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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경제
 
교회 재산 일본에 바친 목사... 한국 정부는 상 줬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응순


▲ 뉴스타파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인사 4천 3백여 명을 대상으로 이들이 해방 후 대한민국의 교육 분야에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 조사했다. ⓒ 뉴스타파

(서울=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 부처님을 팔아 친일한 승려도 있었다. 지금의 서울 강남구 봉은사에서 범종 등을 수집해 일본군에 헌납한 봉은사 주지 홍태욱이 그중 하나였다. 종교만 다를 뿐, 홍태욱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기독교 목사들도 있었다. 교회 재산을 마치 자기 재산처럼 일본에 바친 인천 보합교회 김응순 목사가 그중 1인이다.

기독교 내부 친일 세력은 교인 1인당 1원씩 일왕(천황)에게 헌금하는 운동을 벌였을 뿐 아니라 교회 시설을 뜯어 일본에 바치기까지 했다. 류대영 한동대 교수가 저술한 <한 권으로 읽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1941년 총회 보고에 의하면 한 해 동안 놋그릇 2165점과 교회종 1540개를 헌납했다"라며 "그해 장로교 교회 총수가 2543곳이었으므로 60% 이상의 교회가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해 종을 제공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장로교만 그랬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감리교를 비롯한 여타 교단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위 책은 "국민총력감리회연맹은 예배당과 교회시설을 비상시국 관련 집회·피난소·특별작업장으로 제공하고 철문과 철책을 헌납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통리자 정춘수는 1942년 2월 각 교구장에게 공문을 보내 성전(聖戰) 완수를 위해 교회종도 헌납할 것을 요구"했다고도 말한다.

단순히 전쟁 헌금을 갖다 바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교회 철문과 철책을 뜯고 교회종도 떼어다 바쳤다. 그것도 단순한 국가가 아니라, 이교를 숭배하는 국가를 위해 그렇게 했다. 일왕을 신으로 모시는 일제를 위해 교회종까지 뜯어다 바쳤다는 것은 기독교 친일 세력이 최소한의 금기사항마저 지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런 행위에 앞장선 대표적 인물이 김응순이다. 위 책은 "부일 협력은 교단의 지도자나 유명인사가 주도했다"고 한 뒤 "장로교의 김응순·김관식·채필근·백낙준·신흥우·류형순" 등을 열거한다. 김응순은 오늘날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제 말기에는 저명한 친일파였다.

친일파의 길에 들어선 목사

김응순은 1891년 10월 17일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황해남도에서 서해안 쪽에 치우진 장연군이 그의 고향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은 1910년 국권침탈 직후였다. 이 해에 중학교 급인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부터 고향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나 그는 10년을 채우지 못했다. 3·1운동 이듬해에 체포됐기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은 "1920년 7월 사립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대한적십자사 청년의용단 단원으로 단원 모집과 군자금 모집, 독립신문 배포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됐다면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상고했으나 1920년 11월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복역했다"고 설명한다.

운동단체에 가담하는 정도가 아니라 조직원과 군자금 모집 등에도 나섰다. 상당히 적극적으로 운동을 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 지도자로도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석방된 뒤 새로 선택한 직업 역시 가르치는 일이었으나 영역이 달라졌다. 1923년부터 고향에서 전도사 활동을 하던 그는 1927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황해도 봉산군 흥수원교회가 그의 부임지였다. 36세 때 교회 담임목사로 변신했던 것이다. 독립운동하던 사람이 목사가 되었으니, 수감 기간에 심경 변화가 상당했으리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는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독립운동을 겸했다. 그런데 목사로서 신도들을 이끌 때는 독립운동이 아닌 친일을 겸했다. 45세 때인 1936년에 황해도 해주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옮겨가고 이듬해 황해도 교회들을 책임지는 황해노회장이 된 그는 이런 위상을 발판으로 1939년부터 본격적인 친일파의 길에 들어섰다.

일제가 한국인들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고자 1938년 7월에 만든 기구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고, 1940년 10월부터 이를 계승한 것이 국민총력조선연맹이다. 김응순은 이 기구의 장로회연맹에서 활동했다.

1942년 10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된 뒤에는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이사장도 겸했다. 장로교 지도자가 되어 친일의 최일선에 나서게 됐던 것이다. 독립운동 시절에 표출됐던 운동 지도자 기질이 친일 분야에서 발현된 것으로 보인다.

재산과 교인에 이어 교단도 일본에 바쳐


▲ 친일반민족규명위 결정보고서 ⓒ 친일반민족규명위

그의 친일 행위에서 인상적인 것은 신도들의 헌금을 모아 헌신적으로 바쳤다는 점이다. 그는 '일왕(천황)에게 감사를 표하세요'라며 한국 민중의 호주머니를 겨냥하는 목사였다.

그는 교회 재산을 일본에 바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친일인명사전>에 정리된 바에 따르면, 장로회 차원에서 해군 군용기 헌납 운동에 참여한 그는 1942년 9월 20일 '장로회 헌납 해군기 명명식'에 참석했다.

2개월 뒤인 11월 12일에는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이사장으로서 총회연맹 주최로 '황군 환자용 자동차 3대 헌납식을 갖고" 서울 남산 중턱의 조선신궁에 가서 참배했다. 김응순은 일본 신도의 전형적인 신자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1943년에는 일제를 위한 '금 모으기' 운동을 교단 차원에서 전개했다. "같은 해 4월 총회연맹 이사장으로서 각 노회연맹 이사장에게 공문을 보내 귀금속 헌납을 독려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그는 물질만 바친 게 아니었다. 교인들까지 바치고자 했다. 교인 청년들이 침략전쟁에 참여할 것도 독려했다. 1943년 3월, 징병제도를 홍보할 목적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여자대표자 연성회를 열었다. 이 행사에서 총회장 자격으로 훈사를 했다.

재산과 교인에 이어 바친 것이 더 있었다. 그는 아예 교단 자체를 일본에 바쳤다. 일본의 요구에 따른 것이기는 했지만, 1943년 4월 임시총회를 소집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해산하고 교단을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편입시켰다. 일제의 강요에 의해 여타 기독교 교단에서 일어난 이 일을 그는 예수교 장로회에서 주도적으로 전개했다.

강요가 있었다는 것이 친일 죄과를 없애줄 수는 없었다. 식민 지배하에서 일제의 강요에 정면으로 맞선 사람들도 있었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현직을 버리고 물러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응순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일제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다.

1993년 대한민국은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황해도를 기반으로 하던 그의 무대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 남한으로 옮겨졌다. 해방 뒤 이북에서 기독교연맹 부위원장을 했던 그는 전쟁 발발 7개월 뒤인 1951년 1월 월남해 인천에 정착했다. 1950년 10월에 평양을 점령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북·중 연합군에 밀려 남하하던 시기에 그도 고향 인근의 인천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그는 남한 땅에서 매우 신속하게 자리를 잡았다. 남한 좌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이북 출신 기독교 지도자들을 환대하고 물질적으로 지원했던 미국의 영향력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더욱 강해진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남한 정착 얼마 뒤에 교회를 세우게 됐다.

인천 보합교회 홈페이지의 '교회 소개'란은 "초대 목사 김응순 목사를 중심으로 황해노회 보합교회(1952.10.17)로 정식 설립하다"라고 말한다. 남한에 정착한 이듬해에 교회를 세우게 됐다. 그에 더해 인천소년교도소 교무과장도 맡게 됐다. 남한 정부와의 인연도 갖게 됐던 것이다.

그 뒤 그는 예전 직업도 되찾았다. 독립운동이 발각돼 그만뒀던 교육자 위치를 남한에서 회복했다. 인천에 보합공민학교와 보합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했다. 보합교회 목사를 하면서 학교 운영을 겸했던 것이다.

교회에 이어 학교를 두 개나 설립했다는 것은 그의 물질적 기반이 남한에서도 공고했음을 보여준다. 여타 친일파들과 마찬가지로, 해방은 그의 물질적 생활에 타격을 주지 않았다.

그의 친일 행위로 장로교 교단의 재산은 줄었지만 그는 그런 손실을 겪지 않았다. 도리어 남한에 내려와 종교 분야에 이어 교육 분야로도 영역을 확대했다. 한국전쟁과 더불어 8·15 해방이 그에게 득이 됐으면 됐지 실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사후에도 영예를 누렸다. 그 영광은 천국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계속됐다. 1958년 1월 6일 사망한 그를 향해 1993년에 대한민국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 애족장은 2010년에 취소됐지만, 독립운동 때문에 감옥에 가고 교사직을 잃은 뒤로, 신학교에 가고 목사가 되면서 친일파로 전향한 그의 인생을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칭송을 해주었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2년 8월 09일, 화 9:5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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