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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시간: (EST) 2021년 12월 02일, 목 11:41 am
[특집/기획] 스페셜리포트
 
대장동 스캔들, 근본 질문이 빠졌다
[스페셜 리포트] 개발주의 도그마 부술 때가 됐다

(파리=오마이뉴스) 목수정 기자 = <응답하라 1988> 마지막 회엔 정팔이네 가족이 쌍문동 골목을 떠나 이사 가는 장면이 나온다. 정팔 아빠는 트럭 기사에게 자신들이 가는 곳이 "판교"라 말해준다. 복권 당첨으로 1차 인생 역전했던 이 가정에 머지않아 2차 인생 역전의 날이 올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복권과 부동산은 몸뚱이 말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 인생 역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이 둘을 모두 얻게 된 기막힌 행운의 가족은 이후에도 쌍문동 골목에서 누렸던 행복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동네 꼬마들, 이웃들이 바글바글 어울려 살던 골목은 재개발 지구로 지정되어 폐허가 되었고, 텃밭 일구며 여유롭게 살아가려고 찾은 판교 또한 개발의 은총을 받게 된다. 개발 이익을 손에 쥐었을지 모르나, 스스로 결정하지 않은, 개발이란 이름의 사회적 당위 앞에서 그들은 다시 떠나야 했을 것이다. 대박이 두 번이나 터진 이 행운의 가정도 포기해야 하는 한 가지는 '정주하는 삶'이다.


▲ <응답하라 1988> 마지막 회에서 덕선(혜리)이 쌍문동을 떠나며 골목을 둘러 보고 있다. ⓒ tvn

인천공항에서 내려 차를 타고 부모님 집으로 가는 1시간 30분의 여정에서 매번 확인하는 것은 5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이건만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건축물이 반짝거리는 새 건물들이라는 것이다. 밤낮없이 어딘가에선 새로운 고층 아파트들이 올라간다. 여기가 혹시 막 일어서기 시작하는 개발도상국인가? 아무도 그리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초가집 없애고 마을길 넓히던 시절은 50년 전이고, 나름 선진국이라 자부하기 시작한 지 제법 된다.

그런데 왜 새로운 아파트를 계속 짓는가? 쌀처럼 먹어치우는 식량도 아니고, 자동차처럼 10년 남짓 쓰면 삐거덕 거리는 물건도 아니다. 혹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나? 한국은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해 올해 8월 기준 인구는 지난해보다 15만 9천 명이 감소했다. 출생아 수는 20년 전에 비해 3/5 수준으로 줄어 27만 명이다. 이대로라면 2100년 대한민국의 인구는 1800만으로 현재의 1/3까지 줄어든다는 예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혹시 인구 대비 주택이 부족한가?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어선 지 20년쯤 됐다. 1인 가구가 늘어나 실질적 주택보급이 넉넉하진 않다고 하나 돈이 부족할 뿐 집이 부족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왜 계속 짓는 걸까?

단명하는 한국의 아파트

국토교통부가 내놓은 통계에 따르면 2010~2015년 한국의 아파트 평균 수명은 28.89년이다. 이는 128년의 수명을 지닌 영국의 아파트에 비해 1/5 수준이다. 지진 다발국 일본에 비해서도 절반에 그친다. 한국의 아파트는 왜 이토록 짧은 수명을 가지고 있을까? 한국 건축 기술이 떨어져서? 그럴 리 없다. 이렇게 건설업이 흥한 나라에서 기술은 축적될 수밖에 없는 법.

한국의 아파트들이 1세대를 못 넘기고 요절하는 이유를 대한민국 성인이라면 누구든 10초 안에 감잡을 수 있다. 한국사회는 재개발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건축의 사이클이 빨라질수록 건설사와 거기 투자한 사람들이 부를 축적할 뿐 아니라 집주인들 또한 재건축으로 가치가 상승한 부동산을 보유하게 된다.


▲ 주요국 주택 평균 수명 비교(괄호 안은 기준 연도). 자료 출처: 국토교통부. ⓒ 고정미

개발 이익을 차지하는 사람은 소수라는 사실이 비밀이 아니건만 불을 찾아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재개발이라는 종소리가 딸랑거리면,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너도나도 개발 열차에 올라탄다.

그러나 재건축 후 좀 더 값나가는 아파트를 소유한다 해도 여전히 살 집 하나를 가졌단 사실엔 변함이 없다. 내 아파트 값만 오른 게 아니라 옆집 아파트, 개발을 시작한 옆 동네도 오를 터이니, 교환가치가 상승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완공될 때까지 전셋집을 옮겨 다녀야 하는 심란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그런데도 오래된 아파트 주민들의 염원은 재건축이다.

이러한 심리를 잘 아는 정치인들은 당선을 위한 가장 확실한 공약으로 재건축이나 재개발을 약속해 왔다. 그들은 딜러처럼 다가와 재개발이라는 마약을 덥석 물게 하고, 그 마약이 퍼뜨릴 악영향은 또 다른 재개발 약속으로 덮어왔다. 1970년대 강남 8학군 개발이 이뤄진 후 지금까지 주변에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들의 전설 속에는 언제나 부동산 대박의 스토리가 있었다. 부동산 불패 신화는 그렇게 반세기에 걸쳐 사람들의 사고를 불가역적으로 고정시켜왔다.

짓는 대신 고쳐 쓴다

세상 모든 나라가 우리처럼 사는 걸까? 내가 잘 아는 또 한 나라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22년 전 프랑스에 와서 가장 오래 살았던 집은 마레 지구에 있던 17세기에 지어진 4층짜리 아파트였다. 1층 한가운데에 지하 8m 깊이의 우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 집은 2차대전 전까지는 술집이었다.

전후 한동안 폐허로 버려져 있던 것을 한 은행이 사들여 직원들을 위한 임대주택으로 사용했고 70년대부터 40년 동안 내 남편이 구입해 살았다. 지금은 두 명의 의사가 구입해 병원으로 개조해 쓰는 중이다.

8년 전 거길 떠나 파리에서 1km 정도 떨어진 외곽으로 이사 왔다. 19세기에 지어진 소규모 공장을 영화제작자가 사들여 철근 골조를 그대로 남긴 채 나무집으로 개조해 영화사로 사용한 게 2000년대 초반이었다. 그 집을 우리가 사들여 작업실 겸 생활공간으로 개조해 쓰고 있다.

우리가 만난 집들은 여러 세기를 거치며 새 주인을 만나고, 용도를 달리하며 세월과 함께 진화해 왔을 뿐 소멸하지 않았다. 파리에서도 허구한 날 공사가 끊이질 않지만 대부분은 개조 공사다. 20세기 말 이 늙은 대륙으로 건너온 이후 멀쩡하던 건물이 파괴되고, 그 위에 새 집을 짓는 광경을 목격한 경우는 거의 없다. 재개발이 결정되어 마을 전체가 허물어지게 되었음을 알리는 기쁨의 현수막도 물론.

많은 프랑스인들이 그러하듯 시골에도 집이 하나 있다.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이 집은 같은 부지 내에 있는 천연염료 공장 주인의 집이었다. 화학염료가 천연염료를 대신하면서 공장은 문을 닫았고, 집은 30년째 폐허가 되어 있었다. 남편이 30년 전 구입해 작업장 겸 별장으로 쓰고 있는 이 집의 값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변함이 없다.

10여 년 전엔 부지 한 구석에 작은 한국식 흙집을 하나 지으려다 시의 허가를 받지 못해 좌절한 바 있다. 마을에 이미 빈집이 많기 때문에 그것의 개·보수만 허가를 내줄 뿐 새 건축물은 비록 내 땅에 짓는 작은 오두막일지라도 불가하다는 것이 시의 방침이다.

시장이 바뀔 때마다 혹, 다른 결정이 내려질까 기다려보지만 12년째 답은 한결같다. 사유지에서조차 자유롭게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불만이지만, 작은 마을 지자체장의 의지로도 부동산 투기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 집값을 30년 동안 붙들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16년 만에 재개관한 사마리텐 백화점 1870년에 처음 문을 연 유서싶은 파리의 백화점이 오랜 공사를 끝내고 2021년 6월에 재개관 했다. 약1조 원(7억5천만유로)의 공사 비용이 들어간 리모델링 공사는,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 모습을 더욱 아름답게 복원해 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 VILLE DE PARIS

올해 6월 16년간의 긴 리모델링 기간을 거쳐 재개장한 파리의 사마리텐 백화점은 1870년에 처음 탄생했다. 리모델링 기간도 길었지만 비용도 1조 원이 소요되는 엄청난 규모의 공사였다. 그 정도 비용이면 다 부수고, 높은 건물을 올리는 것이 분명 더 경제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개장한 사마리텐 백화점은 아르누보 양식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구석구석이 좀 더 정교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모습이었다. 물론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백화점 건물을 마음대로 부술 수 있는 권한이 건축주에겐 없다.

그러나 LVMH(루이비통 모에 헤네시) 대표이자 프랑스 제1 거부인 건축주 베르나르 아르노의 선택은 자본가의 머릿속에도 입력되어 있는, 건축물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라는 가치와 이 사회가 수세기를 살아낸 건축물의 숨결을 공유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대장동 이야기

누구도 말릴 수 없어 보이는 거센 화력의 부동산 스캔들이 빵 터지더니 2주 넘게 활활 타오른다. 차분히 하루종일 들여다본 화천대유 사건은 17년에 걸친 개발의 대하드라마였다.


ⓒ 고정미

4개의 정권을 거치며 펼쳐진 대장동 개발의 엎치락뒤치락 스토리에서 관건은 결국 개발 차익을 누가 나눠가질까였다. 공공개발로 시작됐던 초기에도 당시 이대엽 성남시장 하의 성남시 공무원들이 개발 계획을 유출해 업자들과 함께 토지를 구입, 개발 이익을 선점하려 했다. 공공개발로 진행되었더라도 막대한 개발 이익이 기득권의 갈취를 피하기 쉽지 않은 일임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재명이 시장이 되고 다시 공공개발을 시도하나, 한나라당이 장악한 시의회의 결사 저지로 이룰 수 없었다. 재선 된 이재명은 민관 공동개발을 추진했고, 5500억 원의 개발이익을 환수했다.

그러나 사업에 참여한 소수 민간업자들이 누렸다는 수천 억의 소득은 대중을 좌절시키고 분노케 한다. 이를 조율한 이재명에게 이 천문학적 불로소득을 막지 못한 무능이라도 꾸짖고 싶어진다. 이 막대한 투기판에서 그 또한 한몫 단단히 챙겼을지 모른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수사를 통해 명백히 밝혀내야 하는 일이다.

대선 주자를 비롯해 법조계와 정계, 언론계를 망라한 인사들이 뒤얽힌 대장동이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모든 이슈를 흡수하고 있지만, 작금의 부동산 공화국은 한두 사람의 설계와 작당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 27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대장동 일대 대장지구 개발 사업으로 공사중인 현장들이 보이고 있다. ⓒ 이희훈

불과 5년 전 10억대이던 강남의 아파트가 지금은 20억대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7년간 다주택 소유자는 40% 늘어났다. 2014년 9월 박근혜 정부가 재건축 연한을 40년에서 30년으로 낮추면서, 멀쩡한 건물도 30년이 지나면 재건축할 수 있게 했다. 남들이 100년을 살려고 아파트를 지을 때 우린 30년만 살고 부술 아파트를 지으라는 신호를 국가가 내린 것이다.

부동산 개발이라는 지팡이는 휘두르기만 하면 유권자들의 표를 쓸어 담는 마법의 지팡이다. 이걸 외면할 정치인은 없고, 개발 판이 벌어지면 쓸어 담을 수 있는 일확천금의 기회를 막을 기득권도 없다. 40년간 그 어떤 정부도, 부동산 망국의 길을 진정시키는데 기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너나 할 것없이 하나 둘 징검다리를 놓아 오늘의 사태를 만든 공범이다.

특검이 이뤄지고, 몇몇 사람이 단죄 된다 한들, 우리는 또 다른 대장동 사건의 재발을 막을 수 있을까? 아이들의 장래 희망이 건물주가 되는 비극적 시대를 리셋할 수 있는 걸까?

대장동 개발 사례를 대표적 업적으로 삼아왔던 이재명 지사는 언론과 야권, 심지어 여권 경쟁 후보로부터 공격을 받으며 코너로 몰리자, 이번 기회를 계기로 '개발이익 국민환수제'를 대선 공약으로 전면에 내걸었다. 현 상황에서 내놓을 수 있는 바람직한 제안이긴 하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최선일까?

개발주의, 넘어설 때가 됐다

대선 후보 이재명과 윤석열은 나란히 부동산 공약으로 250만 호의 주택 공급을 약속하고 있다. 이재명은 이중 기본주택 100만 호를 공급하고, 투기 억제를 위해 국토보유세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윤석열도 250만 호 중 청년 원가주택 20만 호를 공급하겠다고 했다. 이들이 공약한 개발 사업의 이득이 투기꾼들에게 넘어가지 않고, 모든 사회 구성원이 혜택을 누리는 방식으로 나눠진다 해도, 이들의 공약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외면하고 있다.

우리에게 택지 개발이 필요한가? 왜 한국의 아파트는 100년을 가도록 지을 수 없는가? 걸핏하면 이웃 간 폭력으로 번지는 층간 소음을 야기하는 부실한 아파트를 튼튼하게 지어서 100년, 200년 넘게 인간과 함께 나이 먹어가게 할 수는 없는 건가? 아파트가 허름해지면, 그걸 부수는 대신 꼼꼼히 안팎을 단장 하고 보수하면서 살 순 없나?

이제 우린 그 문제를 논해야 한다. 한 세대도 온전히 생을 담지 못하는 집에 살며, 재개발의 바람이 불면 삶을 다시 세팅해야 하는 물결에 휩싸일 준비가 된 사회는 백년대계를 설계할 수 없다. 우린 언제까지 이토록 거대한 산업폐기물을 발생시키며 집과 마을을 파괴하고, 사람들 사이를 갈가리 찢는 재개발·재건축의 몸살에 무방비로 노출되어야 하는가? 청년주택이든 기본주택이든, 기존 건물, 기존의 아파트를 단장해 공급하면 안되는가?

쌀을 제외하면 식량 자급률이 13%에 불과한 나라,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GMO 농산물을 수입하는 나라, 해마다 지독한 미세먼지로 고통을 겪는 나라, 아찔한 인구 절벽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나라의 대통령 후보들이 왜 나란히 아파트 250만 채를 공급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는가? "아파트는 계속 지어야 하는 것"이라는 이 오래된 최면에서 그만 깨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 자리에 녹지를 조성하고, 건강한 우리 농산물이 자라날 농지를 더 확보하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지도자의 약속이 아닐까?


▲ 안 이달고 프랑스 파리 시장이 12일(현지시간) 서북부 도시 루앙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이달고 시장은 이 자리에서 좌파 진영을 대표하는 사회당 소속으로 프랑스의 첫 여성 대통령 도전을 공식 선언했다. 2021.9.12 ⓒ 연합뉴스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 아이 급우 중에 3년 전 방글라데시에서 엄마, 오빠와 함께 프랑스에 온 소녀가 있다. 소녀는 올해부터 파리 번화가 중 하나인 오페라 지구에 살고 있다. 파리시가 호텔을 개조해 서민들에게 제공하기 시작한 임대주택 중 하나다.

파리시장 안 이달고는 2025년까지 파리시내 임대주택 비율을 25%까지 올리겠다는 목표를 천명한 바 있다. 이를 달성하려면 4만 3000개의 주택을 임대주택으로 추가 공급해야 하는데 이는 4만 3000호를 건설하는 것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파리시는 코로나로 영업이 힘들어진 호텔들, 에어비앤비로 사용되던 집들을 집중적으로 구입했고 방글라데시에서 온 소녀도 그 수혜자의 한 사람이 됐다. 호화 단장으로 탄생한 사마리텐 백화점 안에도 96개의 임대주택이 들어가 있다

일확천금 너머를 꿈꾸게 하라

2년 전 전신마취 수술을 두 번에 걸쳐 받을 때 의사는 매번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가장 안전하고 평화롭다고 생각하는 곳을 상상하라고. 나의 무의식이 찾아간 곳은 어릴 적 살던 집의 정원이었다. 마당에는 그네가 있고, 라일락과 해바라기, 수국, 장미, 목련, 등나무가 동무처럼 함께 놀아주던 정원이 있다.

그 안쪽에 엄마가 환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다. 내가 돌아간 그 포근한 정서의 고향엔 지금 현대힐스테이트가 들어서 있다. 살던 집뿐 아니라 무지개를 바라보던 언덕, 친구들과 본부를 만들어 보물을 숨겨두던 뒷산, 학교, 우체국, 시장, 미장원, 마을의 그윽한 능선들 모두 통째로 사라지고 밋밋한 현대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스스로 계획한 적 없지만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이 겪는 일이다. 마취에서 깨어나며 생각했다. 국민 모두가 고향을 잃도록 한 개발주의 사회가 저지르는 만행에 대해. 개발 이익을 잘 나눌 생각을 하기 전에 개발주의라는 도그마를 초월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대표적 소설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전제는 개인의 삶을 획일적 모습으로 통제하는 전체주의와 과거를 지워버린 사회다. 과거로부터 인간을 차단하는 것은 원자화된 인간을 생산하기 위한 첫 단계다. 지난 세대의 삶이 현재의 삶과 진화할 수 없도록, 불도저로 주기적으로 밀어버리는 사회. 30년마다 리셋되는 삶을 통해 우리는 아름다운 강산 위에 디스토피아를 짓고 있었던 게 아닐까?

마을 전체를 갈아엎으며 뿌리 뽑힌 삶을 강요받는 대신, 5억에서 10억으로 뛴 아파트 값을 받아 드는 것이 행운이라고 우린 주입받아 왔다. 뿌리 뽑힌 삶은 역사가 전하는 지혜를 흡수할 수도, 정주해 내 후세의 삶까지 설계하는 사치를 꿈꿀 수도 없다. 그것은 사회 성원 전체를 지속적인 집단 트라우마 속에서 살게 한다. 우리도 이제 수세기를 거쳐온 인류의 삶이 새겨놓은 무늬들을 문화적 자산으로 함께 후세와 나누는 기쁨을 사회의 가치 목록에 올릴 때가 되지 않았나. 너무 늦기 전에.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1년 10월 05일, 화 4:1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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