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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침묵
[호산나 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어지니교회) = 십여 년 전 책을 몇 권 번역했다. 나는 작고하신 세이비어처치의 고든 코스비 목사님처럼 내 책을 내지 않기로 결심한 적이 있다. 번역의 경우도 잠시 멈추어 고민했다. 그리고 나 혼자만의 번역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공동 번역한 것으로 책을 냈다. 무엇이건 나를 알리거나 선전하는 일은 내가 의식하는 한 하지 않으려는 내 노력의 일환이다.

하지만 장벽에 부딪혔다. 내가 번역한 것이 그다지 바람직스럽지 않았다. 전문가의 영역인데 너무 쉽게 준비하지 않고 덜컥 맡았기 때문이었다. 대략 열 권 정도가 되었을 때 더 이상 번역 의뢰가 오지 않게 되었다. 그러려니 했다. 내가 실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팔 년이 지난 후에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다시 번역 의뢰가 왔다. 조금은 의외였다. 하지만 보내준 책을 읽고 번역을 해도 좋을 것 같다는 회신을 보낸 상태이다. 그러니까 중간에 대략 팔 년간의 공백이 있다.

새삼 멈춤과 침묵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도모하려는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멈춤을 요구하신다. 우리에게 그 멈춤의 시간은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에서 멈춤은 끝이 아니라 개인의 성숙을 위한 과정이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안경의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않고 하는 하나님의 일은 예외 없이 자신의 일이 된다. 그래서 주님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물론 하나님은 이제까지, 다시 말해 언제나 일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것을 언제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아버지의 일하심을 보려면 멈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멈춤이야말로 아버지의 일하심을 볼 수 있게 되는 인간의 방편이다. 멈추지 않으면 인간은 자신에게 함몰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멈춤을 요구한다.

“너희는 잠깐 손을 멈추고, 내가 하나님인 줄 알아라. 내가 뭇 나라로부터 높임을 받는다. 내가 이 땅에서 높임을 받는다.”

인간은 멈추지 않으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닫지 못한다. 물론 자신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바로 착각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멈춤은 인간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식할 수 있는 절대적인 전제조건이다.

상황이 아무리 촉박하고, 현실이 아무리 팍팍해도 그것은 인간 편에서의 조급증일 뿐이다. 하나님은 결코 조급하지 않으시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인내가 하나님의 성품임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하나님의 인내를 그리스도인 최고의 덕목으로 추구했다. 단순히 인내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내가 발효해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로소 하나님의 성품인 인내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언자가 바로 하박국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기와 불의한 상황에 대해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항의한 정도가 아니라 화를 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침묵을 배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 주가 거룩한 성전에 있다. 온 땅은 내 앞에서 잠잠하여라.”

주님이 성전에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다. 그는 불의한 상황 속에서 침묵을 배웠다. 그가 침묵하자 비로소 그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잠잠할 것을, 다시 말해 불평할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도 나의 신앙 여정에서 침묵해야 함을 배웠다. 기도에서도, 하는 일에서도, 무엇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에서도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니 절대적이다. 침묵의 시간은 유한한 인간에게 무한히 길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것을 끝으로 받아드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이 끝나 보이는 그 시간에도 일하고 계시고, 침묵을 통해 당신을 볼 수 있는 눈을 당신의 일꾼에게 열어 주신다.

인간에게 몇 십 년은 너무도 긴 시간이라 그것을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인식하게 될 수밖에 없다. 모세 역시 그랬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이스라엘의 구원은 모세의 평생소원이었다. 그는 요람에서부터 하녀인 누이와 유모였던 어머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또 들었다. 그의 마음에는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사명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학대당하는 동족을 위해 나섰고 학대하는 이집트 관원을 죽였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아직 침묵의 시간을 지나지 않았다.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무려 사십 년이라는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명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의 사명은 그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막상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가 보인 반응은 반가움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다. 그래서 그는 위와 같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한 말은 그의 사명이 오래 지연된 것에 대한 항의가 아니었다. 침묵의 기간 동안 그는 작아졌다. 왕위 서열 2위의 막강한 실력자 왕자라는 그의 모든 것이 사라지려면 사십 년이라는 인생의 절반인 긴 시간의 침묵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하나님의 침묵을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마침내 하나님 앞에서 잠잠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긴 침묵의 시간에도 감사한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내 인생의 이십여 년을 낭비했다. 낭비라는 생각은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내 자아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라는 것을 잘 안다. 이 침묵이 내게 주어진 최고의 은총이 되리라는 것을 나를 안다.

다시 번역 의뢰가 온 것은 일종의 서막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조심한다. 덥석 물지 않는다. 이 일이 주님에게서 온 것인가를 살펴보고 있다. 누군가에게 번역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무력하지 않음을 역설할 수 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잠히 기다리고 있다.

생각해보니 나는 아직도 조급하다. 인내에 대해 많이 배우고 연습했지만 여전히 미흡하다. 침묵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예배를 침묵으로 드리는 퀘이커들의 실천이 그들을 진리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런 그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대 자연과 깊은 숲의 고요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 세상은 하나님으로 충만하다. 그러나 인간의 소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모든 것을 멈추고 몸의 감각기관을 풀가동해보라. 소리가 들리고 빛이 보이고 냄새가 난다. 그것들이 세상의 강요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때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새삼 침묵이 금이라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올려짐: 2022년 11월 08일, 화 6:5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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