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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정의·은혜·율법을 통해 보는 해방의 하나님
[탐독의 시간] 월터 브루그만 <하나님, 이웃, 제국>

(서울=뉴스앤조이) 여운송 기자

"이런 문제는 공의보다는 사랑으로 해결해야 해."
"아니, 무질서한 사랑은 공의를 바로 세우지 못해."

교회 현장에서 갈등이 발생할 때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공의(정의)'의 반대말은 '불의'인데, 이상하게도 교회에서는 종종 '사랑(은혜)'이 반대말이 되는 것 같다. 생각해 보자. 공의와 사랑이 반대라면, 사랑은 불의한가. 공의는 사랑 없는 무자비에 불과한가.
이러한 문제의식은 하나님의 속성과 연관될 때 두드러진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인간의 죄 때문에 극심한 내적 갈등을 일으킨다. 많은 이가 구약(율법)은 공의의 하나님, 신약(복음)은 사랑의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으로 분리해 생각한다. 십자가 사건이 이 긴장을 해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약에 한정된 내용이다. 공의를 심판의 율법에, 사랑을 은총의 복음에 국한하는 전통에서는 공의와 사랑의 불편한 대립이 견고해진다.

세계적인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두 개념의 대립을 거부한다. 그는 '관계에 신실함' 안에서 정의‧은혜‧율법이 하나로 묶이고 있음을 구약성경 내러티브로 보여 준다. 정의와 은혜와 율법이 어우러져 '공동선'(common good)을 이루어 가는 새로운 공동체 탄생이 이스라엘 해방 이야기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 <하나님, 이웃, 제국 -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공동선 창조> / 월터 브루그만 지음 / 윤상필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펴냄 / 312쪽 / 1만 6000원
제국에 없는 '이웃'을 창조하는'대항 텍스트'(countertext)

브루그만이 2015년 풀러신학교 강연회에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하나님, 이웃, 제국 -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공동선 창조>(성서유니온)는, 제목에서부터 하나님·이웃·제국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지를 다룰 것이라고 암시한다. 그는 구약을 사문화한 고대 텍스트가 아니라 삶의 자리에 기반을 둔 역동적인 공동체의 규범으로 보기를 권한다. 브루그만은 이를 위해 먼저 구약성경 본문이 기록된 처절한 삶의 자리, 부와 권력이 집중된 '제국'의 특징을 나열한다(18쪽).

제국은 약자를 착취해 부를 증식하고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 강압적인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이 동원되며, 하나님(신)은 제국 질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국가 예전(liturgy) 장치 역할을 맡는다. 결정적으로 제국에는 대체 가능한 값싼 노동력만 존재할 뿐 '이웃'은 보이지 않는다(28쪽). 제국 안에서 정의와 은혜는 양립할 수 없다. 제국의 법은 불의한 질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정의를 참칭한다. 은혜의 전복성은 허용되지 않는다. 제국이 허용하는 유일한 은혜는 질서에 순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불의의 콩고물이다.

구약성경은 정의와 은혜의 본질을 왜곡하는 제국 질서의 억압과 허구성을 폭로하는 '대항 텍스트'다. 핵심은 '관계성'의 회복. 관계성은 타자의 유익을 바라는 것으로(76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신실함에 뿌리를 둔다. 타자를 위한 신실함은 제국에 없는 '이웃 사랑의 법'을 만들어 낸다. 이웃의 범위는 고아·과부·거류민을 넘어 고자·이방인으로 확장되고, 구약성경의 위대한 해석자인 예수님에 이르러 마침내 '원수'까지 끌어안게 된다.

제국 질서는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물질만능주의와 소비주의, 상품화와 인간 소외, 심화되는 빈부 격차,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한 군사 개입, 끝없는 확장과 착취를 조장하는 '세계화'라는 이름의 획일화. 브루그만은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제국으로 '미국'을 지목하지만(25쪽), 전방위적으로 제국의 문화를 좇아 전력 질주하는 한국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구약성경은 고대보다 은밀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제국의 질서가 드러나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묻는다. 제국의 내러티브 안에서 불의에 순응하며 살 것인가, 야웨와 이스라엘의 해방 내러티브 안에서 제국에 맞서 싸울 것인가.
이제 본격적으로 브루그만의 안내를 따라가 보자. 제국이 뭉개 버린 정의·은혜·법이 자기 백성을 해방하는 야웨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맺는 신실한 언약 관계 내러티브 안에서 어떻게 바로 서게 되는지 살펴보자.

정의: 해체와 분배의 새로운 질서

브루그만은 전통적 정의 개념을 거부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정의는 질서 유지다(34쪽). 사회 안정과 통합을 위한 질서를 공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바로 정의라는 논리다. 제국의 공정함은 철저한 계층화와 서열화를 특징으로 하기에, 안정과 통합은 철저히 권력을 지닌 엘리트층 사익에 부합한다. 제국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에게 철퇴를 내리치는 '응보적 정의' 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한다.

브루그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 자크 데리다를 불러온다. "해체가 곧 정의다."(91쪽) 참된 정의는 기존 질서의 유지가 아닌 해체에 있다. 브루그만은 '위로부터의 정의'에 부정적이다. 심지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시온의 예전'에도 제국의 논리가 스며 있음을 발견하고 비판한다. 시온의 예전은 권력 정점에 있는 왕을 비롯한 예루살렘 엘리트 계층을 위해 왕정 질서를 정당화하고 '하나님의 샬롬'을 외친다. 그러나 사무엘 말처럼 '왕의 정의'(삼상 8:11)는 백성을 착취해 자신의 재물을 축재하는 자기기만적 정의다.

"질서의 형태를 띤 정의는 위로부터 올 뿐 아니라 실물경제에 몸담은 민초들에 냉담하고 무심하다." (107쪽)

시온의 예전에 대한 해석보다 충격적인 것은 요셉에 대한 평가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집트 총리 자리에 앉은 요셉이 지혜로운 방책으로 7년 흉년을 막아 냈다는 익숙한 이야기에서 브루그만은 '요셉의 이집트화'(114쪽)를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요셉은 파라오의 독점적·획일적 착취에 가담해 모든 이의 재산을 파라오에게 복속하고 모든 이를 노예로 만든 주범이다. 요셉이 계획·실행한 불의한 축재 정책 끝에, 그의 가족들(이스라엘)도 이집트의 노예로 전락한다(116쪽).

그러나 브루그만은 성경에서 또 다른 목소리, '아래로부터의 정의'가 있음에 주목한다. 이 정의는 파라오의 전체주의적 축재와 폭압적 노동 아래 고통당하던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서 나온다. 자기 백성과의 관계에 신실한 하나님은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파라오의 질서를 해체하고 이스라엘을 불의에서 해방해 새로운 정의 질서의 실험장 광야로 인도하신다.

광야에는 안식일이 있다. 쉼 없이 벽돌 할당량을 만들지 않으면 매질당하는 착취의 질서가 작동하지 않는다. 광야에서는 축재가 금지된다. 만나를 자신이 필요한 만큼 거두지만 모든 이가 풍요롭다. 이렇게 파라오의 응보적 정의는 하나님의 '분배적 정의'로 대체된다. 하나님은 쓸모없어 보이는 노예들의 부르짖음을 돌아보셨다. 노예들은 해방되어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를 돌아보라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받는다. 하나님의 정의는 이웃을 대적하는 행동은 지속될 수 없다고 줄기차게 일갈한다(136쪽).

은혜: 경계를 돌파하는 회복적 정의

은혜는 제국의 콘텍스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대항을 이어 가고, 대안을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활짝 열어 준다. 브루그만은 민족과 종교를 막론하고 고대 근동 전역에 널리 퍼져 있던 '공통 신학'(common theology)을 소개한다. 공통 신학의 핵심은 '신은 지존하는 절대 권력이며 언약 관계 속에서 죄인을 징벌하고 복종하는 자에게 포상한다'는 것이다. 이 신학의 시금석은 '만일 ~하면 ~할 것이다'라는 엄정한 보응 규칙으로 대변된다.

공통 신학은 상당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신학에서 하나님은 신상필벌의 규칙에 묶인 예측 가능한 하나님, 제국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통제 가능한 하나님이 된다. 브루그만에 따르면, 구약성경도 공통 신학의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행위-결과를 강조하는 신명기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신명기적 논리에 갇혀 끊임없이 욥을 괴롭히다가 혼쭐났던 욥의 친구들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특정 체계가 가둘 수 없는 분이다.

기원전 587년 이후, 기존 체제를 정당화해 주던 시온의 예전과 공통 신학의 논리는 더 이상 작동할 수 없었다. 범죄한 이스라엘에게는 심판이 있을 따름이다. 광야를 통과해 해방을 맞은 이스라엘이 이번에는 광야를 지나 제국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희망이 붕괴된 척박한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가 예비된 반전의 장소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신실함을 거두지 않고 두 번째 기회를 주신다.

"야웨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은 기존의 언약, 예언, 지혜가 가르쳐 온 균형 관계, 곧 보상의 전제에 갇힐 수 없다. 야웨께서는 주고받는 대칭적 균형 관계를 걷어 버리시고, 공통 신학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새로운 희망을 창조하신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주신 약속은 더는 시내산의 '만일'이라는 조건문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이제 장차 받을 선물은 순종의 여부에 매이지도 않는다." (169~170쪽)

브루그만은 은혜를 '회복적 정의'(181쪽)라고 말한다. 은혜는 보응 법칙과 무관한 정의, 넘치는 관대함으로 새로운 희망을 창조해 낸다. 공통 신학을 해체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제국의 정의를 해체하는 하나님의 정의와 일맥상통한다. 정의는 은혜 가운데 실현되며, 은혜는 정의 가운데 넘쳐난다. 하나님은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를 행하신다. 그분의 신실하심은 모든 경계를 돌파한다. 자기 백성과의 관계를 위해 자신이 준 토라의 계명까지도 위반한다(176쪽).

경계를 돌파하는 은혜는 이웃 사랑을 사회에서 지속시키는 일을 통해 공동선을 창조한다. 하나님은 먼 천상이나 성전에 계시지 않고 이스라엘과 함께 광야에 계시며, 포로로 잡혀 온 이방 땅에 계셨다. 하나님을 따르는 공동체는 모든 타자를 망각 속으로 흩어 버리는 세상 문화 속에서 환대의 공동체로 탈바꿈한다(217쪽).

율법: 영원히 새롭게 들리는 말씀

하나님의 분배적 정의는 제국의 질서를 해체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공통 신학의 응보적 논리를 초월해서 이스라엘을 다시 품었다. 이제 율법은 변경될 수 없는 제국의 법에 대항해 하나님의 자유로운 다스리심을 확증하고,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창조적 대화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변경할 수 없는 법에는 자비도 없다. 배타적 충성을 요구하는 제국의 법조문은 문자의 형태로 고착돼 쉴 새 없이 변하는 상황을 상상하거나 포용할 여지가 없다. 브루그만은 교회에서 제국의 법이 작동하는 광경을 지적한다.

"전체주의를 추구하는 교회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사람들을 짓밟을 수 있는,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꿈꾼다. 인종, 계급, 젠더 갈등을 부추기는 전체주의적 법 제도는 무소불위하고 무자비한 데다가 변경할 수도 없으니 도무지 긍휼을 모른다." (240쪽)

브루그만은 제국의 법과 다르게 하나님의 율법은 바뀔 수 있고, 또 치열하고 과감하게 변화를 거듭해 왔다고 말한다(247쪽). 하나님의 법 역시 배타적 충성을 요구한다. 이는 제국이 요구하는 충성과는 다르다. 법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충성이기 때문이다. 관계는 문자에 고정된 불변성을 갖지 않는다. 개방된 관계에서 작동하는 야웨의 토라는 주어진 상황에 생동감 있게 대처하며 이웃과의 공동선을 창출하는 생성력을 지닌다. 하나님의 율법은 타자를 향한 긍휼과 환대, 회복적 정의를 이루는 억압 없는 신뢰 관계를 기초로 한다. 야웨의 토라가 자리한 곳은 문자가 아니라 관계의 신실함이다(241쪽).

'관계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백성은 율법의 근본정신으로 '쉐마'(들으라)를 내세운다. 관계의 본질은 듣고 지키는 것이다. 들음은 중단될 수 없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오늘도 여전히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토라는 절대적 규율을 늘어놓는 굳어진 체계가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낯선 삶의 자리에서 낯설게 들려오는 율법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삶을 변혁할 낯선 해석을 낳는다.

그렇기에 들음은 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 존재를 건 경청이며, 주어진 상황에 요구되는 신실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치열한 해석이다. 이는 해방의 공동체를 신실하게 섬기는 변혁의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스라엘은 들음으로 전체주의의 통제 유혹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한 개방성으로 이웃 사랑의 공동선을 추구하게 된다. 법이 이웃을 위해 있지 이웃이 법을 위해 있지 않다.

은혜와 정의의 하나님은 오늘도 토라를 통해 이웃에 대한 신실함을 요구하신다. 정의와 은혜와 율법은 세 줄로 꼰 튼튼한 동아줄과 같다.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은 이 동아줄을 강포한 제국의 바다에 던져, 부르짖는 이웃들을 건져 낸다. 은혜에 터를 삼고 정의를 베푸는 야웨의 토라(283쪽)는 오늘도 말씀하고 계신다. 계속해서 들으라, 새롭게 행동하라, 이웃의 부르짖음에 신실하게 응답하라.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토라를 말씀하고 주석하고 강조하신다. 그분은 이웃 사랑의 관점으로 현실을 끊임없이 변화시키신다. 은혜로이 품으시고 정의롭게 회복하시는 그분께서 온 세계를 새롭게 정돈하겠다고 변함없이 고집하신다." (286쪽) (본보 제휴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0년 5월 29일, 금 6:31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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