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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온건노선으로 시국 대처
[김재규 평전 제17회] 김재규 취임 이후 일련의 유화 제스처가 나타났다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 = 김재규는 부장에 취임하여 비교적 온건노선으로 중정을 운영하였다.

그동안 정보부가 해온 행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미지의 쇄신이 필요하고, 불교도인 그의 성품이 극렬주의가 아니었다. 또 박정희가 밀어붙이는 강경노선이 지속되다가는 자칫 국가적인 파국에 직면하게 될지 모른다고 우려하였을 것이다.

그의 중정부장 재직시는 내외적으로 유신의 억압체제가 스스로의 하중(荷重)을 견디지 못해 삐거덕거리던 때였다. 체제의 유지는 긴급조치 9호 등 억압조치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그를 중정부장으로 임명한 박 대통령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어떤 면을 보고 임명했는지 알 길은 없으나, 김재규 취임 이후 일련의 유화 제스처가 나타났다.

79년 1월 시인 김지하의 면회 허용, 김철 통일사회당고문의 석방(3월 31일), 민주구국헌장 지지서명운동 관련자들의 석방(5월 10일), 긴급조치 9호위반 복역수 중 신부, 목사, 학생 등 14명의 석방(7월 17일), 시인 고은의 석방(10월 29일), 민주구국선언 관련자 11명의 석방(12월 31일)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조치에 김재규의 역할이 어느 정도 미쳤는지는 알길이 없다. 그러나 전혀 관련이 없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는 가족들에게 "다른 정보부장들이 사람을 잡아들이는 부장이었다면, 나는 놓아주는 부장"이라고 자부했다고 한다. (주석 10)

다른 기록도 살펴보자.

서슬 퍼런 긴급조치 9호로 재야 활동이 극히 위축됐던 유신 말기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지식인들은 김재규 부장의 온건 노선을 감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송기숙 전남대 국문과 교수는 1978년도에 소위 「교육지표 사건」에 연루돼 동료 교수 11명과 함께 남산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송기숙 교수는 "죽을 고문을 당할 각오를 했는데, 수사관이 상부지시라며 의외로 부드럽게 조서를 받더니 그냥 풀어 줬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한동안 그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으나 10ㆍ26이 나자 "아하 싶었다."고 말했다.
(주석 11)

김재규의 손위 동서로 당시 중장의 일본 책임자(대외직함은 주일공사)였으나 10ㆍ26 직후 미국으로 피신했던 최세현 씨의 증언.

김재규의 거사는 우발적인 것인가 계획적인 것인가, 단정할 순 없지만 다분히 계획적이었다.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78년 내가 고려대 교수로 있을 때 김상협 씨, 김재규, 나 셋이서 점심을 먹던 자리였다. 김상협 씨와 내가 구속한 학생들 좀 석방하라고 했더니 김재규가 하는 말이 비장한 표정으로 "조금만 기다려라" 라고 했다. 조금만이라는 게 일주일이 될 수도 있고 일 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그때 벌써 김재규는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다고 본다. (주석 12)

▲ 젊은 날의 추기경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부터 시작된 김수환 추기경과 인권변호사들의 동지적 관계는 70~8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왼쪽부터 송건호, 김수환, 황인철, 홍성우.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유신체제 반대운동에 천주교 신부들이 많았다. 윤형중 신부와 지학순 주교가 1977년 3월 22일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구속되었다. 천주교의 반발이 거세게 전개되고 김수환 추기경이 김재규 부장의 면담 의사를 전해왔다.

김수환 추기경은 두 신부의 석방을 위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 당시 정보부장 정도의 직위라면 추기경의 방문을 받을 수 있겠으나, 겸손했던 김재규 부장은 예의상 자기가 방문하는 것이 옳다며 김수환 추기경을 예방하고 시국 전반에 대하여 수습책을 의논했다. 그후에도 김재규 부장은 김수환 추기경을 몇 차례 만나면서 구속 신부들을 석방하고, 오히려 김 추기경을 통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긴급조치를 해제토록 건의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주석 13)


▲ 김대중의 촛불시위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김대중은 2년 10개월 동안 감옥에 갇힌다. ⓒ 김대중평화센터

김재규는 3ㆍ1구국선언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 복역중이던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 김대중을 서울대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를 받도록 박 대통령에게 건의한 것으로 알려진다. 또 김상협 고려대 총장의 방문을 받고, 구속학생들의 석방을 위해 박찬헌 문교부 장관을 만나 제적학생들의 복적과 구속학생들의 석방의 뜻을 은밀히 건네기도 했다고 한다.

중앙정보부 총선 불개입, 이변 속출

1970년대 후반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제어장치가 안 된 열차의 모습이었다.

그의 주변, 그러니까 청와대나 공화당ㆍ유정회는 물론 정부의 각급 기관은 박정희가 운전하는 열차의 객차일 뿐, 누구 하나 나서서 직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5ㆍ16 쿠데타 이후 이미 17~18년차의 1인 집권기에 접어들어서 더욱 안하무인격이고 절제를 몰랐다. 주변에는 기회주의 충성분자들로 가득차고, 권력핵심에는 강경론자들이 포진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김재규의 온건노선은 점점 설 자리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드러내놓고 김재규를 질시하고 대통령에 접근을 봉쇄하였다.

1978년 말에는 두 가지 큰 정치행사가 예정되고 있었다. 12월의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선거다. 대통령 선거는 통대에 의해 체육관에서 한 두 명 들러리 세워놓고 형식상 치르면 되었지만, 문제는 국회의원 선거였다. 이론적으로는 3분의 1의석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1구2인의 중선거구제여서, 공화당과 유정회가 3분의 2 의석을 차지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총선에서 이변이 벌어졌다.

1972년 대통령 선거와 1978년 대통령 선거는 국민들의 실질적인 참여가 없는 가운데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국회의원 선거는 2명의 동반 당선을 보장한 중선구제인 데다가 3분의 1은 대통령이 임명하게 함으로써 국회는 더 이상 민의를 반영할 수 없게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또 한 번의 대역전극이 선거를 통해 연출되었다. 1978년 12월 12일에 유신체제가 들어선 이래 두 번째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놀랍게도 이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보다 1.1퍼센트 더 많이 득표하였다. 이것은 유신체제가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는 징표로 이해되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야당과 '민주세력'들의 반유신투쟁이 강화되어, 1979년 부마항쟁으로 전개되었다. 12ㆍ12사건 후 기울기 시작한 유신독재 권력은 결국 궁정동 사건으로 몰락하였다. (주석 1)

잘못된 선거제도로 당선자를 신민당이 3분의 1 의석도 차지하지 못했으나 득표율에서는 1.1퍼센트 앞선 것이다.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짓눌려왔던 국민이 분명한 목소리를 낸 결과였다.

김재규는 취임 이래 정치쪽에는 일정한 선을 그어왔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그랬다. 정보기관이나 검ㆍ경과 같은 '수직상'의 체계가 엄격한 권력기관은 수장의 성향에 따라 풍향이 달라진다. 그의 온건노선은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예컨대 78년 12ㆍ12총선에선 야당인 신민당이 집권당인 공화당에 비해 득표율에서 1.1%를 앞섰다. 이때 그는 "유정회가 있는데 굳이 부정선거를 할 필요가 없다"고 건의, 이 선거에서 행정기관은 공화당에서 매정하게 생각할 정도로 중립을 지켰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79년 신민당 5ㆍ30 전당대회 때도 '중도통합론'의 이철승 씨 대신 '선명야당론'의 김영삼 씨를 측면지원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5월 29일 밤 당시 연금중인 김대중 씨의 활동을 방임, 그가 김영삼 측 단합대회에 참석케 함으로써 김영삼 열풍을 일으켜 그 이튿날 전당대회장으로 연결시켰던 것이다.

또한 이 무렵 김재규는 체제의 변화를 위해 박정희에게 간언을 거듭했다고 한다. 예컨대 77년 6월 박정희에게 "직선제에서 단독으로 출마하셔도 당선될 수 있습니다"며 직선제를 건의했고, 79년 7월과 8월 "긴급조치 9호는 칼이 너무 녹슬고 무디어졌습니다. 시퍼런 칼을 주십시오"라는 말로 9호의 독소조항을 없애고 규제범위를 훨씬 줄인 10호를 건의했으나 박정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김재규가 보고를 한 다음에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는 사람은 꾸지람을 듣게 된다는 말이 나올 만큼 김재규의 보고는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주석 2)

독재자에게 온건론은 '불충'으로, '강경 = 유능 = 충성'으로 받아들인다. 이승만 곁에서 김창룡이 설쳤듯이 박정희 주변에는 차지철이 2인자 행세를 톡톡히 하고 있었다.

총선에서 신민당의 1.1% 승리는 정국에 큰 변수로 작용했다. 우선 야당 의원들이 긴급조치의 오랜 무력증에서 벗어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9년 5월 30일로 예정된 신민당의 정기전당대회는 국민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동안 박정희는 이철승 신민당 체제를 비호해왔다.


▲ 1975년 5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을 접견하고 있다. ⓒ e-영상역사관

재야와 학생들은 어용야당, 사쿠라 당수라고 야유하고, 당내에서도 선명노선을 바라는 분위기가 높아졌다. 뒷날 드러나게 되었지만 차지철은 이철승을 밀었지만, 중정은 과거와는 달리 야당의 전당대회를 방치한 것이다. 그래선지 이변이 일어났다. 김영삼이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에 당선되었다.

신민당의 김영삼체제 출범은 정계의 폭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 체제가 등장하자 새로운 공작을 개시했다. 그 하나가 김영삼이 취임 후 처음으로 가진 6월 11일의 외신기자클럽 초청연설에서 남북한의 긴장완화를 위해 '김일성과 면담용의'를 표명한 데 대해, 북한이 김일성의 이름으로 환영담화를 낸 것을 빌미로 삼았다.

김영삼의 이 발언과 관련하여 상이군경과 반공청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마포 신민당 당사에 난입하여 당원들을 폭행하는가 하면, 여당에서도 발언취소를 요구하는 등 이 사건은 정치문제로 비화되었다.

다른 하나는 신민당의 일부 비주류 측이 몇 사람의 당원자격에 대한 유권해석을 질의한 데 대해 중앙선관위가 국회의원 선거권이 없는 자는 정당의 당원이 될 자격이 없고, 선거법으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그 집행이 종료된 후 6년이 경과하지 아니한 자는 국회의원 선거권이 없다고 유권 해석하여 정계에 새로운 불씨가 되었다.

주석
10> 김대곤, 앞의 책, 57쪽.
11> 『주간중앙』, 1993년 10월 25일자.
12> 최세현,「나는 미국으로부터 어떤 언질도 받지 않았다」,『말』, 1993년 11월호.
13> 오성현, 앞의 책, 139쪽.
14> 서중석, 『대한민국 선거 이야기』, 189쪽, 역사비평사, 2008.
15> 천호영, 「10ㆍ26과 김재규의 진실」, 『말』, 1993년 11월호.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1년 8월 16일, 월 4:53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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