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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연예/스포츠
 
전설적인 4할 타율, 백인천을 둘러싼 오해
[김은식의 야구야] 한국프로야구 원년의 기념비, 백인천의 .412

(서울=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 =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고 하지만 위대한 선수 없이 위대한 팀이 만들어진 적도 없다. 종목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강팀과 약팀의 차이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뛰어난 선수를 보유하고 있느냐 여부다.

야구에서도 선수의 능력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기록들이 만들어지고 사용되어 왔지만, 타자라면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평가의 기준이 되는 기록은 타율이다. 타율은 한 명의 타자에게 주어진 모든 타격 기회(타석) 중에서 사사구나 희생타 등의 예외적인 상황으로 이어진 경우를 제외한, 그래서 타자가 안타를 목표로 임한 타격 기회(타수)에서 생산한 안타의 비율을 의미한다. 12번 타석에 선 타자가 2개의 볼넷을 얻고 3개의 안타를 치는 동안 7번 범타로 물러났다면 타율은 30%, 즉 3할이 되는 것이다.

야구는 흔히 '기록의 스포츠'라고 불리지만, 그 말에는 강력한 역설이 포함되어 있다. 야구는 육상이나 수영처럼 나란히 달리며 '좀 더 빨리, 좀 더 멀리'를 겨루는 종목이 아니라 서로 마주 보고 승패를 겨루는 종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좋은 기록을 세운 쪽이 아니라 더 많은 점수를 내는 쪽이 승리하며, 기록의 의미도 늘 상대적이다.

타율 역시 높고 낮음을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하지만 야구가 이백 년 가까이 발전해오는 과정에서 베이스 사이의 거리와 마운드의 높이와 스트라이크존의 범위 등을 세심하게 늘리거나 줄이면서 차근차근 만들어온 투수와 타자의 균형에 따라, 대부분의 리그에서 2할 6푼 안팎의 타율에서 평균적인 수준을 이루게 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래서 리그의 전체 평균이 그 이상으로 올라가면 '타고 투저', 그 아래로 내려가면 '투고 타저'라고 부르기도 하며, 선수들의 경우도 그 이상이면 준수한 타자, 이하면 빈약한 타자로 평가되곤 한다. 흔히 '3할'이 강타자의 기준으로 통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평균을 2할 6푼으로 보았을 때, 3할이란 평균적인 수준의 타자들보다 15% 이상 높은 안타 생산력을 가진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 감독 겸 선수 백인천 한국프로야구 역사에서 '감독 겸 선수'는 백인천이 유일하다. 그리고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른 최초의 인물도 그였다. 그는 선수로서 타격왕에 올랐고, 감독으로서도 우승을 경험했다. ⓒ 한국야구위원회

1960~70년대 한국인 최고의 타자 백인천

1960년대와 70년대를 통틀어 한국인 최고의 타자는 백인천이었다. 물론 국가대표팀의 중심타자 자리는 해방 이후 최강의 타자 자리를 20여 년간이나 지킨 '철인' 박현식에 이어 1960년대에는 박영길과 김응용, 1970년대에는 김우열과 김봉연, 김일권과 장효조 등이 지켜왔다.

하지만 그들은 고교 3학년이던 1960년에 고교야구의 국내 무대는 물론이고 일본과 대만까지 휩쓸고 다닌 끝에 1962년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스의 유니폼을 입은 백인천을 제외하고 선택된 이들이었다.

백인천은 1963년부터 일본 프로야구 1군 무대에 올라섰고, 1965년부터는 확실한 주전이 되어 팀의 거의 모든 경기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그 해 그의 타율은 .267이었고 홈런은 14개였다. 그의 성적은 꾸준히 올라서 도에이에서의 마지막 시즌이 된 1972년에는 리그 4위에 해당하는 .315의 타율에 19개의 홈런과 33개의 2루타 그리고 20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높은 타율과 많은 장타 그리고 적지 않은 도루를 성공시킨 빠른 발에 더해 강한 어깨까지 겸비한 넓은 수비 범위의 외야수. 야구 선수에게 요구되는 모든 능력이 고르게 높은, 이른바 '5툴'(five-tool. 장타력, 컨택트, 스피드, 수비, 송구 능력) 선수의 전형적인 사례가 바로 백인천이었다.

그 뒤로 몇 차례 팀을 옮기면서도 꾸준히 훌륭한 성적을 기록했는데, 특히 .319의 타율로 리그 타율 1위에 올랐던 1975년과 .340의 타율로 생애 최고 타율을 기록한 1979년은 일본에서 그의 선수 인생의 정점이었다.

1980년과 1981년, 부상과 잇따른 이적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시즌의 절반도 채 소화하지 못하는 부진에 시달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가 일본 프로야구리그에서 20년간 뛰면서 기록한 통산 .278의 높은 타율과 209 홈런, 212 도루, 283개의 2루타를 포함한 1831개의 안타는 어떤 기준에서든 정상급 선수로 평가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그에게 한국에 프로야구가 창설된 시점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만큼 적절했다. 이미 마흔에 접어든 나이에 마주한 최악의 슬럼프, 그 시점에 일본에서 더 이상의 기회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 프로야구는 '선수 생활의 마무리'를 위한 가장 빛나는 무대를 열어주었을 뿐 아니라, 그가 그 시점에 일본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좀 더 많은 경제적 보상마저 약속하고 있었다.

"너무 좋았지.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소식 듣고 막 가슴이 설레더라고. 물론 일본에 한 가지 미련이 있긴 했는데. 통산 2천 경기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 한 시즌만 더 뛰면 채울 수 있었고. 하지만 돌아오기로 했어." (백인천, 필자와 한 인터뷰에서)

1981년까지 그가 일본 프로야구 1군 무대에서 출장한 경기 수는 1969. 31경기만 더 나서면 2천 경기가 채워졌을 것이고, 만약 두 시즌 더 뛰면서 169개의 안타를 쳐냈다면 2천 안타의 대기록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가 기획하기도 전에 먼저 독자적인 프로야구단 창단을 구상하고 추진했을 만큼 프로야구 창설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MBC가 먼저 감독직을 제안했고, 선수로서도 좀 더 뛰고 싶었던 백인천과 감독 연봉만으로 일본 시절 받던 만큼의 몸값을 채워주기는 난감해하던 MBC 사이를 이용일 KBO 사무총장이 중재하는 과정에서 '감독 겸 선수' 아이디어가 채택됐다.

감독 겸 선수로 뛰고, 감독 연봉과 선수 연봉을 합쳐서 일본 시절보다 나은 대우를 보장하는 방식이었다. 선수와 감독으로서의 계약금과 연봉을 합해 1982년 백인천이 받은 몸값은 무려 6천만 원에 달했다. 유일한 특급선수 박철순보다도 1600만 원이나 많은 돈이었다.


▲ CF 스타 백인천 백인천은 한국프로야구 초기 광고 모델 중 한 명이었다. 1982년 제약사 유한양행의 영양제 광고 모델로 나선 그는 동시대 국가대표급 선수들의 연봉에 육박하는 2천만 원의 모델료를 받기도 했다. ⓒ 유한양행

한국 프로야구의 유일무이한 감독 겸 선수

20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의 첫선 그리고 선수 생활의 멋진 마무리를 위해 겨울 동안 지난 어느 해보다도 많은 땀을 흘리며 착실하게 준비한, 당대 유일의 20년 프로 경력자 백인천에게는 별다른 적응기도 필요 없었다. 3월 27일 삼성과의 역사적인 개막전부터 안타와 홈런을 선보였고, OB 베어스와 만난 그다음 날 경기에서도 또 한 명의 프로 경력자 박철순과의 맞대결에서 2루타를 뽑아내며 한 수 위의 노련함을 과시했다.

4월까지 첫 15 경기에서 3개의 홈런과 13개의 타점을 때려낸 것을 포함해 무려 .432의 타율을 기록해 4 홈런의 김우열이 앞서나간 홈런 부문을 제외한 공격 전 부문에서 선두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기 수가 늘어나면서 경쟁자들의 타율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5월에도 변함없는 페이스를 유지하며 5월 말까지도 .422의 유일한 4할 타자로 남아 독주하기 시작했다. 전기리그 40 경기를 모두 소화한 시점에서도 그의 타율은 .411. 2위 김봉연과는 약 2푼의 차이였다.

전기리그에서 MBC는 3위에 머물렀는데, 빈약한 마운드가 문제였다. 에이스 하기룡이 제 몫을 했지만 베테랑 이길환과 정순명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OB의 특급 영입선수 박철순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위력을 발휘하며 상대적으로 MBC의 기를 눌렀기 때문이다. 당초 삼성에 이은 2위 전력으로 평가받던 MBC는 전기리그에서 박철순과의 맞대결에서만 3패를 당하며 한 수 아래로 평가했던 OB에 추월당했다.

하지만 오히려 OB보다 더 강할 것으로 예상했던 롯데나 선수층은 얇지만 주전의 경력이 화려해 복병으로 평가받던 해태에 비해 한발 앞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타격의 힘이었다. 리그의 유일한 4할 타자 백인천에 이어 이종도가 3할대 후반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함께 강력한 타선을 이끈 덕분이었다.

후기리그에서도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4월 말에 군에서 제대하고 합류한 이광은이 3루수와 3번 타순에 투입되면서 공격은 더욱 강화되었고 에이스 하기룡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나머지 투수들은 한결같이 아마추어 시절의 명성에 어울리는 활약을 좀처럼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난감한 상황에서 가장 힘들어지는 것은 물론 감독이다. 감독 백인천은 에이스 하기룡을 선발보다는 '전천후'로 활용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나머지 투수들이 짧은 이닝도 제대로 못 버텨 큰 소득은 얻지 못했다.

그런 스트레스를 짊어지고도 타자 백인천의 위력은 점점 더 커졌다. 꾸준히 4할 1푼대의 고타율을 유지하는 가운데 후기리그 중반쯤에는 홈런은 김봉연, 타점은 김성한과 경쟁하며 타격 3관왕을 가시권에 두기 시작했다.

후기리그 21 경기를 소화한 8월 23일까지 백인천은 .419의 타율로 2위 윤동균을 무려 5푼5리 차이로 따돌리며 타격왕 타이틀을 거의 확정 짓는 동시에 14개의 홈런으로 김봉연과 함께 공동 선두에 올랐고, 타점도 김성한에 5개 뒤진 52개로 부문 2위에 올라 있었다.

몰수경기와 함께 날아간 3관왕의 꿈

하지만 은근히 무르익어가던 타격 3관왕의 꿈은 엉뚱한 사건으로 깨져버리고 만다. 8월 26일 후기리그 24번째 경기로 치러진 삼성과의 대구 경기에서 4회 말에 중전안타를 치고 나갔던 삼성의 2번 타자 배대웅이 3번 정현발의 유격수 앞 땅볼 때 병살을 막아보기 위해 MBC 2루수 김인식을 향해 발을 높이 들고 들어가는 위험한 슬라이딩을 감행했고, 화가 난 김인식이 배대웅의 뺨을 때리자 2루심 박명훈이 김인식에게 퇴장 명령을 내린 것이 발단이었다.

"배대웅하고는 오랜 친구죠. 국가대표 팀에서도 오랫동안 손발을 맞춘 사이고. 그런데 2루에서 뒤엉키다 보니까 화도 났지만, 일종의 쇼맨십으로 얼굴에 손을 댔는데, 배대웅 선수하고는 곧바로 웃으면서 넘어갔거든요. 그런데 심판은 그걸 폭력 사태로 보고 퇴장 명령을 내렸어요." (김인식, 필자와 한 인터뷰에서)

감독 백인천은 더그아웃을 박차고 달려 나와 강력하게 항의했다. 퇴장 명령을 내려야 한다면, 먼저 위험한 플레이를 한 배대웅도 함께 퇴장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주심 김동앙이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자 백인천 감독은 선수들을 모두 더그아웃으로 철수시킨 채 경기를 거부했고, 주심은 5분간 기다린 뒤 '몰수 게임'을 선언하고 말았다. 프로야구 창설 이후 최초의 몰수게임으로 기록된 사건이다.


▲ 백인천의 시구 백인천 전 감독이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19 WBSC 프리미어12 예선라운드 C조 한국과 호주의 경기 전에 시구를 한 뒤 포수 양의지와 악수하고 있다. 백인천 역시 1960년대 한국 최고의 명포수로 이름을 날린 적이 있었다. ⓒ 한국야구위원회

그 사건에 대한 처벌로서 MBC 청룡은 그날 경기의 1패와 함께 벌금 200만 원을 부과받았고, 백인천 감독은 별도로 벌금 100만 원과 5경기 출전 금지 조치를 받게 됐다. 사건의 당사자 김인식 선수도 벌금 10만 원, 주심 김동앙과 2루심 박명훈 역시 경기 운영 미숙의 책임을 물어 20만 원과 10만 원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80경기 중 5경기의 의미는 컸다. 특히 백인천이 출전하지 못하게 된 5경기 중 3경기는 이미 투수진이 초토화된 최하위 팀 삼미 슈퍼스타즈였다. 안타깝지만 그 시점에서 삼미와의 경기는 나머지 5개 구단 타자들에게 개인 기록을 한껏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로 통하고 있었다.

결국 시즌을 모두 마쳤을 때 백인천은 .264에 불과했던 그해 리그 전체의 평균 타율 대비 무려 1할4푼8리나 높은 .412의 역사적인 타율로 타격왕 타이틀을 획득한 가운데 홈런은 19개로 김봉연의 22개에 이은 2위, 타점도 64개로 김성한의 69개에 이은 2위에 올랐다.

당시에 별도로 시상하지 않던 득점, 안타 수, 2루타 수도 모두 1위였고, 심지어 도루도 각 팀의 1, 2번 타자들이 포진한 10위권 선수들에 비해 3개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11개에 달했다.

감독의 권한을 활용해 관리된 기록?

한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그리고 전 세계를 통틀어도 테드 윌리엄스가 1941년에 달성한 이후 유일하게 작성된 백인천의 4할 타율에 대해 '감독의 지위를 활용해서 만든 것'이라는 오해는 아직도 간혹 눈에 띈다.

하지만 감독의 지위를 활용해서 타율을 관리할 방법이란 '고타율을 달성한 이후 나머지 타석을 쉬게 하는 것'과 '약한 팀과의 경기에 집중적으로 기용하는 것' 말고는 상상하기 어려우며, 그 두 가지 모두 감독 백인천이 택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점은 쉽게 드러난다. 그 해 그가 타석에 서지 않은 8경기 중 5경기는 강제로 부과된 징계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중 3경기가 역사적인 약체팀 삼미와의 경기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그렇다.

또 감독 백인천으로서 최강의 타자 백인천을 아끼고 말고 할 여유가 없을 만큼 MBC 청룡의 성적은 애매했거나 미흡했다는 점 그리고 순전히 '타자 백인천'에게만 집중해서 볼 때도 오직 타율을 높이기 위해 짧은 스윙을 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점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집계하지도 않았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수치들을 불러온다면, 그 해 그의 출루율 .502(희생 플라이를 제외하지 않는 오늘날의 집계 방식으로는 .497)와 장타율 .740은 모두 1위였을 뿐 아니라 오랜 기간 역대 최고 기록의 자리를 지켰던 '역대급' 기록에 해당한다. 그 두 가지를 합쳐서 산출하는, 오늘날 타자의 생산력을 표현하는 가장 신뢰도 높은 기록으로 통하는 OPS(On-Base plus Slugging)는 무려 1.237로 그것 역시 2015년의 에릭 테임즈 외의 누구도 아직 이르지 못한 기록이다.

대기록의 뒷면 그리고 더 깊은 면

프로 원년, 갑작스러운 창설과 세계야구선수권대회까지 겹치면서 선수층의 부족은 피해 갈 수 없는 문제였고, 그것은 몇 가지 '말도 안 되는' 대기록이 수립되는 배경으로 작용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한 2, 3년쯤 차분히 시간을 두고 실업에서 프로로 전환된 것이었다면? 그래서 경기 수도 최소한 100 경기쯤 되는 시즌이었다면? 혹은 세계선수권대회와 겹치지 않아서 명실상부 정상급 선수들이 모두 함께 참여한 리그였다면? 그런 '정상적인' 상황이었다고 해도 백인천은 과연 4할 타율을 기록할 수 있었을까?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백인천이 일본 프로야구에서 타격왕을 차지하던 7년 전이었다면? 혹은 일본 무대에서 생애 최고타율을 기록했던 3년 전이었다면? 게다가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겸비한 일류 수비수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고, 굳이 감독이라는 부담까지 질 필요가 없었던 좀 더 젊은 시절이었다면? 그때의 백인천이 기록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말도 안 되는' 기록이 어떤 종류 어느 정도의 것이었는지도 역시 여러 갈래로 상상해볼 수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통해 한국인 최고의 타자였던 백인천은 그 기념비를 1982년의 한국프로야구사에 세워놓았고, 그것은 지난 40년간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수많은 후배 타자들이 바라보며 도전하는 목표선이 되었다.

그 내막을 파고들면 기록의 빈틈도 분명히 보이겠지만, 좀 더 파고들면 미처 드러나지 않은 위대함 또한 함께 딸려 나올 것이다. 좋건 싫건, 기록이란 원래 그런 것이고 그런 쓸모를 가진 것이며 그런 가치를 가진 것이다.


▲ 4할 타자 백인천 감독. 백인천에 대한 팬들의 평가는 꽤 크게 엇갈린다. LG의 첫 우승을 이끌고 삼성에서 성공적인 리빌딩의 사례를 보여준 반면 롯데에서는 구단과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마찰하며 적지 않은 오류를 낳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수 백인천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논쟁의 여지가 크지 않은 편이다. 그는 60, 70년대 한국인 최고의 타자였으며 한국야구사 역대 최고의 타자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 김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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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짐: 2022년 8월 22일, 월 4:21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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