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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경제
 
'반공 국시' 운운한 이승만 정권이 진짜 두려워한 것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국회 프락치 사건과 반민특위 해체

(서울=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 대한민국 국시는 통일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다. 대구 중구·서구에서 당선된 신한민주당 유성환 의원은 1986년 10월 14일 대정부 질문을 시작하자마자 "총리, 우리나라의 국시가 반공입니까?"라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러자 누군가가 "무슨 소리야?"라고 외쳤다. 유성환은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합니다"라며 발언을 이어갔다.

'국시가 반공입니까?'라고 물으면, 이성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고 '무슨 소리야?'라는 고함이 나오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을 이렇게 만든 것은 이승만 정권이다. 그들은 반공을 국시로 천명했다. 또 반공 국시를 명분으로 국제적인 영향력 팽창까지 도모했다.

세계전략에까지 영향 미친 이승만의 반공 국시


▲ 이승만 대통령. (자료사진) ⓒ 대한뉴스

1954년 6월 15일 이승만은 경남 진해에서 한국·타이완(대만)·필리핀·태국·베트남·오키나와·홍콩·마카오를 참여시키는 아시아반공연맹을 창립했다. 그는 이를 발판으로 태평양동맹까지 만들려 했다.

그의 태평양동맹 구상은 동아시아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인 동북아시아조약기구(NEATO) 및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를 추진하던 미국의 세계전략과 충돌했고, 결과적으로 태평양 구상도 무산되고 동북아시아조약기구도 무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처럼 이승만 정권의 반공 국시는 미국의 세계전략에까지 생채기를 낼 정도로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승만의 반공 국시가 실제로는 친일청산 저지용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이다. 38선 이북의 적대세력이 아닌 그 이남의 친일청산 지지세력을 겨냥한 논리였던 것이다. 이 점은 1949년 5월의 대형 사건에서도 표출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민국정부가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이후의 최대 이슈 중 하나는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친일청산이었다. 반민특위는 보수권력의 핵심을 이루는 친일파들을 향해 역사청산 작업을 전개했다.

기득권을 가진 보수세력은 가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반민특위보다 더 열성적으로 싸웠다. 일례로, 그해 8월 27일에는 "반민족자를 처단한다는 자는 공산당 주구다"라는 삐라를 서울 시내에 살포하고, 9월 23일에는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반공국민대회를 서울운동장에서 열었다. 이 날 경찰은 '불참하면 빨갱이로 만들겠다'는 식의 협박을 해가며 시민들을 서울운동장으로 동원했다. '친일청산반대 국민대회'라고 하지 않고 '반공국민대회'라고 한 것은 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반민특위는 1949년 1월부터 친일파들을 하나둘 체포해나갔다. 1월 25일에는 친일 경찰 노덕술을 체포했다. 그러자 보수세력의 위기감 또는 분노가 극에 달했다. 독립투사들에 대한 악명 높은 고문으로 유명했던 그가 덜컥 체포되자, 대통령 이승만까지도 예민해졌다. 반민특위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반민특위가 과도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점은 다음달인 2월 26일 발표한 특별담화에서 증명된다. 담화문에서 그는 반민특위의 활동 근거인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의 개정을 요구하고 반민특위의 축소를 제안했다. 그는 "이미 법무부와 법제처에 지시해서 법안의 일부를 고쳐 국회에 제출케 하는 중이니, 우선 조사위원의 과도한 행동을 금지하기로 작정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반민특위는 과도했다는 게 그의 인식이었다.

담화에서 그는 반민특위 특경대의 해체도 제안했다. 반민특위에 부여된 공권력으로 인해 친일청산에 무게감이 더해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반민특위가 범법자를 조용히 조사해야 하는데도 그럴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며 불만을 표했다. "근자에 진행되는 것을 보면 이런 의도는 하나도 참고치 않고 특별조사위원 2, 3인이 경찰을 데리고 다니며 사람을 잡아다가 구금·고문한다는 보도가 들리게 되니, 이는 국회에서 조사위원회를 조직한 본의도 아니요, 정부에서 이를 포용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대통령까지 나서서 반민특위를 방해했으니, 보수세력과 친일세력은 자신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매우 대담한 방법으로 방해 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이 생각해낸 작전 중 하나는 반민특위를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을 남조선노동당(남로당) 프락치로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회 소장파로 불리며 친일청산을 주장하는 의원 그룹을 남로당 끄나풀로 몰아 감옥에 가뒀다.

이들에 대한 체포는 3개월에 걸쳐 단계적으로 진행됐다. 5월에는 이문원·최태규·이구수 의원, 6월에는 황윤호·김옥주·강옥중·김병희·박윤원·노일환·김약수 의원, 8월에는 서용길·신성균·배중혁 의원이 구속됐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었다


▲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된 국회의원들. 사진은 1949년 11월 18일자 <경향신문>. ⓒ 경향신문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국회의원이 체포됐음을 알리는 보도가 나온 것은 1949년 5월 20일부터다. 이날 언론들은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현역 의원 구속을 보도했다. 이미 구속됐지만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을 이날부터 뒤늦게 보도했다. 이 날짜 <동아일보> 기사 '모종 사건에 관련?'은 이렇게 보도했다.

"전북 익산군 출신 국회의원 이문원(동성회 의원) 국회의원은 18일 하오 3시 돌연 중부경찰서 사찰과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고 있는데, 국회에 대한 신체구속은 금번이 처음인 만큼 주목되는 바 있으며, 특히 전기(前記) 이씨가 소위 소장파의 거두로 국회의 중간파적 색채를 띤 그룹을 리드하고 있던 점이 주목된다."

이문원이란 이름 옆에 표기된 동성회(同成會)는 무소속 그룹인 동인회(同仁會)와 성인회(成人會)가 통합된 모임이다. 동성회에 속한 이문원은 소장파 그룹을 이끌며 친일청산과 반민특위를 지원했다. 그런 이문원에 대한 체포가 대한민국정부 헌정사상 최초의 현역 국회의원 체포였다. 친일청산이 보수세력에게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승만 정권은 국회 소장파가 국제연합 한국위원단에 외국군 철수와 군사고문단 설치를 반대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것을 지적했다. 의견서 제출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의견서 제출의 배후를 문제 삼았다.

이승만 정권은 소장파가 남로당 지시를 받고 그렇게 했다고 몰아세웠다. 1949년 7월 3일자 <경향신문> 기사 '국회 내에 남로 푸락취부 설치코'에 따르면, 7월 2일 국방부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들에 대한 남로당 지령 제1호가 단기 4282년(1949년) 2월 26일 내려졌다면서 그 지령을 소개했다.

"국회 프락취부 제1회 지령: 단기 4282년 2월 26일 노일환·이문원 양인(兩人)은 남로당 국회푸락취부 오루구로부터 (ㄱ)외군(外軍) 철거안을 국회에 상정하여 통과시킬 것 (ㄴ)유엔 한국위원단에게 외군 철퇴 진언서 연판운동을 전개하되 국회위원 □명을 획득할 것 ······ 등 사항의 지령을 수(受)하였음."

위 발표를 입증할 물증은 없었다. 재판도 그런 것 없이 진행됐다. 검찰의 주장이 곧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의원들은 남로당 끄나풀로 확정돼 유죄 선고를 받았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국회 소장파가 몰락하는 계기가 됐다. 이것은 반민특위 친일청산에 일대 타격이 됐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의회에서 친일청산을 지지하고 변호해줄 세력의 몰락을 의미했다.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가 경찰의 공격을 받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반민특위를 보호해줄 버팀목이 5월부터 국회에서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반민특위는 그해 10월 해체됐다.

이승만 정권은 친일청산을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을 남로당 빨갱이로 몰아 숙청했지만, 당시의 대한민국 제도권에 소위 '빨갱이'라 할 만한 세력은 없었다. 남북분단을 거부하는 세력은 1948년 5월 10일 제1대 총선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 총선에 출마해 국회로 진출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남북분단을 인정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문원을 비롯한 국회 소장파들도 마찬가지였다. 크게 보면 보수파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보수파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이들은 친일청산을 지지했다는 점뿐이다.

공산주의와 관계없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고 이를 정당화하고자 반공 국시를 운운한 이승만 정권의 행태는 그들이 말한 반공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들이 진짜로 두려워한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었다. 친일청산론을 일으켜 정권의 지지 기반인 친일파를 약화시키려는 세력이 그들은 더 두려웠다.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를 보호하기 위해 반공 국시를 운운했다. 반공 국시의 저변에 친일청산 거부론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 앞에서 "우리나라의 국시가 반공입니까?"라고 물었다면, 그들은 "무슨 소리야"라고 인상을 쓰면서 속으로는 '국시는 친일청산 반대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0년 5월 30일, 토 2:1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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