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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족/통일
 
"나에겐 시간이 없어요, 북녘 땅에서 죽고 싶습니다"
88세 폐암 말기의 비전향 장기수 강담 "아내와 아이들을 볼 수 있을까요"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을 맞아 연속 인터뷰가 나갑니다. 이 글은 그 첫번째 인터뷰입니다. [편집자말]

(서울=오마이뉴스) 민병래 기자 = 강담은 아내와 양심수후원회 이정태 위원 손을 잡고 공주에 있는 요양원 '상록수'에 들어갔다. 해질녘, 원장이 휠체어를 밀어주어 금강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5월의 바람은 부드럽게 살랑거렸고 멀리 강너머로 저물어가는 햇빛은 주변을 은은하게 물들였다.

원래는 김포의 집과도 가깝고 같은 처지의 장기수들이 있는 김포의 요양원에 가려 했다. 그런데 대기가 길어져 양심수후원회 사무국장을 했던 이가 운영하는 이곳으로 왔다.

"집 사람은 잘 가고 있을래나, 차가 막힐 텐데..." 먼 하늘을 바라보며 그는 중얼거렸다.

올해 88살, 비전향 장기수 강담은 지금 말기 폐암 환자다. 올해 초 건강검진에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폐가 까맣다며 큰 병원에 가보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동안 가슴이 아팠다. 1월 22일 이대 발산병원에 가니 이미 폐암 4기이고 물이 많이 찼다며 3일이나 물을 뺐다. 1월 29일과 2월 9일 두 번에 걸쳐 항암치료를 받았다. 구순을 바라보는 그는 견디지 못해 토하고 쓰러졌다. 결국 항암치료는 포기하고 약만 한 보따리 처방 받았다.

강담은 2005년 뇌경색을 앓고부터 건강이 악화되었다. 야간경비 일을 하던 시절,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다행히 회사동료가 재빨리 대처해줘 치료를 받고 회복되었다. 그런데 2017년에 다시 뇌경색이 왔고 이후부터 말이 어눌해졌다. 움직임도 굼뜨게 되고 치매 증상도 나타나 점심 먹고서는 "이제 저녁 먹었으니 자리 피고 자자"고 말해 아내에게 구박도 꽤 들었다.


▲ 요양원 거실 앞에서 강담 선생 요양원은 작아서 10명 내외 노인들이 거주한다. ⓒ 민병래

강담은 1965년 울릉도 해상에서 잡혔다. 함남 홍원이 고향인 그는 6.25 전쟁이 끝나고 입대해 두만강유역 경비함대에서 특무상사로 8년간 복무했다. 제대 후 해양고등학교에 들어가 항해사 자격증을 땄고 청진수산사업소의 3등 항해사로 사할린을 오갔다.

1964년 8월, 중앙당 대남연락사업소는 해군 시절 노동당에 가입했던 그를 소환했다. 그는 "통일사업을 해보자"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때부터 고성 해금강부대에 소속돼 기밀문서를 전하거나 연락원을 실어날랐다.

1, 2차 업무는 주문진과 속초였고 3차 업무는 1965년 3월 공해상에서 울릉도 바다 쪽으로 들어가 접선하는 것이었다. 그날 파도와 눈보라가 심했는데 멀리 구름 같은 게 보였다. 10노트 정도 속도로 천천히 다가갔는데 가까이 가보니 남측의 91구축함이었다.

일장기를 달고 일본 어선 흉내도 내봤지만 남측은 속지 않았다. 황급히 선장 주재로 8명의 대원들이 회의를 열고 전투를 결정했다. 무장선이 아니어서 가지고 있는 화력은 반탱크 수류탄 정도. 500톤 정도 구축함에 수류탄을 던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결국 방향을 돌려 도주하는데 구축함에선 "멈춰라" "항복하라"는 방송이 계속됐다. 도망가는데 먼 하늘에서 비행기가 다가왔다. 강담 일행은 원산에서 지원이 온 줄 알고 환호했다. 알고 보니 강릉비행장에서 구축함과 협공을 하려고 뜬 전투기였다. 공중에서 강담이 탄 배의 앞쪽으로 기총소사를 퍼부어대자 결국 배는 멈출 수밖에 없었고 8명은 모두 체포되었다.

강원도 삼척항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이송되어 미군 합동수사본부와 방첩대에서 6개월간 조사를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때 라병구 선장과 이준영 부선장은 사형을 언도 받았다. 강담은 그로부터 24년간 복역하고 수번 1230을 달았던 광주교도소에서 1988년 출소했다.


▲ 서대문 형무소 감방 앞에서 1988년 12월에 출소 후 처음 찾은 서대문형무소 수형 당시 감방 앞에서. (당시 66세). ⓒ 강담 제공

금강둑으로 스며들던 노을은 금세 빛을 잃어갔다. 해가 떨어지면서 기온이 내려가 강담은 콜록콜록 기침이 잦아졌다. 아내가 잘 올라가고 있는지 전화하려다 망설였다. 오후에 올라가면서 "마음 단단히 먹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했고 그새를 못 참아 전화했냐고 타박할 것 같아서였다.

동사무소에서 올린 결혼식

강담이 남쪽에서 결혼한 것은 89년 12월 1일, 강담의 나이 57세 때였다. 처형이 다니는 교회의 권사가 소개를 해줬다. 아내는 그때 초혼에 실패하고 동생 집에서 근근히 살고 있었다.

첫 번째 만남은 서울 화곡동의 숙다방, 열 다섯살 아래인 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 강담은 나이를 열 살이나 속였다. 또 북에서 내려왔다는 얘기도 못하고 "지금은 화곡동에서 150만원짜리 방 한칸에 살고 있고 모델하우스에서 야간 경비일을 한다"고 소개했다.

두 번째로 숙다방에서 만났을 때 여러 번 망설이다가 강담은 털어놓기로 했다. (그래도 나이만은 고백하지 못하고) "나는 북에서 통일사업 하러 내려왔다 잡혀서 24년간 교도소에서 살았다. 북에 아내와 두 아이들이 있고 내려올 때 막내는 임신 상태였다"고 고백했다. 결혼하면 "어떻게든 집은 해결하겠다"는 얘기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숨죽이며 듣던 아내는 어느새 식은 커피를 냉수처럼 들이켰다. 숙다방의 마담은 중늙은이 남녀가 데이트인 듯 아닌 듯 나누는 대화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마담이 '커피 세잔' 주문 전화를 받을 때 아내는 "나 혼자 결정할 수 없다. 오빠들과 상의를 해야 한다"며 강담을 마담 눈길에 남겨놓고 빠져 나갔다.

처가에서는 단연코 반대였다. 큰처남은 6.25참전 군인이었고 장교로 예편한 몸이어서 더 심했다. 둘째 처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내는 동생 집에서 짐을 꾸려 강담의 화곡동 단칸방으로 찾아왔다.

놀란 강담 앞에서 아내는 북에서 내려왔다는 고백을 들었을 때 도와주고 싶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나 나나 오갈 데 없는 몸이다. 나는 결혼에 실패했고 당신도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지 않냐, 우리 잘 살아보자. 여기서 실패하면 안 된다며 속마음을 담담하게 들려줬다. 두 사람 사이에는 짧으면서 긴 침묵이 흘렀다. 단칸방의 형광등이 깜박 졸 때 강담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움켜쥔 그의 손등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그렇게 단칸방에서 신접살림이 시작됐고 다행히 강담을 챙겨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의 딱한 사정을 듣고 당시 화곡동 동장이 동사무소를 결혼식 장소로 내줬다. 사진 촬영은 생략했고 신혼여행은 먼 훗날을 기약했지만 어엿하게 올린 예식이다. 동장은 또 임대아파트도 알아봐주고 서류까지 챙겨주어 92년 임대 아파트 단지에 입주했다. 강담의 말대로 "집은 어떻게든 해결"한 셈이다.

징역에서 알게 된 사람 소개로 만난 건설회사 대표는 모델하우스 경비 일을 할 수 있게 자기 회사로 거둬주었다. 결혼 음식까지 장만해줬던 그는 92년 임대아파트에 입주할 때 집들이겸 강담의 환갑잔치까지 열어주었다.

강서경찰서 보안과도 '사찰'만이 아니라 나름 역할을 했다. 건설회사가 부도가 나 모델하우스 경비 일이 끊어졌을 때 강담은 경찰서를 찾아갔다. "먹고 살게 해주든지, 북으로 보내주든지 한 가지를 택하라"하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보안 2계장은 "강 선생님, 왜 이러세요"하며 분주히 움직여 강서구의 한 아파트 단지 경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런 도움 덕에 연명했다. 물론 아내도 쉼 없이 유치원 청소며 반찬가게 같은 데서 일을 했다.

어느새 서쪽 해가 금강너머로 완전히 지고 강변에는 어둠이 내린다. 강담은 겉옷을 하나 더 입고 목도리를 둘렀다. 강변 주위로 등불이 하나둘 켜진다. 함께 노을을 보던 강 원장이 북녘 자제분들 얼굴은 기억나냐고 묻는다. 교도소에서 복역할 때는 또렷했던 얼굴들인데 이제는 희미하다. 떠나올 때 북녘 아내 박원옥은 28살, 애들은 네 살, 두 살이었다. 아내에게 그저 "다녀올게" 마실가듯 인사하고 나왔는데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를 줄 몰랐다. 죽기 전에 한번, 꼭 한번만 볼 수 있다면...

강제전향의 아픈 상처

사실 강담은 북으로 간다는 건 꿈도 못 꿨다. '강제전향'의 아픈 상처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15선언으로 2000년 9월 2일 63명의 장기수가 북으로 송환되었다. 이때 '전향했다'는 이유로 정순택 등 33명이 송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면서 '강제전향'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 2011년 11월 ‘고난 함께 하는 사람들’ 기행, 고성전망대에서 고향을 지켜보며 2004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강제전향은 원천무효다라는 판결이 나면서 강담 선생은 장기수들과 조금씩 교류를 해나갔다. 맨 오른쪽이 강담. ⓒ 강담제공

전향공작은 1973년 8월 2일 법무부가 '좌익수형자 전향공작전담반 운영지침'을 내려보내면서 본격화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민주화 세력의 저항에 직면한 터라 형기가 다 된 장기수들이 출소하는 게 불안했다. 그래서 전국 교도소에서 일제히 전향공작을 전개했다.

중앙정보부 주도로 이뤄진 전향작업은 1973년 9월부터 시작되었고 초기에는 주로 교화사를 통해 설득했다. 그러나 이게 통하지 않자 폭력을 휘둘렀다. 강담이 있던 광주교도소에서는 73년 11월 14일 관구부장이 (장기수들이 있는) 특별사동에서 "전방(방을 옮김) 준비를 하라"고 갑자기 외쳐댔다. 또 운동, 편지, 목욕, 약처방, 면회, 독서 등 모든 게 금지된다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0.75평 방에 열다섯 명씩을 집어넣었다. 눕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어설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다음 날 민방위 훈련이 끝나자 마자 깡패들은 '떡봉'(떡을 치는 방망이)이란 완장을 차고 "전향하라"고 악악대며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광주교도소 교무과장이 직접 선발한 원00, 정00 등은 수갑과 포승을 들고 감방 열쇠까지 지닌 채 설쳐댔다.

폭력만이 아니라 물고문까지 해댔고 12월 추위에 세면장으로 끌고 가 옷을 벗기고 찬물을 끼얹었다. "전향하라"고 악을 쓰며 물 적신 포승줄로 언 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장기수들은 살갗이 찢어지고 온 몸에서 피가 흐르는 고통을 겪었다. 강담도 예외는 아니었다. 힘겹게 강제전향에 버티던 어느 날 그가 모르스 부호로 옆방과 통방 중이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크다고 교도관들이 들이닥쳐 "언제 전향서 쓸 거야?"하면서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 이때 고막이 터질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

당시 광주교도소에서 이런 만행으로 1973년 11월부터 1974년 4월까지 특사에 있던 장기수 68명 중 40명이 강제전향 처리되었고 강담도 이 부류에 끼고 말았다.

그래서 강담은 출소 후에도 전향 '당했다'는 죄책감에 출소 장기수들과 교류하지 못했다. 또 광주교도소에 있을 때 "당이 울릉도 작전에 대해 비판한다"는 얘기를 바람소리처럼 들었다. 그것도 마음의 짐이 되어 그저 아내와 함께 웅크리고 살았을 뿐이다.


▲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배지를 요양원에서도 단정하게 차고 있는 모습. 그는 민가협에서 통일운동 공로패를 받았다. ⓒ 강담제공

그런데 '전향했다'는 이유로 1차 송환에서 제외된 정순택 등 33명이 2001년 6월 3일 '장기구금양심수 전향무효선언과 북녘고향으로의 송환 촉구 기자회견'을 했다. 이에 발맞춰 비전향장기수 송환위원회가 통일부에 제2차 송환명단을 제출했다.

한편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강제전향은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이며 "강제전향에 저항하다 숨진 장기수는 민주화운동 관련 사망"이라고 발표했다.

이런 국가기관의 결정에 힘입어 강제전향은 원천 무효가 되었다. 마침 통일부 장관에 정동영이 취임하면서 2005년을 전후해 2차 송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래서 강담도 용기를 내어 신청서를 냈다. 그런데 보수단체의 반발, 국군포로와 맞교환 등이 논란이 되면서 송환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후 10여 년을 속으로 삭히면서 세월만 보내다가 문재인 정부 들어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자 큰 기대를 걸었다. 지금은 예전처럼 다시 속만 태우고 있지만...

강변이 어두워지자 "이제 바람이 차가워요, 들어가시지요"하고 강 원장이 권한다. 쿨룩쿨룩 밭은 기침이 나오고 가래도 끓는다. 의사 얘기로는 길면 반년이라고 했는데 올 1월에 말기 암 판정을 받았으니 한 달이나 남았으려나, 요양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이제 컴컴하다. 강담은 다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아내가 집에 잘 가고 있는지 마음이 영 불안하다.

아내는 오후에 강담이 입소해 방도 안내받고 목욕도 할 무렵, 마당에서 잠시나마 친한 강 원장에게 그동안 쌓인 얘기를 털어놨다.

"원장님에게 이 양반을 맡기게 돼서 정말 마음이 무겁네요. 어젯밤엔 말도 못할 정도였어요. 자다 말고 남편이 몸을 뒤척이며 지팡이를 찾는지 방바닥을 휘휘 젖더라구요. 이젠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잖아요. 갑자기 '나 좀, 나 좀' 소리치길래 그냥 들쳐 일으켜 화장실로 가는데 줄줄 흘러서 기저귀 밖으로 다 새는 거예요. 하도 변비가 심해서 관장약을 세게 썼더니 그랬나 봐요.

할 수 없이 옷 다 벗겨 씻기고 기저귀 갈아입혀 눕혔더니 또 줄줄, 요도 다 젖고 방바닥까지 흐르고 내 옷도 범벅이 돼고. 그래, 어떡해. 다시 씻기구 요는 걷어서 백리터짜리 쓰레기봉투에 밀어넣고, 바닥은 걸레로 몇 번씩 닦고, 겨우 정리하니 허리가 얼마나 아픈지.

아, 그런데 이 양반 뻗어 있는 위로 칠순 사진이 벽에서 떡하니 웃고 있더라구. 그래서 당신이 오만 정을 다 떼고 갈려구 작정했나 보네, 내가 막 성질을 내 버렸지."


▲ 강담 선생의 사모님 모습 강담 선생을 품어준 사모님은 한 많은 세월을 이야기하며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 민병래

가만히 듣고 있던 강 원장이 강담의 아내 손을 꼭 잡아준다. "고생하셨어요, 이제 저희가 잘 돌봐드릴게요"하며 다독인다. 강담의 아내는 고맙다고 인사하면서도 얘기를 이어갔다.

"우리 집이 11평이니 방이 거실이고 거실이 부엌이야 정말 코딱지 같은데 산송장이래도 사람 있을 때 하고 없을 때 하고 같나. 이 양반 뇌경색 앓고서도 야간 경비 일을 쉬지 않았잖아. 아침에 퇴근할 때 맞춰 밥상 준비하고, 들어오면 '자기 왔어' 내가 살갑게 대해줬는데... 이제 그런 재미도 다 없어졌네."

아내는 북으로 가라고 했다

강담의 아내는 깊은 한숨을 내 쉰다. 오후 햇살은 '상록수'에 꾸물꾸물 비집고 들어왔다. 간간히 금강 쪽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이른 더위를 식혀주었다. "세상일이 묘해요" 들려주고 싶은 게 많아선지 목욕을 마치고 거실로 나오는 강담의 모습을 창문으로 보면서 얘기는 이어졌다.

"이 양반이 2005년돈가? 며칠간 밥도 안 먹고 못 피는 담배를 피더라구, 그래서 내가 욕을 해댔지 뇌경색 앓는 사람이 담배를 피면 어떡하냐구, 그래도 담배를 안 끊는 거야. 그래서 뭔 일이 있나 속으로 나도 끙끙 앓았지. 근데 어느 날 저녁 먹고 이 양반이 출근하는데 일기가 보이더라구, 이 양반이 대단한 게 눈 침침해도 일기를 빼놓지 않고 써, 뭐 군사훈련 중단하라고 미군부대 앞에서 시위한 얘기부터, 그런데 2차 송환인가에 신청하고 싶은데 15년이나 나이 많고 북에서 내려온 자기를 받아준 걸 생각하면 그럴 수 없다고 써 있더라구, 그래서 알았지. 이 양반이 이것 때문에 마음 고생하다가 담배까지 폈구나.

그래서 담날 퇴근해서 왔을 때 내가 앉혀놓고 그랬어. 나는 괜찮으니 당신 북으로 가라, 고향 아니냐? 당신 맘 다 안다. 그랬더니 이 양반이 내 손을 잡고 연신 고맙다 고맙다 하는 거야. 60년간 기다렸을 북쪽 아내에게 "여보 나 돌아왔어, 고생 많았지..." 그 말 한마디만은 하고 싶다는데 그 모습이 짠하더라구. 사실 난 속으로 서운했지, 펄쩍 뛰지는 않아도 당신 두고 내가 어딜 가냐 그런 소리 듣고 싶었는데 그 다음 날부터 송환서류 낸다고 들떠서 움직이는 모습 보니 만정이 떨어지더라구, 그때는 이 양반이 나를 두고 떠나겠다고 했는데 이제는 내가 이 양반을 여기로 떠나보낸 셈이네..."

강 원장은 얘기를 듣다가 그녀에게 다가가 등을 어루만지고 가볍게 포옹을 했다. 그때 강담이 현관문을 열고 휠체어를 타고 나왔다. 강담의 아내는 등을 돌려 눈물을 훔치더니 "여보, 나 인제 올라갈게. 당신 여기서 마음 단단히 먹고 잘 있어. 당신은 이제 여기서 여생을 마쳐야 하고 나는 집에서 죽어야 해" 하고 강담에게 다짐하듯 얘기한다. 강담은 입을 벌린 채로 아내에게, 또 함께 배웅 와준 동지에게 어서 올라가라고 손짓을 했다.

코로나로 모든 요양원에 면회금지 명령까지 내려진 상황이라 이 날 올라가면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이별이다.


▲ 금강둑에서 떠나 보낸 아내를 생각하는 강담. 코로나로 모든 요양원의 면회가 금지, 그는 생이별 상태다. ⓒ 상록수 요양원 제공

그렇게 속마음을 쏟아놓고 그렇게 떠난 보낸 아내를, 강담은 금강둑에서 노을을 보는 내내 생각했다. 집에 잘 도착했는지, 자기가 없는 집에 냉기가 돌지는 않는지 못내 궁금하고 걱정이 됐다. 금강둑에서 요양원으로 돌아가는 길, 이제는 목소리를 들어봐야겠다고 번호를 누르다가 "마음 단단히 먹고 있으라"는 소리나 또 들을까 봐 통화 대신 문자를 보냈다.

"여보 북녀게 내 애들 선자, 길모가 당신 여생을 책임질 거니까, 내가 먼저 가도 너무 걱정 마" 그리고 한 문장을 더 보탰다. "그동안 고마웠고 사랑해"

요양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깊고 깊은 어둠이다. 휠체어는 삐걱대며 조금씩 나아간다. 강담의 작은 어깨가 밭은 기침이 나올 때마다 들썩인다. 고개는 자꾸 옆으로 처지고... 어디선가 반딧불이 하나가 기울어지는 할아버지의 어깨에 가만가만 내려 앉는다.

<못다한 이야기>

1. 강담 선생이 광주교도소에 있을 때 지금은 고인이 된 전남대학교 임경순 교수가 면회도 오고 영치금도 넣어주면서 돌봐주었다. 출소할 때는 부인과 제자를 데리고 강담을 맞아주었고 본인 집으로 데려가 기거하게 하면서 직장을 알선해 줬다. 그래서 강담 선생은 처음에는 가구공장에서부터 일을 시작했다.

2. 강담 선생은 광주교도소에서 의료법 위반으로 구금되어 있던 의사와 친하게 지냈고 그의 소개로 건설회사 사장과 연을 맺어 모델하우스의 야간경비일을 했다. 이 회사가 부도난 이후에는 아파트 경비 그리고 성당의 잡부로 일을 했다.

3. 올 4월에 돌아가신 대전의 장기수 한 분이 요양원에 찾아온 극우세력 때문에 심신이 많이 허약해진 상태로 돌아가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글 취지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정하게 가명과 다른 지명을 썼다.

<강담 선생의 출소 후 사진들>


▲ 이명박 정권 규탄 집회에서 앞 줄 왼쪽 2번째가 강담 선생이다. ⓒ 강담제공


▲ 통일운동 공로패를 받는 모습 민가협에서 통일운동 공로패를 받았다. ⓒ 강담제공


▲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출소 장기수들은 양심수후원회가 마련한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강담 선생. ⓒ 강담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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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짐: 2020년 8월 08일, 토 12:5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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