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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욥기가 전하는 고난의 신비…"당신의 고통은 하나님에게도 고통"
[인터뷰] <욥이 말하다>저자 양명수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뉴스앤조이) 여운송 기자 = 만일 '욥기'라는 드라마가 2022년 한국에서 방영된다면 '최종회'가 전파를 탄 직후 시청자 게시판은 십중팔구 폭발할 것이다. 충언하건대, 작가는 소셜미디어 계정을 한동안 닫아 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욥기를 처음 접하는 모든 이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단연 '억울하게 고난당한 욥이 하나님과 언제·어떻게 대면할 것인가'다. 욥기의 내러티브는 사실상 그 장면 하나를 향해 달려간다. 그래서 욥기의 결말은 '왕좌의 게임 시즌 8'만큼이나 당혹스럽다. 우리를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욥이 당하는 고난도, 친구들의 비난도 아니다. 그건 바로 폭풍 속에서 나타난, 그토록 목놓아 기다리던 '문제 해결사' 하나님의 만행(?)이다.

마침내 등장한 하나님의 답변은 상당히 불친절하고 위압적이다. '그래서 대체 이유가 뭡니까'라고 묻는 욥에게 이유를 설명하기는커녕 '말해 준들 네가 알겠냐'는 식으로 윽박지른다. 이후 결말도 탐탁지 않다. 압도적 위엄으로 욥을 굴종시킨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는데, 그렇다고 이미 죽은 자식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닐 터. '과연 욥이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애초에 이런 식의 결말 자체가 욥이 이야기 내내 저항했던 인과응보 논리를 다시 옹호하는 꼴이 돼 버린 건 아닌지 찜찜함이 남는다.

내게 욥기는 여러모로 깨달음과 후련함보다는 답답함을 주는 책이었다. 여지껏 접했던 욥기 관련 서적들도 그다지 만족스러운 답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욥이 말하다 - 고난의 신비에 관하여>(복있는사람)를 만났다. 저자 양명수 교수(이화여대 명예)는 배재대학교 신학과와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오랫동안 가르치다가 재작년 은퇴했다. <욥이 말하다>는 그가 이화여대 대학교회에서 시무하며 2002년에 강의한 내용을 엮은 책이다. 본래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것을 올해 3월 복있는사람에서 출간 20주년 개정판으로 다시 냈다.

많은 이가 자신의 고난 혹은 타인의 고난과 마주하는 법을 배우고자 욥기를 편다. 이 책은 자신과 타인을 넘어 '하나님의 고난'과 마주하는 법을 알게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희망이다", "위로를 받고자 하는 자여, 하나님을 위로하자" 등 도발적인 신학적 아포리즘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책을 통해, '까닭 없는 고난'을 당한 욥이 '까닭 있는 저항'을 거쳐 '까닭 없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저자 양명수 교수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4월 19일 온라인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으로 인터뷰한 양 교수와의 대화 내용을 정리했다.


▲<욥이 말하다> 저자 양명수 이화여대 명예교수. 줌 화면 갈무리

- 교수님 저서·역서를 찾아 보니, 단일한 성서 한 권을 가지고 책을 내신 건 <욥이 말하다>가 유일하더라고요. 굳이 욥기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일단 나는 성서학자가 아니라 조직신학·윤리학을 사상적으로 연구해 와서, 성서 한 권을 갖고 따로 책을 쓰거나 하지는 않았죠. 대학교회에서 성서 강의를 할 때 욥기를 선택했던 이유는 '고난'이라는 아주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욥기가 좀 지루하기도 하고 그리 와닿지도 않더라고요. 보통은 욥을 굉장히 믿음 좋은 사람으로 얘기하는데, 내가 볼 땐 그렇지 않았단 말이에요. 오히려 욥의 친구들이 훨씬 믿음이 좋아 보였고요. 그런데 이게 마지막에 또 반전이 일어나요. '이거 참 범상치 않은 책이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이걸 잘 풀이하면 교인들에게 위로도 줄 수 있고, 기독교 신앙의 심오한 측면을 같이 얘기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한번 제대로 풀어보기로 했던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의 희망이다

- 책 서문을 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희망이다"라는 주제로 욥기를 전개한다고 돼 있는데요. 언뜻 보기에 욥기는 인간의 절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그런 명제가 나올 수 있는지 의아했습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여러 신학적 주제가 있어요. 그중 중요한 명제가 "인간이 하나님의 희망이다"인데요. 교회에서는 주로 "하나님이 인간의 희망이다"라고 말하죠. 욥의 친구들도 이런 측면에서 얘기한 거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옳다', '네가 겪는 고난도 하나님이 주신 거고 그분의 뜻이다', '얼른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 복을 빌어라', '희망은 거기밖에 없다'라는 식으로 얘기하죠. 어떻게 보면 전통적인 신학이고 또 대중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성서를 자세히 보면 반드시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워요.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에게도 고통이거든요. 즉 하나님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생긴다는 얘기죠.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왜 생기느냐. 하나님이 인간에게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예 희망이 없으면 하나님 뜻대로 다 하면 되죠. 하나님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생긴다는 건 어떻게 보면 전지전능성의 훼손인데, 하나님이 전능하시면 그냥 뜻대로 다 하면 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도 하거든요. 사랑은 상대를 자유롭게 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게 성서의 인간관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원래 창조의 뜻대로 서로 잘 살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죠.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영역이에요. 결국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그 뜻을 이루는 데 인간이 굉장히 중요해진 거죠.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희망이다"라고 말한 겁니다.

욥기에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경험이 담겨 있거든요. 구약은 대부분 '하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이스라엘은 수없이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바벨론에 유폐당하기까지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하나' 생각하게 된 거예요. '하나님 잘 믿으면 고난도 없고 복도 받는다'는 전통적이고 단순한 신앙에 대한 반성에서 욥기가 나온 거죠. 말하자면 신앙의 새로운 경험,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체험, 새로운 계시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보통 '욥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욥의 친구들을 매도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런데 교수님은 그들의 신학이 뛰어나다고 굉장히 높게 평가하셨어요. 친구들과 욥의 모습은 "진리가 우리와 함께하는 두 가지 방식"이자, "한 사람 안에 있는 두 가지 모습"이라고 쓰셨는데요.

신학 공부를 한 입장에서 욥기를 보면, 특히 엘리바스(욥의 친구) 같은 사람은 신학적으로 상당히 깊이가 있어요. 욥기라는 책이 만만치 않은 게, 여기 유대-기독교의 핵심적인 신학 명제가 다 나와 있거든요. 친구들의 이야기가 다 틀린 게 아니에요. 문제는 그런 기존의 전통 신학적 틀이 욥처럼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꼭 맞아떨어질 수 없다는 겁니다. 신학이라는 게 인간의 언어로 돼 있기 때문에 진리를 표현하는 데 언제나 한계가 있어요. 그러니까 늘 새로운 신학이 나와야 해요. '고난받는 사람의 울부짖음'이 바로 그 새로운 신학이 태동하는 계기가 되는 거고요.

그렇다고 해서 전통 신학이 잘못됐느냐, 그렇지 않아요. 어떤 경우에는 '이 고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하나님이 나 잘되라고 이러시는 거겠지' 하면서 고난을 극복하기도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대중 신학도 하나의 소박한 신앙으로 순기능을 하는 거지, 다 틀린 게 아니에요. 하지만 그게 우리 인간의 삶을 다 설명해 주지는 못하죠. 오히려 도그마틱하게 변질돼서 사람을 정죄하기도 하고요. 고난당하는 사람은 무슨 죄가 많아서 그런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세상은 전혀 안 그렇거든요. 그러니까 '전통 신학을 버릴 수는 없지만 새로운 신학에 열린 자세도 필요하다', '그 두 가지는 같이 가는 거다'라고 얘기한 거죠.

"의로우신 하나님을 일반론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의 도덕성을 일깨운다. 그러나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그런 일반론은 그를 다시 한번 정죄하여 좌절에 빠뜨릴 수 있다. 그가 당하고 있는 고난이 불의의 대가로 오는 벌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생각은 얼마나 위험한가.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게 희망이 되어야지 좌절의 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82쪽)


▲<욥이 말하다 - 고난의 신비에 관하여> / 양명수 지음 / 복있는사람 펴냄 / 280쪽

- 그럼에도 결국에는 "친구들의 말보다는 욥의 저항이 옳다", "고난에 처한 쪽에서 이해한 신학이 옳다"고 하셨어요. 고난당한 이의 울부짖음에 담겨 있는 신학적 함의를 간략하게 얘기해 주신다면요.

고난당하는 사람의 울부짖음은, 아무 일 없이 사는 것 같은 이 세상으로 하여금 깜짝 놀라서 돌아보게 만들죠. 거기서 새로운 사유가 시작되고 변화가 시작되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고난당하는 사람의 울부짖음은 사실 하나님에게도 뜻밖의 일이에요. 하나님도 놀랄 만한 섬뜩한 일이죠. 그 울부짖음이 결국은 십자가, 즉 하나님의 수난으로 가는 거거든요. 그런 면에서 욥기는 기독론을 예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성서를 보면 하나님이 마음을 먹었다가도 인간의 고통 앞에서 마음을 바꾸거든요. 그런 얘기들이 다 하나님의 수난을 예고하고 있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희망을 보여 주고요.

- "고난은 하나님에게도 뜻밖이다"라는 말은 통상적인 전지전능한 하나님 이미지에 도전을 가하는 표현이잖아요. 이것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희망을 갖고 있다는 말과 관련이 있을까요.

물론이죠. 하나님이 인간에게 희망을 갖고 있으니까 하나님 뜻대로 안 되는 일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던 하나님의 창조 의지에 반하는 뜻밖의 일들, 즉 인간이 고통당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거죠. 아직 종말이 오지 않은 건 하나님이 여전히 인간에게 희망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봐요.

"의인의 불행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인간 역사에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감당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무능. 그 무능함은 오히려 이 세상을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요, 기다리심이요, 선하심이 아닐까. 전능하신 분의 무능은 하나님의 수난이다. 고난받는 하나님은 고난받는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다." (139쪽)

- 욥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하나님이 침묵하시잖아요. "고난 앞에서는 하나님조차 말을 아끼신다"고 쓰셨어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고통 앞에서 말이 너무 많은 것 같거든요. 늘 확신에 차 있고, 죄 때문이라고 얘기하거나, 고난은 숨겨진 축복이라는 고난 예찬론적인 말을 많이 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상처를 많이 받죠. 자기들 딴에는 위로한다고 하는데, 그게 결국 설교가 돼 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욥의 친구들도 처음에 와서는 일주일이나 말을 안 했어요. 그런 고통 앞에서 사람의 말로 무슨 위로를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친구들도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위로하려고 했겠지만 나중엔 설교가 돼 버렸어요. 근데 고난받는 사람한테 설교하는 건 좋지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목사들은 근본적으로 죄 짐을 지고 있는 거라고 봐야 해요.

고난받는 사람들도 남들이 해 주는 말이 좋고 옳은 줄 알거든요. 하지만 정작 내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도 안 되고 받아들일 수 없는 말들인 거예요. 심지어 욥기 마지막에 등장하시는 하나님도 정작 욥의 고난에 대해 직접 얘기하지는 않으시죠. 고난이라는 건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거거든요.

하나님을 위하려다가 사람을 저버리는 일

-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보다는 어떻게든 하나님의 전지전능·선함을 변호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 같은 경우를 많이 봅니다. 책에 쓰신 대로 "하나님을 위하려다가 되레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하는데요.

근본적으로는 신학의 문제예요. 한국교회를 보면 성부 중심이에요. 하나님의 권위와 전능성을 강조하죠. 성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거든요. 모세도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이지요. '절대'이기 때문에 사람이 상대할 수 없는 분이에요. 그런데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봐요. 성자는 아주 전능하게만 보이는 분은 아니죠. 오히려 무능해 보여요.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했는데도 내려오지 못하는, 수난당하는 하나님이죠.

흔히 기독론을 가지고 속죄에 대해서만 얘기하는데, 기독론의 핵심은 '절대이신 하나님이 사람을 상대해 주셨다'는 거거든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얼굴을 보이신 하나님, 사람들과 마주하신 하나님, 마주하면서 맞이해 주신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상대'예요. 그리스도의 수난은 그 상대 때문에 비롯한 거죠. 사람을 상대한다는 얘기는 사람을 그만큼 귀한 주체로 대접한다는 거고, 그래서 예수님이 당시 사람 취급 못 받던 죄인들이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사람을 귀하게 대접해야 해요. 힘써 하나님을 변호하려다가 보면 자칫 사람을 내다 버리게 돼요. 그건 하나님의 뜻과 아주 거리가 멀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사람을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만큼 인간의 존엄성을 선포하는 게 없거든요.

"사람을 저버리면서 하나님을 위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하기로 하신 분인데, 사람을 좌절시키면서 하나님을 위할 수 있단 말인가. (중략) 적어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사람을 좌절시키는 일을 하면 안 된다. 특히 고난당하는 사람 앞에서 조심해야 한다. 고난당하는 사람 앞에서는 하나님도 말을 아끼신다." (96쪽)

- 또 한 가지 인상 깊었던 건 "욥이 조롱당한 이유는 그가 약자였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오늘날 고통받는 사람들의 처지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사회에서는 "힘이 곧 정의"라는 법칙이 통용되더라도 교회는 조금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욥은 원래 강자인데 재앙을 당해 약자가 되지요. 그가 강자였을 때는 사람들이 모두 존경했지만, 약자가 되니 저주하기 시작했어요. 욥기에는 세상 인심의 변화가 실감나게 표현돼 있습니다. 세상은 힘 중심으로 돌아가요. 그런데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건 힘 숭배하고 거리가 멀죠. 르네 지라르의 말을 빌리자면, 힘 중심으로 돌아가는 인간 사회는 항상 '희생양'을 필요로 해요. 그들의 피를 대가로 나머지가 평화를 유지하는 메커니즘인 거죠. 옛날에는 제물을 잡아서 피를 흘렸지만, 지금은 구조적인 억압을 통해서 희생양을 만들어요. 사회적 약자들을 차별하고 무시하고 괴롭히고 이런 게 전부 희생양 구조예요.

그런데 기독교는 바로 그 문제에 정면으로 이의 제기한 종교예요. 기독교가 던지는 사회적 메시지는 '하나님이 희생양이 됐다', '하나님이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서 몸소 수난을 당하고 희생양이 됐으니, 이제 더 이상 희생양을 만들지 말라'는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완전한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게 바로 이런 의미예요.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혐오에 빠지면 안 돼요. 예를 들면, 이슬람교와 종교적 논쟁은 있을 수 있어도 무슬림을 혐오하는 태도는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아요. 다른 어떤 개인·집단을 향해서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오히려 그렇게 해야 믿음이 좋은 것처럼 생각해요. 믿음의 열매는 사랑이지 정죄가 아닌데도요. 그러면 그럴수록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버림을 받을 겁니다. 교회가 모범이 되는 쪽으로 사회와 다른 모습을 보여야지, 더 혐오하고 배제하는 쪽으로 다른 모습을 보이면 안 돼죠.

- 타인의 비극보다 내 손가락 생채기가 더 아프기 마련인데요. 그 간극을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줄여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어떻게 가르치거나 판단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과 마주할 수 있을까요.

언어를 조심해야 해요. 사실 그것만 잘해도 큰 문제는 없거든요. 예전에 일본에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 한국교회에서 "일본 사람들이 죄가 많아서 하나님이 심판하신 거다"라는 말이 나왔죠. 정말 해서는 안 될 말이에요. 결코 기독교적인 말이 아니죠. 타인의 고난을 대하는 문제에 대한 신학적 정립이 필요해요. 물론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내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면서 살 수는 없지만, 그 고통에 나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서 내가 무엇을 실천할 수 있을지는 각자의 환경에서 나갈 수 있겠죠.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말한, 내 앞에 있는 타자의 얼굴을 향한 주체의 '무한 책임' 개념도 결국 유대-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말이거든요. 사랑을 다른 말로 표현한 거죠. 누군가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의 고통을 나눠 가진 거지, 그 사람 때문이 아닐 수 있거든요. 평소 그런 책임감을 갖고 있다면 타인의 고통과 마주했을 때 실천이 나갑니다. 그런 측면에서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책임감과 사고방식도 중요해요.




고난은 악이다, 그러나 '신비'이기도 하다

- 고난은 분명한 '악'이라고 쓰셨어요. 그러면서도 "고난은 신비다"라고 표현하셨거든요. 어떤 점에서 고난이 신비가 될 수 있을까요.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하나님도 인간의 고난을 원하지 않으시고요. 고난은 분명한 악이죠. 고난을 통해 사람이 성숙해지는 측면이 있다고 해서, 고난을 선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고난은 본질적으로 파괴적이거든요. 고난이 성숙을 보장하지도 않아요. 그냥 파괴되고 주저앉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고난을 '선'이라고 말하는 건 성서적이지도 않고 참 조심해야 할 일이에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렇게 파괴적인 경험을 통해 사람이 깊어지기도 하거든요.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이 대개 흔들리지 않는 무게중심을 갖게 되고요. 무너지지 않고 강해질 수만 있다면 타인에게 연민을 품고 용서할 수 있는 성숙한 인격을 갖게 되기도 하죠. 물론 반드시 그렇게 되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고난을 어떻게 통과하느냐, 죽겠다고 난리 치면서 주저앉아 버리느냐, 스스로 돌아보고 새로운 시각을 얻고 여러 가지로 성숙해지는 계기로 삼느냐가 중요하죠. 이렇게 고난은 사람에게도 큰 불행이고 하나님에게도 뜻밖이지만, 하나님이 그 고난을 당신의 뜻 안에서 선용하시기도 한다는 점에서 "고난은 신비다"라고 말할 수 있겠죠.

- 사실 욥기의 결말에 대한 기존 설명들은 그리 와닿지 않았는데요. 교수님은 좀 다르게 풀어내셨어요.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지더라고요. 욥이 '까닭 없는 고난'에서 '까닭 없는 믿음'으로 갈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욥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답하는 건 쉽지 않아요. 나는 이 이야기도 이스라엘의 새로운 경험을 반영한다고 봐요. 다윗·솔로몬 시대를 거치면서 하나님 잘 믿으면 복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주변 나라들이 흥하는 걸 봤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도대체 뭔가' 생각하다가, '아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는 거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니까 믿는 거구나' 하고 깨달은 거죠.

하나님이 폭풍 속에서 나타나 욥에게 하신 얘기는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에게 "나는 나다"라고 하신 것과 같아요. 아무런 설명도 없잖아요. 오직 하나님만 그렇게 말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욥이 그걸 받아들인 경지에 간 것이라고 보는 거죠. 분명한 건 신앙의 진수는 복을 바라고 믿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건 자칫 '거래'가 되고 '우상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그쪽으로만 몰아가는 건 아주 위험하죠.

- 저는 책을 읽으면서, 욥이 폭풍 속에 나타난 하나님과 대면하고 '하나님도 창조 세계를 운행하면서 마주하는 뜻밖의 일들로 슬픔과 고통을 당하시는구나' 하고 깨달았다고 이해했습니다. 자신의 아픔과 하나님의 아픔이 공명하면서 까닭 없는 고난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고 봤어요.

네, 그런 얘기가 책에 나오죠. 결국은 욥이 자기 고통에서 출발했는데 하나님의 고통을 본 거예요. 이건 굉장한 신앙의 경지로 간 거예요. 보통 교회는 하나님의 고통에 대해 잘 얘기하지 않는데, 그것이야말로 십자가의 핵심이에요.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수난을 당하는가' 하는 전능과 수난의 변증법적 역설이 바로 삼위일체죠. 그것을 신앙으로 인식하는 것이 기독교인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 같아요. 그러니까 욥이 "이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거죠.

"욥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나님의 불의를 물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고통을 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안고 하나님나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수고를 본다. 이제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의 책임을 물을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고백할 자리가 되었다. (중략) 욥은 자신의 불행 한가운데서 수난을 겪을 분이 아닌 하나님의 수난을 보면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본다. (중략) 좋은 일 속에서 은총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불행 이후 그 절망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본다. 고난의 신비가 아닌가." (260쪽)

위로를 받고자 하는 자여, 하나님을 위로하자

- 개인적으로는 욥이 하나님 마음을 발견하는 대목을 해설하면서 쓰신 "위로를 받고자 하는 자여, 하나님을 위로하자"라는 문구에 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럴 수 있으면 좋다는 겁니다. '내 고통은 하나님에게도 고통이다'라는 인식에 이르는 거죠. 마르틴 루터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성만찬에 대해 그런 얘기를 했어요. "나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통이고, 그리스도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다"라고요. 그렇게 보면 나도 위로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으면 좋죠. 우리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막을 수는 없지만 슬퍼할 수는 있습니다.

"이제 욥은 인간 편에 선 인간적인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 편에 서는 법을 배운다. 보라, 이제 욥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게 된다. 그동안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알아주시기를 바랐다. (중략) 그러나 이제는 거꾸로 욥이 수난받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준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자로서 욥은 하나님을 본다. 위로를 받고자 하는 자여, 하나님을 위로하자." (264~265쪽)

- 고통당하고 계시는 분들 혹은 고통 속에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욥기를 읽을 분들에게 한마디 해 주신다면요.

글쎄요… 고통당하고 계시는 분들에게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을까요. 쉽지는 않네요. 다른 말보다는 "당신의 고통은 하나님에게도 고통입니다"라는 말씀을 거듭 드리면 어떨까요. 모쪼록 제 책이 욥기와 믿음과 삶과 고난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본보 제휴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2년 4월 25일, 월 9:5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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