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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연예/스포츠
 
9회말 대역전, 신화가 탄생하던 순간
[김은식의 야구야] 군산상고의 황금사자기 우승과 고교야구의 전국화

(서울=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 = 1972년 7월 19일 밤 동대문의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부산고와 군산상고가 만났다.

당시 부산고는 1962년 청룡기 대회에서 한 번 우승했을 뿐이었지만 1963년 청룡기, 1965년과 1966년 황금사자기, 1971년 대통령기 대회에서 준우승하며 부산 지역 내에서 경남고의 아성에 도전하는 신흥 강호였다.

1968년에 창단한 신생팀 군산상고는 한 해 전인 1971년 전국체전에서 우승한 적이 있긴 했지만 이른바 '4대 전국대회'(청룡기, 황금사자기, 대통령배, 봉황기) 결승 진출은 처음이었다.


▲ 고교야구의 폭발적 성장 1980년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본선 경기에 입장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 ⓒ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홈페이지

준준결승과 준결승에서 전통의 강호 인천고와 경남고를 꺾고 올라온 군산상고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지만, 전년도 4대 대회를 모두 휩쓴 경북고를 준준결승에서 완봉으로 누른 데 이어 준결승에서는 역시 다크호스로 꼽히던 마산상고까지 꺾으며 결승에 진출한 부산고의 분위기를 누를 정도는 아니었다.

인천고와 경남고가 40년대와 50년대를 대표하는 강팀들이었다면 경북고는 1960년대 이후 절대강자로 군림하던 팀이었다. 야구부의 전통으로 보나 전국대회 경험으로 보나 부산고가 밀릴 것이 없었다.

게다가 군산상고는 에이스 김봉연이 대회 직전 투구폼 변화를 시도하다가 어깨에 이상을 느끼면서 제대로 던질 수 없는 상태였고, 그를 대신한 투수 송상복마저 대회 대부분의 경기를 완투하다시피하며 지친 상태였다. 부산고 편기철도 많이 던진 것은 같았지만, 그는 어쨌거나 강팀의 첫 번째 투수였다.

반면 선수층이 얇을 수밖에 없었던 신생팀 군산상고에 전국대회 결승전에 내보낼 만한 세 번째 투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점에서 부산고의 두 번째 전국 제패를 의심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예상 밖의 집념

경기는 생각보다는 팽팽하게 흘러갔다. 1회 말에 군산상고가 1점을 선취하고 3회 초에 부산고가 1점을 만회한 뒤 8회까지 균형이 이어졌다. 하지만 8회 초 피로가 누적된 군산상고 투수 송상복의 구위에 이상이 감지됐고, 부산고 선두타자 김현동의 우전 안타를 시작으로 무려 6안타가 집중되며 3점이 만들어졌다.

객관적 전력이 앞선 팀으로부터 경기 후반에 얻어맞은 집중타와 대량 실점은 더욱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며 간신히 버텨온 희망에 된서리가 내리며 몸도 마음도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8회 말 군산상고의 반격 시도는 3자 범퇴로 허망하게 끝났고, 9회 말 마지막 공격이 시작될 때 점수는 4대 1이었다.


▲ 동대문야구장 조명탑 196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을 계기로 세워진 동대문야구장의 조명탑. 1972년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야간경기로 이루어졌고,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 국가기록원

누구나 역부족이라는 말을 떠올릴 만한 그 상황에서 군산상고가 뜻밖의 힘을 냈다. 6번 선두타자 김우근이 풀카운트 승부 끝에 깨끗한 우전 안타를 치고 나가며 희망의 불씨를 피웠고 7번 조양연의 내야 뜬 공 때 2루를 파고들었다. 한 점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큰 의미를 가지기 어려운 마지막 이닝 3점 차의 상황에서도 한 베이스를 전진하기 위해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김우근의 질주가 그 순간 군상상고 벤치의 분위기를 대변했다.

국가대표 에이스 출신의 최관수 감독은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끝까지 집중'을 외쳤고 야구부장으로 동행한 상업교사 송경섭은 타석으로 향하는 선수들 한 명 한 명을 잡고 어깨를 두드리며 '너만 살아나가면 돼'를 되풀이해 속삭였다.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파이팅을 외치고 타석으로 향했고 집요하게 공을 고르며 물고 늘어졌다. 그날 2타수 무안타에 그쳤던 8번 3루수 정효영의 타석에 최관수 감독은 고병석을 대타로 기용했다. 부산고는 초구부터 볼을 던진 편기철을 잠시 우익수로 빼고 원 포인트 릴리프로 조규표를 투입하며 맞불을 놓았다.

그런데 갑자기 마운드에 오른 구원투수 역시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볼을 연발한 끝에 결국 볼넷을 허용했다. 주자는 1사 1, 2루. 대개 이런 막다른 길에서 그 순간의 압박감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소진되었을 망정 그 순간까지 이끌어온 에이스뿐이다. 훗날 1982년과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의 이선희와 김일융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부산고의 선택 역시 다시 편기철이었다. 느린 커브볼을 주 무기로 경북고를 완봉하며 그 대회 최고의 투수로 떠올랐던 편기철 역시 연일 계속된 투구로 한계 상황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결과적으로 그를 마운드와 우익수 위치를 오가게 한 변칙적인 기용은 악수로 드러났다.

마운드로 돌아온 뒤 더욱 심하게 흔들린 편기철은 9번 송상복에게 볼넷을 내주며 만루를 만들었고, 1번 김일권은 몸 쪽 공을 피하지 않고 맞으며 밀어내기 한 점을 만들어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게 된 편기철의 정면 승부를 기다리듯 걷어낸 2번 양기탁의 중전 안타로 두 명의 주자가 홈을 밟으며 4대 4 동점이 만들어졌고, 결국 3번 김준환이 극적인 역전 끝내기 안타의 주인공이 됐다.

김준환이 투 스트라이크로 몰린 채 때려낸 좌전 안타는 2루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이기엔 조금 짧았지만, 마음이 급했던 부산고 3루수 김문희가 주자 양기탁을 피하지 못하고 몸을 겹쳐 주루 방해 판정을 받으면서 그 전설적인 경기에 마침표가 찍혔다. 5대 4. 종전 이후 호남 지역 학교가 전국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한 사건이었다.


▲ 제26회 황금사자기 결승전,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환호하는 군산상고 선수들(1972) ⓒ 군산상고

동대문에서 군산으로, 군산에서 전국으로

그 순간 서울운동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전국대회 결승전 진출 소식에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한 군산 시민과 서울의 호남 출신 응원단들이 펜스를 넘어 몰려들어 선수들을 부둥켜안기 시작했고 뒤이어 분노한 부산고 응원단이 그리고 또 이런저런 감정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관객들이 모두 그라운드로 몰려나와 이리 엉키고 저리 엉켰다.

그 와중에 한참이나 그라운드에서 기쁨을 만끽한 군산상고 선수들이 더그아웃으로 돌아왔을 때 수년간 길들여온 글러브를 비롯한 야구용품들이 몽땅 사라져 버려 다음 대회 출전이 곤란해질 정도였다.

아수라장이 된 것은 서울운동장만이 아니었다. 군산 시내 거리 곳곳에서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고 부산에서는 경기 중계방송을 틀어놓은 다방 TV를 향해 마시던 커피잔을 집어던진 사람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군산 그리고 호남의 이름으로 전국 제패를 경험한 군산 시민과 호남민들의 열광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런 열광은 역설적으로 패배한 상대방에게도 '부산 야구'라는 공감대를 만들어주었다.

고교야구를 통해 지역이 뭉치고 고취될 수 있다는 인식은 빠르게 다른 지역들로 번져나갔다. 전남 지역 언론계의 중심적 인물이던 김종태는 군산상고의 후원자 이용일을 찾아가 조언을 구한 뒤 광주상고와 진흥고, 동신고 야구부 창단 작업을 주도했다.


▲ 경성고무 군산공장 사장 이용일(가운데 양복 입은 이)이 한국야구사에 남긴 족적은 크다. 서울상대 야구팀 출신인 그는 육군 야구부의 창설과 운영에 기여한 데 이어 군산상고 야구부 창설을 후원했고 훗날 한국프로야구 창설을 주도하기도 했다. 특히 군산상고 야구부는 그가 창설 작업부터 지도자 주선, 선수단 숙식, 졸업생 취업 알선까지 직접 챙기는 가운데 빠르게 강팀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 오성자(최관수 감독 부인) 제공

박정희 정권 야구계의 최고 실력자였던 김종락 역시 뒤늦게 자신의 모교인 공주고 야구부 재창단을 후원했다. 천안에서도 한국화약그룹 김종희 회장이 북일고에 야구부를 만들어 전국에서 우수한 중학생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스카우트해 빠르게 전력을 강화했다.

그 결과 50년대와 60년대를 통틀어 단 한 번도 4대 전국대회 우승팀을 배출하지 못했던 호남과 충청권은 1970년대에만 각각 11번과 2번 우승컵을 가져가며 당당한 대항 세력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960년대까지 실질적으로 서울과 인천, 대구와 부산의 4대 도시를 대표하는 명문학교들의 대항전 성격에 머물던 고교야구가 호남과 충청권이 가세하며 해마다 최소한 4차례 반복되며 어느 쪽에든 대등한 승리와 설욕의 기회가 주어지는 흥미진진한 전국적인 지역 대결 무대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고교야구팀과 지역의 연대감을 더욱 확대하고 강화한 것은 카퍼레이드라는 의식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주로 국제무대에서 큰 성과를 거두어 국위를 선양하고 국민적인 자긍심을 고취한 인물이 무개차를 타고 시가지를 가로지르며 시민들의 축하와 환대를 받는 행사가 카퍼레이드였다. 경찰의 협조 아래 중심 도로의 교통을 통제해야 하고 많은 시민의 참여도 필요하기 때문에 일개 고등학교 선수들로 카퍼레이드를 하기는 어려웠다.

스포츠에서는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자 서윤복 선수 이래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야구대표팀(1963)과 한국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김기수(1966),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한 여자농구대표팀(1967)등이 누린 영광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에는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고교야구팀들을 위한 카퍼레이드가 각 지역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카퍼레이드의 시대

1972년 황금사자기의 대역전극 이틀 뒤인 7월 21일 오후 군산상고 야구부 선수들은 전주의 전북도청에 도착해 도지사가 주관하는 도민 환영 대회에 참석한 뒤 35사단에서 제공한 지프 차량에 나누어 타고 이리(익산)의 공설운동장까지 행진했고, 그곳에서 다시 한번 환영 행사를 치른 다음 군산까지 행진하며 시내 곳곳을 순회했다.

그리고 군산초등학교 운동장과 군산시청 앞에서 열린 시민 환영 대회에 차례로 참석한 뒤 군산상고로 돌아가 재학생과 동문들의 환영을 받았다. 모두 45km의 도로에서 이어진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의 수는 군산에서만 7만여 명이었다. 당시 군산시의 인구는 12만 명에 불과했다.


▲ 카퍼레이드 전후 호남 최초의 전국대회 우승을 이룬 군산상고는 전주와 이리(익산), 군산을 잇는 45km의 도로를 무개차 위에서 행진했고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고교야구, 나아가 야구가 지역과 일체화된 과정이었다. ⓒ 오성자 (최관수 감독 부인) 제공

그 뒤로 각 지역에서는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지역 내 학교 선수들을 환영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카퍼레이드를 비롯한 대규모 시민 환영 행사를 벌였다. 1973년에는 28회 청룡기를 차지한 경남고 선수들이 부산역에서 학교까지 카퍼레이드를 했으며 1977년 11회 대통령배 대회에서 충청권 최초로 우승한 공주고 역시 대대적인 시민 환영 대회와 도민 환영 대회에 참석한 뒤 무개차에 올라 '개선 행진'을 했다.

또한 한국화약그룹이 운영하던 북일고가 봉황기 대회에서 처음 우승했던 1980년에는 모기업이 제공한 화약을 활용해 천안 시내에 대대적인 불꽃놀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고교야구 선수들과 지역민들 사이에는 강한 일체감이 형성되었으며, 각 지역민들 사이에는 경쟁 의식이 고조되었다. 대결 의식은 고조되었지만 실제로 싸울 수는 없었던, 그래서 적당한 대리 표출의 출구가 필요했던 각 지역민들의 가슴속으로 고교야구가 깊숙이 파고드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야구와 한국인의 공감과 대결 의식이 쌓여 십여 년 뒤 프로야구가 만들어지고 흥행 하면서 '국민 스포츠'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2년 5월 03일, 화 7:21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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