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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생활 에세이
 
보지 못하는 내가 이끈 역사 답사, 감탄이 쏟아졌다
[시력 잃고 알게 된 세상] 볼 수는 없지만 희망으로 떠난 여행

(서울=오마이뉴스) 김승재 기자 = '잘'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 말은 좀 모호하고 명확하지 않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말에는 진짜 진짜 멋진 철학이 들어 있다.

'잘'이란 말은 어떤 객관적 평가라기보다는 약간은 주관적 칭찬의 말이다. '잘' 한다는 건 능숙하고 훌륭하게 한다는 것임과 동시에, 올바르고 적절하게 한다는 뜻도 있다. 그래서 만족스럽고 좋아하니까 걸핏하면 자주 한다는 뜻도 된다. 억지로 하는 건 자주 하는 것일 뿐 잘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단순히 기교만 뛰어나거나, 오랜 시간 계속해서 능숙해진 것과도 다르다.

남에게서 잘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건 말하는 이의 주관적인 칭찬이다. 누구와 비교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객관적 평가 기준을 들이댄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말에는 뛰어나다는 뜻과 함께 올바르고 좋다는 뜻이 있다. 그래서 당연히 듣는 이에게 기쁨을 준다.

내가 잘한다고 느낀다면 그건 나에 대한 칭찬이고 만족이다. 그래서 자부심이 생기고 자존감이 높아진다. 그런데 남은 잘한다고 말하는데 정작 자기 자신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아주 가끔 있다.

반대로 남은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도 자기 자신은 잘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정말 무지무지 많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사람 중에서 뉴스를 많이 장식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경우를 자주 보는 것 같다.

내 생각엔 전자도 후자도 모두 진짜 잘하는 게 아니다. 진짜 잘한다는 건 남도 나도 모두 잘한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기쁨을 얻고 만족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기쁨과 보람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는 일을 한다면 누구에게나 희망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좋고,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도 좋고, 권력을 가지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기쁨과 만족, 다시 말해 보람이 있어야 했다.

아이들과 역사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겐 보람이었다. 난 내가 좋아하는 걸 열심히 할 수 있다는 데 만족했고, 내 주위에서도 그런 나를 잘한다고 칭찬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내가 보지 못한다는 건 그 아이들은 물론 부모님들에게도 그리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뜻밖의 답

그렇게 다시 희망을 되살리던 어느 봄날, 아내와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던 내게 조금은 황당한 생각이 떠올랐다.

역사는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의 옛날이야기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재밌기는 하다. 하지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온몸으로 느끼는 현장 답사에는 비할 수가 없다. 난 아주 가까운 곳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역사 답사를 하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좀 무리겠지? 혼자서는 절대 안 되고 도움이 너무 많이 필요하네."

한참 아내에게 내 생각을 설명하던 나는 제풀에 기가 꺾이고 말았다. 너무 많은 제약이 있었고, 너무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그런데 아내가 뜻밖의 답을 했다.

"그렇기는 한데, 시험 삼아 우리 쌍둥이하고 친구들 데려가 보면 어때요? 마침 쌍둥이 성당 친구들 모임도 있는데… 계획을 제대로 한번 세워 봐요. 그럼 내가 적극적으로 추진해 보죠."

선물 보따리를 잔뜩 안아 든 아이처럼 나는 신이 나서 답사 계획을 세웠다. 집 근처 남한산성이나 서울의 궁궐도 좋겠지만, 이왕 도움을 받는 김에 조금 무리해 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하루에 충청북도 단양하고 충주까지 둘러보자 이거지요? 좀 무리일 것도 같지만… 와, 이거 거의 봄 여행이네, 여행. 자기 말대로 사전 답사를 해 봐야겠네요. 이번 주 토요일 당장 가 보죠."

내 답사 계획서를 본 아내는 무척 만족해했고, 그 주 토요일 우리 부부는 때아닌 진한 데이트를 즐겼다.

사전 답사까지 다녀온 후, 제대로 발동이 걸린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쌍둥이 딸 아들과 함께 답사 계획서와 자료집을 준비했다. 자꾸 놀러 나가려는 아이들을 달래고 꼬드겨서 며칠을 조사하고 타이핑하고 프린트하고 사진을 첨부했다. 그리고 마침내 적당히 제본까지 하고 나자 정말 그럴듯한 답사 계획서와 자료집이 만들어졌다.

아이와 어른들의 감탄


▲ 나를 향한 고마운 눈과 귀, 그건 절대 사소할 수 없는 내 자부심이었고 뿌듯함이었다. ⓒ 김승재

조금은 더웠던 5월의 어느 날 이른 아침, 총 17명의 답사대가 3대의 차에 나눠 타고 단양으로 출발했다. 생각지도 못한 대규모 답사단이었다. 비록 성당의 다른 일로 모임이 있기는 했지만, 그 친구들이 모두 함께 할 줄은 몰랐다. 거기다가 교통 체증 때문에 선택한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주시겠다며 6명의 어머니와 1명의 아버지까지 함께하셨다.

아내가 모는 소나타를 타고 단양으로 달려가는 길, 조금씩 희망을 잃어가면서 나 자신을 지워가던 내가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보이지 않는다고 나까지 지워버릴 필요는 없었는데, 왜 그리 한심하게 굴었는지 정말 부끄럽단 생각뿐이었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영동고속도로를 거쳐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들자 내 희미한 시야에 부쩍 높아진 산들이 느껴졌다. 바빠진 내 가상의 눈들이 부지런히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고, 난 어느새 뒷좌석에서 장난질에 정신없는 아이들과 아내에게 동고서저의 우리나라 지형을 큰 소리로 설명하고 있었다.

"어머, 보이는구나! 그럼 그동안 못 보는 척했던 거네?"

아내가 놀렸고, 우리는 크게 웃었다.

온달산성에 도착한 아이들은 쉴 새 없이 달려드는 벌레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가파른 계단을 서로에게 뒤질세라 뛰어올랐다. 삼삼오오 무리 지은 어른들도 때 이른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히 뒤를 따랐다. 아내의 도움으로 열심히 계단을 올랐지만, 내게도 조금 벅찬 계단이 혹시나 문제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데 앞서가던 아이와 어른들의 감탄이 쏟아졌다.

내가 그곳 단양과 충주 일대를 답사지로 정한 것은, 그곳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치열한 격전지여서만이 아니었다.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그곳의 빼어난 경치도 당연히 한몫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깨와 목에 힘이 들어갔고,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일행들 곁에 서서 준비한 역사 이야기로 한껏 잘난 체를 했다.

분명 그때 내 시력은 지금보다는 조금 나았다. 얼굴을 알아보진 못했지만 사람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낮과 밤은 물론 웬만한 빛도 느낄 수 있어서 방에 불이 켜져 있는지 아닌지는 구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 불규칙한 계단은 다니기 어려웠고, 사람들이 오가는 시내 길 역시 제대로 걷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답사 여행을 다녀온 후, 내가 쓴 장문의 답사 여행기에 나는 아래와 같이 적어 놓았다.

'문득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굽이굽이 강물은 산들을 뚫고, 그 강을 따라 엇갈려 도열한 산들의 행렬은 끝이 없다.'

날 믿고 싶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이게 진짜 내가 보고 쓴 것인지 아니면 일행들이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감탄과 설명을 듣고 내 가상의 눈들이 만들어 준 이미지를 글로 표현한 것인지.


▲ 본 것일까, 그린 것일까... 나도 알 수가 없다. ⓒ 김승재

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

덥고 힘들었지만 모두가 무사히 온달 산성 안에 도착했다. 오르기가 만만치 않은 곳이어서인지, 아래 온달관광지에는 단체 관광객을 비롯해 꽤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산성 안에는 오직 우리뿐이었다. 환호 속에 여기저기를 오가는 우리들의 발소리와 또다시 터져 나오는 감탄으로 1500여 년간 잠들었던 온달산성의 정기가 깨어나는 것만 같았다. 무척 좋았다.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산성을 내려와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눈길조차 주지 않을 사지원리 방단적석유구에 들렀고, 다시 발길을 돌려 도담 삼봉을 거쳐 단양 휴게소 뒷산이 되어 버린 적성과 단양 적성비를 감상했다. 그리고 그날 유난히도 짙었던 석양과 노을을 배경으로 남한강 변 충주 탄금대에서 답사 여행을 마무리했다.

아이들은 조잘대면서도 내 앞에 모여들었고, 어른들은 정말 진지하게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줬다. 비록 여행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내가 준비한 설명은 아이들에게 그저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다름없었겠지만, 나는 그때 다시 살아난 희망을 느꼈다.


▲ 그 때의 아이가 된 웃음 소리, 보람 뒤엔 진짜 엄청난 즐거움도 따라온다. ⓒ 김승재

그해 가을, 아내와 난 다시 답사 계획서를 들고 강화도를 찾았다. 봄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답사에 도전하는 길이었다. 이번에도 모두가 함께했다.

정족산성과 전등사에서 절정을 이룬 가을 단풍 아래 시작된 답사 여행은, 초지진과 광성보 그리고 갑곶 돈대에서 힘겹고도 고달팠던 강화의 아픔을 느꼈고, 말 없는 타임머신 고인돌에서 머나먼 옛날을 엿본 후, 적석사 뒤편 낙조대에서 진한 가을 노을 아래 끝을 맺었다.

그날 나는 돌아오는 차에 오르기까지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거의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특히 강화 고인돌 앞에서 어머니들이 고인돌 덮개돌을 들고 있는 듯 모두가 그 앞에 무릎 꿇고 손을 들고 환호할 때는 마치 내가 그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코로나 대유행을 계기로 난 역사 교실을 접고 다른 일을 준비한다. 그렇다고 희망의 불꽃이 사그라진 건 아니다. 할 일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물론 어렵고 힘이 조금 들겠지만 그럼 나도 그만큼 천천히 할 거다. 이렇게 수다를 떨면서.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2년 11월 02일, 수 2:3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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