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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시간: (EST) 2020년 8월 12일, 수 1:55 pm
[종교/문화] 종교
 
“새로운 세계의 입구에서”
[읽는설교] 본문: 고린도후서 5:17

(서울=코리아위클리) 정경일 형제(한국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지난 4월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지금의 팬데믹을 한 세계와 다음 세계 사이의 포털(portal), 즉 ‘입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입구 앞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새로운 세계로 용기 있게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낡은 세계로 돌아갈 것인가,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코로나19 이전의 일상을 회복하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던 탐욕과 경쟁의 질서로 돌아간다면, 생존이 이념이며 종교였던 세계로 돌아간다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은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팬데믹을 지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삶의 방식은 무엇일까요 오늘 저는 그것을 네 가지 주제로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첫째, 우리 안의 작은 자, 연약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재난은 모두에게 ‘비극’이지만 어떤 이들에겐 ‘잔혹극’입니다. 비극은 모두가 평등하게 고통을 겪는 것이고, 잔혹극은 소수가 불평등하게 더 많은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평등한 고통은 아프고 힘들어도 견딜 만하지만 불평등한 고통은 억울하고 수치스러워 견디기 힘듭니다.

재난 시대의 대표적 불평등은 가난입니다.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신체적 위험은 누구에게나 평등하지만 바이러스 재난으로 인한 경제적 위험은 사람에 따라 불평등합니다. 감염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번 재난에서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재택근무가 활성화되었다고 하지만, 일의 성격과 형태상 거리두기를 할 수 없는 노동자도 많습니다. 사회역학자 김승섭 교수는 노동자들에게 “거리두기는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해지는 길이지만 동시에 빈곤으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계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일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나머지 사람들이 안전하게 재택근무도 하고 기본 의식주 생활도 할 수 있습니다. 김승섭 교수는 거리두기를 할 수 없는 노동자들도 “보호받아야 하는 시민 범주”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합니다.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고 보장하는 것은 노동자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일입니다. 질병으로든 가난으로든 노동자가 멈추면 세상이 멈추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으로도 가난한 사람들은 바이러스 재난과 경제적 재난의 ‘이중 재난’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는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은 2014년 에릭 가너에 이어 이번에 또다시 조지 플로이드를 살해한 경찰폭력에 대한 격분으로 재점화 되었지만, 더 근본적 동인은 흑인의 생명을 오랫동안 위협해 온 인종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자각과 분노입니다. 이번 코로나19 재난으로 미국에서 현재까지 11만 1천여 명이 사망했는데, 인구 대비 흑인 사망자 수는 백인 사망자 수의 2.4배에 달합니다. 이런 죽음의 불평등 지표가 알려주는 것은 재난에서 가장 취약한 자, 가장 큰 피해자는 가난하고 주변화 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재난 대응과 극복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사회의 가장 작은 자, 약한 자의 안전과 안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재난 속에서 우리가 관심 갖고 배려해야 할 또 다른 사람들은 질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혐오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조한진희 씨는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은 ‘그들의 잘못’이라고 비난하고, 감염된 당사자들도 자기 잘못이라며 자책하는 세태를 비판합니다. 그는 병에 걸린 피해자를 죄인으로 낙인찍고 피해자도 죄책감에 시달리는 원인을 “질병의 개인화”에서 찾습니다. 그것은 병에 걸리는 것을 “자기 관리의 실패”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질병의 개인화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질병을 예방하라거나, 의료 공공성을 확대해 시민 건강을 증진하라는 요구에 관심을 갖기 어렵”게 한다는 것입니다. 조한진희 씨는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팀이 실시한 코로나19 관련 인식조사 결과도 언급하는데, 그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감염보다 주위의 비난을 더 두려워한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내가 확진자가 됐을 때 주변으로부터 비난, 추가 피해를 받는 것이 두렵다”라는 항목이 제일 높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확진자를 죄인으로 낙인찍고 비난하는 세태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로도 나타납니다. 역사를 보면, 재난 앞에서 공포에 이성이 마비된 대중과 책임을 회피하는 권력은 늘 사회적 소수자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혐오하고 배제했습니다. 유태인, 여성, 난민 등이 그 희생양이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종교가 앞장서서 혐오를 조장하고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미국의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번 코로나19 재난을 동성애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얼마 전 이태원 어느 클럽에서 산발적 감염이 발생했을 때, 한국의 보수 그리스도교 언론과 교회는 마치 동성애 때문에 집단 감염이 일어난 것처럼 여론을 몰아가려고 했습니다. 재난 상황을 성소수자 혐오의 기회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재난의 때든 일상의 때든, 소수자 혐오는 반인류적일 뿐만 아니라 반그리스도교적입니다. 예수께서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남겨두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처럼, 사회가 희생양으로 몰아 혐오하고 배제한 ‘작은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마 18:12-14)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재난 이전에도 이후에도 삶이 곧 재난인 우리 안의 가장 작은 자, 약한 자를 우선적으로 사랑하며 그들 곁에서 함께 걸어야 할 것입니다.

김승섭 교수는 우리 사회가 “약한 이들이 먼저 죽지 않는 사회”이길 바라고, 조한진희 씨는 우리 세상이 “아픈 게 죄송하지 않은 세상”이길 바랍니다. 그런 사회, 그런 세상은 이 팬데믹이라는 포털을 지나 우리가 나아가야 할 하느님 나라와 가깝지 않을까요

둘째, 주일 하루만이 아닌 매일을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번 재난에서 일부 교회는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에도 모이는 예배를 지속해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 명분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구약성서의 계명을 문자적으로 절대화한 주일성수(主日聖守) 관습이었습니다. 물론, 일상적 상태일 때의 주일성수는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예외적 상태인 것을 알면서도 기술적으로 온라인 예배가 어려워 모이는 예배를 지속한 작은 교회들의 사정도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기술과 조건이 되는데도 주일성수, 종교 자유를 명분으로 내세워 모이는 예배를 강행한 교회들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마시모 지아니니가 “우리는 위험 속에 있지 않다. 우리가 위험이다.” 라고 명쾌하게 말한 것처럼, 감염 위험이 높은데도 모이는 예배를 고집한 것은 자신과 이웃을 해칠 수 있는 반사회적 행위였습니다. 또한 안식일 계명을 지키느라 더 중요한 이웃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줘야 할 사랑의 계명을 어겼다는 점에서 반-그리스도교적 행위였습니다.

다행히 대다수 교회는 자발적으로 모이는 예배를 중단했습니다. 재난의 파고가 높아지던 2월 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와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이 실시한 개신교인 대상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1퍼센트가 모이는 예배 중단에 찬성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중단’이 아니라 ‘전환’이었습니다. 한 물리적 장소에 모여 예배했던 것을 가정별, 개인별로 흩어져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대부분의 평신도가 사회적 책임성과 공공성을 의식과 신앙으로 내면화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재난은 또한 제도교회의 위계적 성직자-평신도 관계를 뿌리부터 뒤흔들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성직자의 전통적 역할―설교, 성례전, 교육, 돌봄, 상담 등―이 크게 위축되면서 평신도 스스로 자신의 신앙과 삶을 주체적으로 책임질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평신도가 수동적 ‘종교 소비자’에서 능동적 ‘종교 수행자’로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교권주의에 물든 소수 성직 집단에게는 위협이며 위기이겠지만 교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에게는 “모든 믿는 자는 사제”라는 종교개혁 정신을 회복하는 각성과 성숙의 기회입니다. 어쩌면 코로나19는 종교개혁 이후 5백 년이 넘도록 개신교가 실현하지 못했던 탈-성직주의의 입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난을 겪으며 우리는 주일 하루만이 아니라 매일을,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신앙과 삶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주중에는 세상 욕망을 따라 살다가 주일에는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을 끝없이 반복하는 ‘주일 그리스도인(Sunday Christian)’이기를 그만두고 모든 날을 거룩하고 책임 있게 살아가는 ‘매일 그리스도인(Everyday Christian)’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곧 세상 속의 사제임을 깨달은 평신도들이 이 팬데믹의 포털을 지나 앞으로 나아간다면, 다음 세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지금까지보다 더 평등하고, 더 민주적이게 되지 않을까요.

셋째, 개신교가 잃었던 고독의 영성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개신교 영성은 공동체적이고 열정적이지만, 지나칠 경우 집단적이고 열광적일 수 있습니다. 이런 집단적, 열광적 영성에는 내적 명상과 자기 성찰의 수행성이 부족합니다. 고요한 가운데 자신과 하나님을 깊이 만날 기회가 많지 않은 것입니다. 특히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 수도전통과 단절하면서 개신교 영성에서는 고독의 차원이 크게 약화 되었습니다. 체온으로 비유하면,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은 늘 영적 고열 상태에서 지내면서, 열병을 열정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번 봄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과 겹친 사순절(四旬節)에 홀로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편해졌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꽤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겨울과 여름의 집중 수행을 동안거(冬安居), 하안거(夏安居)라고 부르는데, 이번 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춘안거(春安居)를 경험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무튼 코로나19로 인한 외적 고립 덕분에 뜻밖의 내적 고독을 경험한 것입니다.

헨리 나웬은 영성의 길은 고독solitude에서 시작해 공동체community로, 그리고 사역ministry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고독은 역설적이게도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웬에 따르면 고독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누구와 함께 있는 걸까요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서 이창엽 형제님이 “우리들 안에 계신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셨는데, 바로 그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나웬이 말한 고독입니다.

나웬은 고독의 자리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사랑받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나보다 내게 더 가까이 계신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전히 사랑받는 존재가 될 때 우리는 ‘에고’의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욕망 없이 온전히 타인을 사랑하며 섬기는 공동체와 사역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사랑은 두 개의 고독이 서로에게 인사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도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면서도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참 자기, 하느님과 함께 있는 고독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독의 영성은 ‘슬기로운 재난생활’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재난이 장기화 될수록 우리는 더 외로움을 느낄 것이고, 더 불안해질 것이고, 더 소진될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병적으로 나타날 경우 자신과 타인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외로움loneliness은 질병인 것입니다. 그러니 홀로 있는 시간을 고립과 외로움의 경험이 아닌 고독의 기회로 삼아 기도하고 수행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고독 속의 기도와 수행은 우리의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면역력을 길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모든 생명의 관계성을 자각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코로나19로 갑자기 멈춰 버린 세계의 모습은 무서우면서도 경이로웠습니다. 항공기가 날지 않고 공장과 자동차의 매연이 올라오지 않는 하늘은 맑은 파란 색을 되찾았고, 잦은 이동에 따른 오염원이 지역에 따라 줄어들거나 사라지면서 강과 바다도 더 깨끗해졌습니다. 이렇게 재난이 만든 뜻밖의 풍경은 그동안 인간이 자연을 얼마나 혹사시켜왔는지를 그 어떤 이론과 통계보다도 더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코로나19는 인간에게는 끔찍한 재난이지만, 산업혁명 후 수백 년 동안 착취당해온 자연에게는 처음으로 쉴 수 있었던 ‘지구적 안식’의 사건인 것입니다.

물론, 자연의 안식에 경탄하기 전에 자연의 분노에 민감해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19 재난은 자연의 영역을 무단침범한 인간에 대한 자연의 분노로 인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제인 구달은 코로나19 재난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례” 때문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인간이 숲을 파괴하면서 서식지가 줄어든 동물은 서로 근접해 살게 되었고, 그 결과 질병이 동물 사이에 전염되었습니다. 결국 질병을 가진 동물과 인간이 접촉하면서 바이러스 감염병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종의 경계를 넘은 바이러스 감염병의 원인은 인간이 자연의 경계를 과도하게 침범한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난을 피하려면 자연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예의의 기초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물리적 거리두기’입니다. 전통문화에는 그런 물리적 거리두기가 ‘타부taboo’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오래전 몽골에서 샤머니즘 연구를 할 때 어느 병원에서 한 유목민 여성을 만나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병을 얻은 원인은 “어느 곳인지는 모르지만 유목을 하면서 ‘들어가서는 안 될 곳’을 들어갔기 때문인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대부분의 생태친화적 문화가 그렇듯이, 몽골 유목민은 자연과 관련하여 들어가서는 안 될 곳, 해서는 안 될 행위에 대한 종교적, 문화적 타부를 많이 갖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그런 타부를 비합리적 미신으로 치부하지만, 코로나19 재난의 경험은 그런 타부야말로 자연과 인간 모두를 보호하는 합리적 미덕이라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이번 재난에서 우리가 고통스럽게 배운 것은 살아있는 다른 존재의 안녕(well-being) 없이는 인간의 안녕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종교가 가르쳐온 근본 진리와도 통합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여 살아가는 관계적 존재이기에, 자연과 인간의 안녕(eco-human well-being)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인 것입니다.

변화를 위한 용기

팬데믹이라는 입구 앞에서 뒤로 돌아갈 것인가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우리는 선택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코로나19 이후 세계의 모습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익숙한 과거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더 문제가 되는 태도는, 앞으로 나아가는 시늉만 하다가 결국 뒤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룬다티 로이는 낡은 세계의 파열을 부인하며 미래를 과거에 적당히 기워 붙이고 “정상 상태normality”로 돌아가려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고 합니다. 그럴 경우 현재의 고통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팬데믹이라는 입구를 지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용기입니다. 그런 용기는 어디에서 생겨날까요

낡은 세계와 새로운 세계 사이의 입구 앞에 섰던 사도 바울은 변화를 위해 앞으로 나아갈 용기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엔( ν) 크리스토(χριστου),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카이네 크티시스(καιν κτ σι ),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피조물’은 우리가 아닌 존재, 우리와는 다른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존재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외롭고, 불안하고, 이기적이고, 두려움 가득한 우리의 거짓 자아가 사라지고 공동체적이고, 평안하고, 이타적이고, 용기있는 우리의 참 자기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낡은 존재가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바울 자신의 실존적 경험일 것입니다. 낡은 세계의 정상 상태에 사로잡혀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인 예수를 반대하고 그의 제자들을 박해하던 바울이,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면서 아룬다티 로이가 말한 ‘파열’을 경험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환한 빛에 눈이 멀었고, 며칠 동안 아나니아의 돌봄을 받은 후에 눈을 뜹니다. 그리고 세상을 보는 눈과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달라져서, 자신이 부인하던 예수를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눈멂과 눈뜸은 낡은 세계의 파열과 새로운 세계의 생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바울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어둠의 시간은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재난의 시간과 비슷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지금의 팬데믹을 인류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이 어둠은 새로운 세계의 문이며 입구입니다. 이 문 앞에서 돌아서는 순간 어둠은 캄캄하고 견고한 벽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새로운 존재가 된 우리가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간다면,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는 사건을 우리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의 이 깊은 어둠의 시간을 그리스도와 더 깊이 하나 되고, 그리스도가 사랑하시는 우리의 이웃과 더 깊이 만나는, 믿음과 연대의 시간으로 경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위해, 잠시 고독과 침묵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 머물겠습니다.
 
 

올려짐: 2020년 7월 10일, 금 6:0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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