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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생활 에세이
 
암 투병 중 맞이한 회갑... 특별한 잔치를 열다
[송성영의 암과 함께 살아가기] 오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회갑


▲ 임선생네 가족과 함께 아주 조촐한 회갑잔치를 벌였습니다. ⓒ 송성영

(서울=오마이뉴스) 송성영 기자 = 얼마 전 내게도 회갑이 찾아 왔습니다. 회갑은 '육십갑자의 갑(甲)으로 돌아온다'는 뜻으로 우리 나이로 예순 한 살인데, 불과 2년 전 까지만 해도 나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은 내게 회갑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2년 전, 그러니까 정확하게 27개월 전. 중기 위암 수술을 거부하고 자연치유를 시작한 내게 암 산업 통계는 최대 2년 정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 판정을 내렸으니까요. 거기다가 병문안 와서 원치 않는 사주를 봐주겠다며 극구 불필요한 친절을 베풀었던 사주쟁이 역시 내게 최악의 해(죽을 팔자)라며 회갑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주를 내놓았습니다. 어쨌든 수술을 거부한 시점에서 2년하고도 3개월이 지난 지금 멀쩡하게 살아 글을 쓰고 있으니 암 산업 통계와 사주는 보기 좋게 빗나간 셈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회갑은 결혼식에 버금가는 큰 잔치 날이었습니다. 회갑을 맞이한 어르신 집에 천막을 쳐 놓고 농악을 두들겨 가며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였습니다. 물론 경제적인 사정에 따라 잔칫상 크기가 다르긴 했지만 회갑을 넘기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시대였으니 한 인간이 태어나 육십까지 살았다는 것은 크게 축하 받아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만방자하게도 하루하루를 생일날처럼 살고 지고자 했기에 평소 누굴 불러 생일상을 푸짐하게 따로 차려 본 적이 없습니다. 회갑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큰 아들(이후 큰 행자) 인효는 나름 자식 된 도리를 다하겠노라 1년 전부터 평소 알고 지내는 뮤지션들과 함께 겸사겸사 작은 음악회를 열어 보겠노라 했습니다.

암 투병 중 맞이한 회갑

요즘은 장수 시대라서 회갑 잔치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지 애비가 내일 당장 죽음의 전령사가 찾아올지 모르는 시한부 삶을 살고 있기에 자식 된 도리를 다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코로나19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여 지난해 두 행자가 1년에 두 차례, 물 빠짐이 가장 좋은 날에 맞춰 멀리 고흥 앞바다에서 채취해온 귀한 돌미역 국으로 만족하고자 했습니다. 돌미역은 산막을 찾아온 몇몇 분들에게 나눠 주고 지난 1년 동안 틈틈이 끓여 먹고도 남아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두 행자가 돌미역 국으로 지난 1년 동안 틈틈이 내 회갑 상을 차려 주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 지난해 두 행자가 멀리 고흥 앞바다에서 지 애비 위암에 좋다는 돌미역 1년 먹을 분량을 채취해 왔습니다. ⓒ 송성영

하지만 평소 먹던 반찬에 미역국으로 큰 아들과 조촐한 밥상을 마주하고 보니 자린고비도 아닌 고집불통의 내 모습이 보였습니다. 평생의 화두로 삼고 있는 '소박한 삶'에 대한 신념을 지키기 위해 회갑 날에 이르기까지 궁상떠는 것 같았습니다. '회갑날도 미역국 하나로 소박하게 보내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소박한 삶'을 선언 하는 것 같아 영 마뜩찮았습니다.

"인효야 내가 좀 심한 거 같지? 내가 아무리 폼생폼사로 살고 있다지만 너무 폼 잡는 것 같아 맘이 불편하다."
"그렇지? 그래도 회갑날인디."
"그럼 좋다. 간단하게 잔치 벌이자."
"무슨 잔치?"
"임 선생네 애들 불러 맛있는 잔치 벌이자!"
"좋지! 좋아."

회갑이라 해서 특별히 뭘 준비하지 마라, 미역국 하나로 해결하자는 고집불통 아버지의 눈치를 보고 있던 인효 녀석은 좋아라 했습니다. 산 아랫집 임 선생에게 시치미 딱 떼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임 선생! 시간 나면 산막에 올라와. 애들 데리고..."
"뭔 일 있습니까?"
"아니 그냥 인효가 떡볶이를 맛있게 해서 함께 먹자고. 애들 떡볶이 좋아하잖어?"

아이들이 오기 전에 맛있게 요리한 떡볶이와 식이요법으로 암 치유중인 지 애비가 유일하게 한두 조각 먹을 수 있는 고구마 케이크를 준비했습니다. 헌데 산막에서 먼 거리에 있는 한살림 매장까지 가서 사온 케이크는 손바닥만 했고 아이들에게 줄 빵과 과자가 없었습니다.

본래 인효에게 아이들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것들을 푸짐하게 사오라고 내 현금카드를 내밀었습니다. 내 현금카드에는 몇 개월 전부터 몸이 허락하는 대로 지금처럼 틈틈이 쓰고 있는 <오마이뉴스> 연재 기사의 '좋은 기사 원고료'가 넉넉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요즘 아빠 부자 됐다. 이 카드 가지고 가서 애들 먹을 것 좀 사와라."
"에이참, 됐어! 그래도 오늘 아빠 회갑인디... 장남을 뭘루 보고!"

녀석이 큰 소리 뻥뻥 쳐가며 이번만큼은 자신의 돈을 쓰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런데 한살림 매장에서 막상 자신의 카드를 열어보니 몇 푼 들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포크송 경연대회 참여로 방송국을 뻔질나게 오가며 교통비며 식비며 이렇게 저렇게 쓴 비용 때문에 잔고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서울 갈 차비를 남겨 놓고 자신의 현금 카드를 탈탈 털어 매장에 딱 한 개 남았다는 손바닥만한 고구마 케이크와 떡볶이 재료를 사놓고 보니 아이들을 위한 빵과 과자를 사기에는 무리였던 것이지요.

"에이구 짜식이! 내 카드 가져가랬더니. 누굴 닮아서 그리 고집불통이냐!"
"아빠 닮아서 그렇지 뭐."
"그런가? 그러네. 아이들 오기 전에 아빠 카드 가지고 얼른 나가서 과자하고 빵 좀 사와라."

인효가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있는데 임 선생이 3남매를 데리고 왔습니다. 부부 교사인 임선생네는 본래 3남 1녀, 4남매의 자식을 두고 있는데 학교에 간 임 선생의 아내와 이제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큰 아들 현석이가 빠졌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동생들을 데리고 산막을 찾아오던 녀석이었습니다. 이제 아빠 따라 나서거나 동생들과 노는 것이 시시해진 사춘기가 온 것입니다.

"인효! 어딜 가려고?"
"빵하고 과자 좀 사려고요..."
"됐어, 가긴 어딜 가. 애들 집에서 자주 먹는 게 빵하고 과잔디. 안 사와도 돼."

전자레인지에 들어간 고구마케이크

먹성 좋은 임 선생네 큰 아들 현석이가 없는 상태로 고구마 케이크와 떡볶이로 조촐한 회갑 잔치를 벌였습니다. 빵과 과자가 없어 내내 아쉬웠는데 생각해 보니 내가 몸에 좋지 않다고 먹지 않는 과자나 빵을 아이들에게 권하는 것이었으니 차라리 잘 됐다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갑자기 웬 떡볶인가? 임 선생에게 부담 줄까봐 회갑 얘기를 꺼내지 않았기에 영문도 모른 채 땀을 뻘뻘 흘려가며 맛있게 먹어준 임 선생과 아이들이 고맙고 고마웠습니다. 하지만 아이들 먹을 빵과 과자도 없이 떡볶이 하나 달랑 내놓은 큰 행자의 어수룩한 실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 큰 행자가 찬 음식 먹으면 탈나는 지 애비를 위해 전자레인지로 돌려 녹아버린 고구마 케이크 ⓒ 송성영

노래만 할 줄 알지 세상 물정에 어둔 촌놈, 큰 행자. 차게 먹도록 돼 있는 고구마 케이크를 찬 음식에 탈이 나는 지 애비에게 따듯하게 데워준다고 전자레인지에 돌렸습니다. 그랬더니 전자레인지에서 나온 케이크가 생크림이 줄줄 흘러나올 정도로 다 녹아 버렸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들 와 하하하 웃어가며 숟가락 들고 맛나게 퍼 먹었습니다. 먹을 게 별로 없으면 모든 것이 맛있습니다. 어수룩한 큰 행자를 놀려가며 진수성찬 따로 없이 다들 기분 좋게 맛있게 먹었습니다. 군 생활 하고 있는 작은 행자 인상이가 빠져 아쉽긴 했지만 나름 행복한 회갑 잔치였습니다.

다음날 큰 행자는 친구들 만나러 서울로 콧바람 쐬러가고 나는 오랫동안 버텨온 사랑니가 흔들려 읍내 치과에 갔습니다. 사랑니를 뽑고 나서 거즈를 물려 놓고 간호사가 항생제와 진통제 나흘치 처방전을 내밀었습니다.

"이틀 치만 처방해 주세요. 내가 위가 좋지 않아 약을 너무 많이 복용하면 안 될 것 같네요."

하루치만 처방해 주세요. 하려다가 간호사에게 미안해 이틀 치만 처방해 달라고 했는데 이틀 치가 아침점심저녁 여섯 번 복용할 양이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두 차례의 위기와 가끔씩 통증이 찾아오곤 했는데 고집스럽게 단 한 차례도 위장약이나 진통제 따위를 복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부실한 면역력으로 발치한 자리에 염증이 생길 가능성을 배제 못해 딱 한 차례만 복용했습니다. 그럼에도 일주일 넘게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면역력이 형편없다는 암환자가 이 정도이니 건강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항생제나 진통제는 꼭 필요한 만큼만 복용하는 게 좋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입니다.

사랑니 뽑힌 자리의 피를 멈추기 위해 거즈를 물고 산막에 돌아오자 대전에 계시는 엄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아이고 셋째야! 깜박 했다. 달력에 표시를 해놨는데도 니 환갑을 깜박 했구나. 미역국은 먹었냐?"
"아이구 인효가 푸짐하게 차려 줘서 잘 먹었어요. 걱정마세요."
"아이구 야야 어쩌냐!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어떡허냐!"

93세 노모는 내가 태어난 날을 60년 동안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니 내 생일뿐 아니라 칠순이 지난 큰 형님에서부터 7남매 모두의 생일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자식들 입히고 먹이고 가르치기 위해 회갑이 지날 무렵까지 평생 일손을 놓지 못했던 엄니, 당신의 회갑 날에는 당신 스스로 모은 돈으로 주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7남매와 그에 딸린 손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복을 새로 해 입혔습니다.

구순하고도 삼년이 지났지만 엄니는 회춘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영민합니다. 엄니 앞에서 모두가 쉬쉬하여 셋째가 이혼 했다는 사실이나 암 투병 중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지만 옷장 어느 구석에 소중한 그 무엇인가를 숨겨 놓으셨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하십니다. 거기다가 여전히 부엌일을 합니다. 자식이나 손자들이 찾아오면 손수 밥상을 차려 주실 정도로 정정합니다.

"내가 복이 많나 보다. 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그러셨다. 자신의 몫까지 살다가라구. 그래서 내가 이리 오래 사나 보다."

평생 농사꾼이었던 아버지는 회갑이 찾아온 그 해 돌아가셨습니다. 농토가 전부였던 마을길에 신작로가 들어설 무렵 농기구 대신 술병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위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위출혈로 쓰러졌던 아버지와 닮은꼴이지만

그 무렵 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수업 중 황급한 호출로 어린 여동생의 손을 잡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누워 계신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병원에 찾아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 보다 두 배가 넘는 지게질을 했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던 아버지는 그 며칠 후 산소마스크를 벗었습니다.


▲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족력이 크다는 위암. 가족력은 몸과 마음자리를 변화시키면 얼마든지 극복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사주쟁이의 사주와 암산업의 통계치를 뛰어넘어 오지 않을 것이라 했던 회갑을 보냈으니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 송성영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는 암에 대한 의학기술이 미비했기에 뭔 병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아버지 역시 나처럼 위암일 가능성이 컸습니다. 내가 위암으로 쓰러질 때 다섯 봉지의 수혈을 해야 할 정도 피를 쏟았듯이 아버지 역시 양동이에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냈습니다.

그럼에도 주변 사람들의 표현대로 기적적으로 살아나셨고 몇 년도 채 지나지 않아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건강이 회복되자 다시 술병을 드셨습니다. 술에는 장사가 없다고 하지만 그 후로 10여년을 더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머리맡에 소주병을 줄지어 비워놓고 돌아 가셨습니다.

위암은 가족력이 있다고 합니다. 나는 아버지와 닮았습니다. 우리 가족들 중에서 생김새는 물론이고 성격이나 먹는 습관 등등 아버지와 가장 많이 닮았습니다. 아버지와 나를 비교하면 위암이 왜 가족력을 무시 할 수 없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교훈 삼아 내 생명은 좀 더 연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건강 체질의 아버지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시고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위암과는 상관없이 최소한 몇 년은 더 생존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의 나처럼 술과 담배를 끊고 식이요법 명상 기혈운동을 꾸준히 하셨더라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라 봅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으니까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족력이 크다는 위암. 가족력은 몸과 마음자리를 변화시키면 얼마든지 극복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사주쟁이의 사주와 암산업의 통계치를 뛰어넘어 오지 않을 것이라 했던 회갑을 보냈으니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회갑 지나 새로 한 살을 먹으면서 사랑니를 뽑았으니 다시 사랑할 수 있거나 새 치아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죠? 새 치아는 고사하고 엄니보다 먼저 세상을 뜨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지만 오늘밤 잠들어 영영 깊은 잠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다 해도 후회는 없습니다. 하루를 멀쩡하게 살다가 죽은 듯이 잠드는 일상처럼 죽음을 받아들이고자 하니까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몫으로 건강하게 장수하시는 엄니가 그러하듯 아버지처럼 내가 일찍 세상을 뜨면 내 자식 중에 누군가가 그 만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럼 됐습니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1년 2월 12일, 금 1:1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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