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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신살 뻗친 두 번의 야구 참사, 그 뒤 엄청난 반전이
[김은식의 야구야]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과 한국 야구의 부흥


▲ 2006년 12월 6일 도하 알 라이얀 야구장에서 열린 2006 도하 아시안게임 야구 한국-중국전에서 한국이 7회 12-2 콜드게임으로 승리하며 동메달을 획득한 뒤 선수들이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 연합뉴스

(서울=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 =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성공 이후 다시 한동안 한국 야구는 침체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의 여파에 2002년 월드컵의 파편까지 맞으며 국내 리그의 흥행이 뒷걸음질 쳤고, 국제대회에서의 불운도 겹쳤다. 2004년에는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지역 예선을 대신한 2003년 삿포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일본과 대만에 패해 3위로 주저앉으며 올림픽 본선 출전이 무산됐다.

또 2006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는 그 해 각각 투수와 타자 삼관왕에 오른 류현진과 이대호를 중심으로 프로 최고의 스타들을 대거 파견하고도 대만과 프로선수가 포함되지 않은 일본에 또다시 지면서 3위에 머무는 망신을 당했다. 각각 삿포로의 참사, 도하의 참사라 불리는 사건이다.

삿포로와 도하의 '참사', 낮아진 기대치

그래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기대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삿포로와 도하에서 한국을 연파했던 대만은 물론 그때 상대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일본을 만나야 하고, 메이저리거를 제외해도 여전히 우승 후보인 미국이나 정식 대회에서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절대강자 쿠바와도 대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을 겸한 2007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일본에 우승을 내주며 본선 직행에 실패하고 각 지역 2, 3위 팀들이 모여 최종예선을 치른 끝에 캐나다에 이은 2위로 본선 출전권을 따낸 것도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요소였다.

하지만 막상 본선이 시작되자 한국팀은 풀리그 7경기를 모두 승리하며 조금씩 기대감을 쌓아 올렸다. 미국과의 첫 경기에서 치열한 타격전 와중에 마무리 한기주가 9회 초에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하면서 3실점 해 역전을 허용하는 고비를 맞기도 했지만 정근우와 이종욱의 수훈으로 9회 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것이 시작이었다.


▲ 2008년 8월 16일 김광현이 베이징 우커송 야구장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야구 예선 한국과 일본과의 경기에서 선발 등판하여 역투하고 있다. 프로 2년차 왼손 투수 김광현은 2008 베이징올림픽을 통해 이선희와 구대성을 잇는 새로운 일본 킬러로 등극했다. ⓒ 유성호

낙승을 예상했던 중국과 캐나다를 상대로 의외로 고전하며 불안감이 살아났지만, 걱정했던 일본전은 오히려 새로운 일본 킬러 김광현의 등장과 이대호의 홈런, 그리고 좌투수 상대로 좌타자 김현수를 대타로 기용하는 통념을 깨는 한 수로 의표를 찔러 결승점을 뽑아내 승리하며 기세를 올렸다.

그 뒤 다시 대만에 9대 8의 한 점 차 살얼음판 같은 승리를 거두며 결선리그 진출을 확정지은 뒤, 공포의 대상 쿠바와의 예선 마지막 경기는 부담 없이 임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그 경기에서 큰 기대 없이 내보낸 선발투수 송승준이 뜻밖에 7회 1사까지 3실점으로 막아내는 사이 4회 말 2사 만루의 기회에서 강민호와 고영민의 안타가 이어지고 이용규의 땅볼 타구를 잡은 투수의 악송구까지 나오면서 5점을 얻어내며 전세를 뒤집었다. 이후 적시타를 주고받았지만 결국 7대 4로 승리.

물론 서로 4강 진출을 확정지은 상태에서의 큰 의미 없는 승부였다고는 하지만, 쿠바 상대 공식경기 최초의 승리이며 예선리그 1위를 확정 짓는 승리였다는 점에서 선수단에 부여되는 의미는 작지 않았다.

쿠바전 첫 승리, 유쾌한 결선행

예선리그 1위부터 4위까지를 차지한 한국, 쿠바, 미국, 일본이 진출한 결선리그는 8년 전 시드니 올림픽 때와 똑같은 구성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준결승전의 파트너가 바뀌었는데, 한국은 일본을, 쿠바는 미국을 만났다.

일본과의 준결승전 선발은 다시 한번 김광현이었고, 김광현은 이번에도 호투했다. 1회에 실책이 겹치며 먼저 1점을 내준 뒤 3회에도 폭투를 범하며 다시 1점을 허용해 0대 2까지 밀렸지만, 이후 8회 초 수비를 마무리할 때까지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버텨냈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최종전에서 1회 초에 먼저 2점을 내준 뒤 마지막까지 무실점으로 버텨냈던 스무 살의 선동열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두산 이종욱의 발을 잡는 동작으로 비난을 받았던 정근우는 2008 올림픽 한일전에서 결정적인 홈슬라이딩을 성공시키며 '발근우'라는 멸칭의 의미를 반전시켰다. 그의 슬라이딩은 한대화와 이승엽의 홈런, 김재박의 번트, 이진영의 다이빙캐치와 더불어 한국 야구의 국제대회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플레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 유성호

그 사이 4회 말에는 이용규와 김현수의 안타를 묶어 한 점을 만회했고, 7회에는 이진영의 안타에 2루 주자 정근우가 홈을 파고들며 동점을 만들었다. 특히 그 순간 정근우는 위험한 타이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포수의 영역을 정확히 우회하면서 발끝으로 홈플레이트를 훑어내는 기술적인 홈슬라이딩으로 '발근우'라는 멸칭을 단번에 찬사로 뒤집는 묘기를 연출했다.

그렇게 2대 2로 팽팽하게 맞선 채 시작된 8회 말, 안타를 치고 나간 이용규를 1루에 둔 채 그 대회 내내 1할대의 빈타에 허덕이던 4번 타자 이승엽이 타석에 섰다. 시리즈 내내 헛방망이를 돌리던 이승엽 앞에 놓인 경기 후반의 결정적인 기회. 한국야구의 첫 올림픽 메달을 수확한 2000년 시드니에서 일본과의 3~4위전 8회 말에 그랬고, 삼성 라이온즈의 첫 역사를 만든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때도 그랬던 것과 같은 상황이 왔다.


▲ 2008년 8월 22일 한국의 이승엽이 베이징 우커송 야구장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야구 준결승 일본과의 경기에서 8회말 1사 1루 타석때 역전 2점 홈런을 친뒤 그라운드를 돌며 환호하고 있다. 이승엽은 한국 야구사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친 타자이기도 하지만 가장 극적인 홈런을 많이 친 타자이기도 하다. 팬들의 기억 속에서 두 번의 올림픽과 한 번의 한국시리즈 속 상황이 종종 혼동되는 것은 대부분 '시리즈 내내 부진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이승엽이 터뜨린 홈런'이 거짓말처럼 반복됐기 때문이다. 시드니에서 .179였던 이승엽의 타율은 베이징에서도 .167에 불과했다(2002년 한국시리즈 때는 .148이었다). ⓒ 유성호

그날도 삼진과 병살타로 부진했던 이승엽은 어김없이 일본의 좌완투수 이와세의 몸쪽 공을 부드럽게 걷어 올렸고, 그렇게 날아오른 공은 베이징 우커송 야구장의 오른쪽 펜스를 넘기는 2점 홈런으로 다시 한번 '약속'을 실현했다.

그리고 뒤를 이은 김동주의 안타에 이어 고영민이 좌측 외야로 큰 타구를 띄웠을 때 심리적으로 무너진 일본 외야수 G.G.사토의 수비가 겹치고 강민호의 중견수 키를 넘기는 2루타까지 이어지며 보탠 2점은 쐐기가 됐다. 6대 2, 한국의 결승전 진출.

되풀이된, 바닥을 친 이승엽의 결정적 한 방

쿠바와의 결승전은 역설적이게도 많은 팬들이 편한 마음으로 지켜본 한 판이었다. 한 편으로는 이미 최소한 사상 최초가 될 은메달을 확정 지어 놓은 상황에 포만감을 느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쿠바를 이겨서 금메달을 딴다는 것까지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미리 마음을 접어두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선리그에서 사상 첫 쿠바전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그건 어쨌거나 이미 두 팀 모두 4강 진출을 확정해놓은 상태에서의, 굳이 서로 무리할 필요 없는 승부였다. 1970년대 이래 쿠바는 만나면 늘 지는 상대였고, 져도 두 자릿수 점수 차이로 크게 일방적으로 지는 상대였고, 그래서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이 느껴지게 하는 상대였다.

오죽하면 연세대 시절 자그마한 체구에도 잘 맞히고, 멀리 치고, 잘 뛰고, 심지어 잘 던지기까지 하는 대학리그 최고의 선수 박재홍에게 '마치 쿠바 선수처럼 잘한다'는 의미로 '리틀 쿠바'라는 별명을 붙였을 정도였다. 그런 쿠바와의 진검승부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그 시점의 한국 야구인과 야구팬들에게는 상상하는 것만 해도 좀 버거웠다.

하지만 기세를 올라타면 점점 강해져서 능력치 이상을 이루어내곤 하는 것이 한국팀의 전통적인 강점. 오히려 더 부담 없이 가벼운 기분으로 경기에 임한 한국대표팀 선수들은 유난히 몸이 가벼웠다. 1회 초 시작하자마자 늘 잘했던 이용규의 안타와 내내 부진하다가 일본과의 준결승전에 날린 결정적 홈런으로 부담을 털어낸 이승엽의 홈런이 이어지며 두 점을 선취했고, 7회에도 이용규의 2루타에 힘입어 한 점을 추가했다.

하지만 쿠바도 1회 말과 7회 말, 실점 직후 곧바로 솔로 홈런 한 방씩을 날려 바짝 따라붙는 강팀의 면모를 과시하며 3대 2의 팽팽한 승부가 이어졌다. 그리고 운명의 9회 말. 단 2실점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끌고 온 선발투수 류현진의 체력이 고갈되고 주심의 석연치 않은 개입이 더해지면서 위기 상황이 연출되었다.

쿠바 선두 2번 올리베라가 좌전 안타를 친 뒤 3번 엔리케스의 번트로 2루까지 진루했다. 2루 주자를 들여보내면 동점이 되지만 타자를 내보내면 역전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

류현진은 4번 타자 세페다를 회피할 필요가 없었지만, 마지막 집중력을 끌어모아 스트라이크존 구석으로 정교하게 제구한 공들이 잇따라 볼로 판정되면서 1루가 채워졌다. 그리고 반드시 승부를 해서 결과를 만들어야 했던 다음 5번 알렉세이 벨의 타석에서마저 회심의 승부구들이 계속 볼로 판정되었고, 결국 볼넷이 허용되며 1사 만루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게 됐다.


▲ 2008년 8월 23일 한국야구대표팀의 강민호가 베이징 우커송 야구장에서 열린 올림픽야구 결승전 쿠바와의 경기에서 9회말 1사 1,2루 알렉시스 벨 타석때 제대로 스트라이크를 잡아주지 않아 주심에게 항의하고 있다. ⓒ 유성호

더구나 벨에게 던진 마지막 공이 볼로 판정되던 순간, 경기 내내 유지되던 스트라이크존이 갑자기 좁아졌다고 느낀 포수 강민호가 몸을 돌려 의문을 표시하자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주심 카를로스 레이 코토는 단호하게 퇴장 명령을 내리며 한국팀을 더욱 몰아붙였다. 강민호가 미트를 두 번이나 팽개치며 격하게 항의했지만, 불어나는 것은 사흘 뒤 통보된 벌금 액수뿐이었다.

김경문 감독은 어쩔 수 없이 부상 때문에 뛸 수 없었던 베테랑 진갑용에게 마스크를 씌워 내보냈고, 투수 역시 선수단에서 가장 안정된 제구력을 가진 전 시즌 우승팀 SK 와이번스의 마무리투수 정대현으로 교체했다. 짧은 안타 하나만으로도 역전 끝내기 점수가 만들어질 수 있는 아찔한 순간. 게다가 내내 앞서왔던 경기를 마지막에 내줄 위기 상황에 주전 포수의 퇴장까지 목격하며 흔들린 선수들의 심적 상태.

이미 올림픽에서도 정식종목으로 치러진 세 번의 대회에서 모두 결승전에 올라 모두 승리하며 금메달 3개를 가져갔던 쿠바는 여유가 있었고, 사상 첫 금메달 도전이 마지막 순간 물거품이 될 위기에 몰린 한국은 극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바뀐 투수 정대현의 얼굴에는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고, 쿠바의 전설적인 강타자 율리에스키 구리엘을 상대로 무덤덤하게 스트라이크 두 개를 연달아 던졌다. 좁아지던 주심 역시 트집 잡기 어려운, 하지만 천하의 구리엘이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게끔 낮게 깔려오는 낯선 궤적의 언더핸드 싱커.

그리고 역시 피할 수 없는 위기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은 단순한 정면 승부라는 듯, 가운데 낮은 쪽으로 찔러 넣은 세 번째 스트라이크는 구리엘이 건드릴 수밖에 없었고, 정대현이 의도한 그대로 그 타구는 유격수 박진만의 글러브에서 시작해 2루수 고영민과 1루수 이승엽에게 이어지는 병살타가 되고 말았다. 극적인 한 점 차 승리로 얻어낸, 한국 야구의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 2008년 8월 23일 한국야구대표팀 선수들이 베이징 우커송 야구장에서 열린 올림픽야구 결승전 쿠바와의 경기에서 3대2로 승리한 뒤 그라운드로 뛰어나와 자축하고 있다. ⓒ 유성호

올림픽 금메달, 특별한 울림

올림픽이란 한국인에게 특별한 울림을 가지는 단어다. 나라가 없던 시절 금메달을 딴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에 얽힌 소동을 겪으며 '나라'를 생각하게 했고, 88 서울 올림픽 유치 결정 장면이 수백 번 되풀이 재방송되는 것을 보면서 '바덴바덴'이라는 독일의 작은 도시와 '쎄울, 코레아'라는 발음을 기억하게 했다.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에는 정치 경제 문화 등등 모든 부문의 뉴스들이 단신 처리됐고, 메달을 다투는 한국 선수들의 경기 장면이 방송될 때는 대입 시험을 앞둔 고 3 교실의 시청각교육용 TV도 잠시 달리 활용되곤 했다.

심지어 산업화 시대에는 올림픽이나 IOC와 아무 관계도 없는 '월드 스킬(world skill)'이라는 국제 기술경연대회에 자의적으로 '기능올림픽'이라는 이름을 붙여 전국의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의 메달 획득 의지에 불을 붙이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올림픽은 '국가'라는 추상적인 단어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시간이었고, 동시에 각자의 영역에서 '세계 최고'라는 상징적인 단어를 꿈속으로 품게 하는 공간이었다.

그런 올림픽에서, 일본과 쿠바의 최정예 대표팀을 상대로 두 번씩이나 완승을 거두며 얻어낸 금메달이란 한국야구가 세계를 제패했다는 표현에 어떤 부연 설명도 필요 없게 만드는 일이었고, 야구를 하고 보고 즐기는 일에 거리낌 없는 자부심을 심어주는 사건이었다.

그런 배경에서 2008년 올림픽 금메달은 '베이징 세대'라는 표현을 낳을 정도의 광범위한 영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IMF 경제위기의 여파로 침체기를 겪기 시작한 뒤로 좀처럼 반전의 계기를 만들지 못한 한국 야구의 강력한 반격이었고, 야구에 대한 특별한 감정 없이 자라온 젊은 세대와 여성들까지 야구장으로 이끌어 들인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2008년 8월 23일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한국 야구대표팀 선수들이 목에 금메달을 걸고 시상대 위에 섰다. ⓒ 유성호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패포 금지)
 
 

올려짐: 2022년 8월 09일, 화 4:3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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