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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경제
 
여성과 어린이들까지 죽인, 현충원 전쟁영웅의 실체
친일에 이어 민간인 학살까지... 김백일은 현충원에 있을 자격이 없다

(서울=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 대한민국에 뭔가 근원적인 부조리가 있다는 점은 현충원에 가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현충원은 대한민국의 근원적인 가치관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이곳에 어떤 사람이 묻혔는가는 대한민국이 어떤 가치관을 지향하는지를 표상한다.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국립묘지법) 제1조는 이 법의 존재 이유와 관련해 "국가나 사회를 위하여 희생·공헌한 사람이 사망한 후 그를 안장하고 그 충의와 위훈의 정신을 기리며 선양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서울현충원을 비롯한 국립묘지들이 '국가나 사회를 위해 희생·공헌한 사람들을 안장하고 그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시설'임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의 가치관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이들을 모시고 본받기 위한 장소가 바로 국립묘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가치관에서 벗어난 인물이 이곳에 안장돼서는 안된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국립묘지에 적지 않게 묻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슴에서 꿈틀대는 뭔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가슴을 꿈틀대게 만드는 그런 인물 중 하나는 서울현충원에서 김대중 대통령 묘소 위쪽인 장군1묘역에 누워 있는 김백일(1917~1951년)이다.

현충원 목 좋은 곳에 누워있는 김백일


▲ [현충원 안장 친일파] 김백일 묘지 독립군 잡던 친일파, 국군의 영웅으로 기억되다 친일파 김백일의 묘는 일본 만주군 출신 박정희 대통령의 묘역 앞쪽에 자리한 장군1묘역 최상단에 자리잡고 있다. 김백일의 무덤에 서면 현충원 전경과 쭉 뻗은 한강을 내려다 볼 수 있다. ⓒ 공명식

29세 때인 1946년, 친미 장교 양성소인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제3연대 중대장에 임명된 그는 제3연대장, 사관학교 교장, 제5연대장, 옹진지구전투사령관, 육군보병학교장, 제3사단장,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을 거쳐 한국전쟁 발발 뒤 제1군단장으로 복무하다가 1951년(34세) 3월 28일 대관령 인근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프로필로만 본다면 국립묘지에 묻히고도 남는다. 하지만 구체적인 행적을 파고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왕조국가로 치면 그는 대역죄인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대한민국에 끼친 그의 죄악은 그처럼 심대하다.

김백일이 장군으로 복무한 대한민국은 왕조국가가 아니라 국민주권국가다. 당시의 대한민국은 실질적으로는 국민주권국가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의 대한민국이 국민의 나라가 아니었던 것은 아니다. 분명히 국민들의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국민주권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면, 이는 대한민국이 국민주권국가로 기능하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음을 뜻한다.

국민주권국가여야 할 대한민국을 그렇지 않은 나라로 전락시키는 것은 국가 공동체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김백일이 저지른 죄는 그런 것이었다. 민주공화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죄, 그래서 대역죄에 상당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국민 학살이라는 대역죄


▲ 여순사건 당시 ⓒ 진실위 자료사진

1948년 10월 전라남도 여수·순천에서 대규모 국민 학살(민간인 학살, 양민 학살)이 자행됐다. 분단 반대 등을 외친 제주 4·3항쟁. 이 항쟁에 대한 진압 명령을 거부한 제14연대의 2천여 장병들이 여수·순천에서 궐기했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제14연대를 진압한다며 군대를 파견했다. 그런데 이들은 제14연대뿐만 아니라, 14연대와 관계없는 일반 국민들까지 살상했다. 이때 희생된 국민은 최소 5000명에서 최대 1만 4000명이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에서 국민의 군대를 지휘하는 장교가 국민 한 명만 살상해도 중죄가 된다. 정권의 이익이 국민의 이익을 앞설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순 진압군은 그러지 않았다. 주권자들이 위험해지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전부 다 빨갱이이므로 무조건 죽인다는 생각으로 총칼을 휘둘렀다. 진압 군인들의 증언을 수록한 노영기 조선대 교수의 논문 '여순사건과 국가폭력의 구조'(2019년, <역사학연구> 제75집)에 이런 증언들이 소개돼 있다.

"전부 빨갱이다, 그래 가지고 잡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중략) 거기에서 처음 총살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 그때 제가 보기에는 한 30명 정도 될 겁니다."
- 일등병 최○○, 1967년 증언.

"그 당시 장교들이 일본도(日本刀) 이런 것이 있었는데, 모가지 쳐서 죽이는 것입니다. ··· 그리고 악질적인 동네는 불 질러 버리고 거기에서 살지 못하게 ··· 지금 같은 전투가 아니고 엉터리 같은 전투를 그 당시에 했어요."
- 선임하사관 김○○, 1966년 증언.

전부 다 빨갱이라는 상관의 말에 따라 아무나 닥치는 대로 살상했다. 일본도까지 마구 휘둘렀다. 악질 동네라며 동네 전체를 불 질러버리는 일까지 있었다. 정권의 적대세력과 국민을 분간하지 않는, 국민주권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범행들이 벌어졌던 것이다.

심지어는 여성과 어린이를 학살한 뒤 개들의 사체와 함께 버리는 일도 있었다. 위 논문에 소개된 유○○ 중대장은 "순천농업고등학교에 개들 죽은 시체가 남자, 여자, 어린이 해서 한 500구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사람의 시신과 개의 시체가 도합 500구나 뒤엉켜 있었다는 것이다. 국민들을 상대로 야만의 학살극이었다.

이처럼 중대한 범죄를 현장에서 지휘한 인물 중 하나가 김백일이다. 당시 신문들에는 그의 범행이 질서 회복을 위한 합법적 군사행동으로 포장돼 있다. 1948년 10월 23일 8시 현재의 '국방부 발표 제2호'를 소개한 그해 10월 24일자 <경향신문> 기사 '순천도 완전 탈환'에 그가 등장한다.

22일 오후 4시 30분 제5여단장 김백일 중령 지휘 하의 정예부대는 순천을 완전 점령하여 목하(目下, 현재) 사태를 수습 중에 있으며, 순천 시내는 질서를 회복 중에 있다.

5천에서 1만 4천에 달하는 국민들을 마구잡이로 살상한 김백일이다. 그런 그의 범죄가 '순천 탈환'과 '질서 회복' 같은 표현으로 미화됐다. 이 '업적'이 그가 현충원에 누워 있을 수 있는 근거 중 하나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이 아니다, 국민을 희생시킨 사람이다


▲ 대한민국 육군 장성 시절 김백일 ⓒ 전쟁기념관

국립묘지법 제1조에서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을 기리는 것'을 언급했다. 김백일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이 아니라 국민을 희생시킨 사람이다. 국민주권국가에서는 국민이 곧 국가이므로 국민을 희생시키는 행위는 곧 국가를 희생시키는 행위가 된다. 국민을 학살하고 국가를 희생시킨 김백일이 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뻔뻔하게 누워 있으니, 뭔가 잘못돼도 대단히 잘못된 게 분명하다.

이승만 정권과 군 수뇌부가 하필이면 김백일에게 여순 진압을 명령한 이유가 있다. 그가 이 분야의 '전문 킬러'였기 때문이다. 8·15 해방 전에도 그는 군인으로서 그런 일을 했다.

그의 부대는 해방 이전에도 '대일본제국'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독립투사 잡는 한국인 특수부대, 간도특설대가 바로 그의 부대였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제1권은 '김찬규' 항목에서 김백일과 간도특설대의 관계를 이렇게 서술한다.

1938년 봉천군관학교(만주 육사) 4기 출신인 강재호 소위, 5기 출신인 신현준 소위, 송석하 소위, 군의관인 마동악 상위 등과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복무했다.

김백일의 친일 이력이 '김찬규' 항목에서 소개된 것은 두 이름이 동일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 패망 뒤 함경도에 잠시 체류했던 김백일은 시대 분위기에 위협을 느꼈다. 친일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던 것을 역시 그도 느꼈다. 친일파들은 살아남고자 친일청산세력과 진보세력을 '빨갱이'로 매도했다.

김백일 역시 '붉은 색'을 혐오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월남하는 과정에서, 세상이 다 붉은 색으로 물들어도 나 혼자만은 반공에 입각하여 청천백일과 같이 살겠다는 뜻으로 이름을 김백일(金白一)로 개명했다"고 말한다. 김백일 스스로 자신의 개명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던 모양이다. 그의 진술과 관계없이, 악명 높은 친일 경력을 숨기고자 개명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의 부모가 지어준 찬규(燦奎)의 '찬'은 빛날 '찬'이다. '찬'에는 붉은 이미지인 불 화(火)가 들어 있다. 그 붉음의 이미지를 버리고, 남하하는 과정에서 백일로 개명했다. 이렇게 해방 뒤 그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글자를 자기 이름에 넣었지만, 그렇다고 8·15 이전에 쌓은 악행의 흔적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승만 정권에서 간도특설대 출신들의 쓰임새

만주에서 독립군을 잡던 그의 부대는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베이징 주변의 중국 내륙으로까지 파견됐다. 여기서도 그는 항일무장세력과 싸웠다.

그에 더해 그가 저지른 또 다른 유형의 악행이 있다. 바로 중국 민간인 학살이다. "중국측 통계에 의하면, 간도특설대가 사집진(베이징 동쪽 해안 지역)에서만 자행한 토벌 사건이 36건으로, 살해 당한 민간인과 팔로군이 103명, 체포된 사람이 62명이었다"이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군인이 민간인을 살상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쉽지 않다. 적군을 죽이는 것도 심리적으로 쉽지 않지만, 그것은 죄가 아니라는 국가권력의 공인이 있기 때문에 심적 부담을 덜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세계에서 민간인을 죽여도 좋다는 공권력의 공인은 나오기 쉽지 않다. 그래서 민간인을 죽이는 것은 보통 군인들한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바로 이 지점이 당시 김백일의 쓰임새였다. 여순사건 당시 이승만 정권과 군 수뇌부가 김백일을 파견한 것은, 그가 별 심적 부담 없이 무차별 학살을 벌일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김백일과 함께 여순 진압군의 주력을 구성한 백선엽과 송석하 역시 간도특설대 출신이었다. 거리낌없이 민간인을 학살할 수 있는 장교들로 여순 진압군을 구성했다는 것은, 이승만 정권이 여순 진압을 통해 국민들을 겁주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김백일은 국민 학살의 현장 지휘관으로서 대한민국에 대역죄를 지었다. 거기다가 유명한 친일 부대의 창설 주역으로서 만주는 물론 중국에서까지 악명을 떨치며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그런 그를 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모시는 것은 대한민국을 모욕하는 일이다. 따라서 국민들과 대한민국이 해야 하는 일은 그의 흔적을 동작동에서 파내는 것이다. '파묘'가 답이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0년 6월 13일, 토 10:5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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