.cs.pusa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