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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경제
 
그해 5월 광주... 나는 고1 소녀였다
[루게릭병 환자가 눈으로 쓴 에세이] 5.18에서 코로나19까지

이 글은 8년여간 루게릭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신정금씨가 삶의 의욕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쓴 에세이입니다. 신정금씨는 온몸이 굳은 상태로 안구마우스를 이용해 눈을 움직여 글을 씁니다. 하루 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는 단 한 명에게라도 작은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편집자말]

(서울=오마이뉴스) 신정금 기자


▲ 5.18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제일은행(현재 무등빌딩) 앞에서 최루탄이 터진 상황에서 한 시민이 방독면을 쓴 계엄군에 둘러 싸여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나경택 촬영,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월 나는 16살로 광양에서 광주로 유학 온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다(국민학교에 7살에 입학했다). 일 년 선배 언니와 자취를 했는데 학교가 조선대학교 바로 옆에 있었기에 날마다 대학생의 시위 소리가 들렸다. 시위가 내게는 공부를 방해하는 소음으로만 들렸다.

주초마다 실시하는 주요 과목 시험과 버거운 과제 탓에 두 달이 되도록 집에도 못 간 채 처음 보는 중간고사 준비에 열중했다. 중간고사를 이틀 앞두고 담임 선생님이 들어 오셔서 눈물을 흘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자취생들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시며 살아서 만나자고 하셨다.

영문도 모른 채 집으로 돌아와 교복을 입은 채로 선배 언니가 오기를 기다리며 집에 갈 준비를 했다. 언니와 함께 고속버스터미널 행 버스를 기다렸지만 버스는 오지 않았다. 다시 집으로 향하며 겁이 나기도 했지만 마음 한편으론 '설마 내 나라 군인이 교복 입은 여고생을 해치겠어?' 하는 믿음이 있었다.

선생님은 집에 가라 하셨지만 버스가 오지 않았다

그날 밤 그 집에 세 살던 사람들과 집주인 가족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앉아 각자 밖에서 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회의를 했다. 도무지 믿기지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내용들이었다. 공수부대가 시위 진압에 투입되어 시위 학생들과 행인에게 총을 쏴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앞으로 얼마나 더 죽을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겁에 질려 겨울 담요로 방문을 가린 채 며칠을 보냈다. 얼마 안 지나 계엄군이 물러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중간고사 후에 집에 가려고 미뤄둔 탓에 쌀과 돈이 바닥이 났다. 집주인 댁에서 빌릴 수도 있었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몹시 꺼리는 언니 탓에 우리가 살던 지산동에서 제법 먼 거리인 방림동 언니의 외삼촌댁까지 걸어서 쌀과 돈을 얻으러 갔다. 가는 길에 창문을 열고 몽둥이를 두드리며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가 탄 버스가 보였다. 가게들은 군데군데 문을 열었지만 시내버스가 안 다녀서 그런지 침묵의 도시 같았다.


▲ 진압군에 희생당한 시민들. 평화봉사단 소속이었던 데이비드 돌린저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찍은 사진. 이 사진은 5.18 직후 미국의 잡지 에 실리기도 했다.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전남대병원으로 들어가기에 호기심에 우리도 쌀자루를 든 채 따라 들어갔다. 병원 뒤뜰에는 그늘이 있었고 거기엔 총을 맞아 참혹하게 죽은 사람들이 한 줄로 눕혀져 있었다. 대부분 젊은 청년들이었고 가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주검도 있었다. 머리, 가슴, 등에 총을 맞아 죽은 사람들 시신이 건물 끝에서 끝까지 빼곡했다. 우리는 너무 큰 충격에 할 말을 잃고 병원 밖으로 나와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 날 이후

전남대병원 근처엔 조선대병원이 있었고 거기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무섭고 싫었지만 가보겠다는 언니 손에 이끌려 어쩔 수없이 조선대병원으로 갔다. 거기도 마찬가지로 참혹했다. 그늘마다 시신이 누워 있고 역겨운 냄새까지 났다. 믿기지 않는 처참한 현실에 두려움보다는 '왜 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야 했나? 그것도 내나라 군인에 의해 이토록 처참하게 목숨을 잃어야 하나' 하는 의문과 함께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고 울분이 솟구쳤다.

그 날 이후 우리는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많이 달라져 있었다.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와 나는 헌혈을 하기로 하고 전남대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언니는 시위대가 탄 버스를 보고 먼저 버스에 올랐다. 나는 겁이 났지만 어쩔 수 없이 버스에 따라 올랐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20대로 보였다. 그 중 몇 명은 교련복 상의를 입고 총을 들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몽둥이를 들고 버스 바깥쪽을 두드리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부통치 결사반대를 외치며 시위하는 시민들. 전남대학교 버스도 보인다. 1980.5.24 ⓒ 연합뉴스

도보로 30분이면 가는 거리를 돌고 돌아 3시간 동안 시위대가 탄 버스를 타고 광주 외곽까지 갔다. 광주 외곽은 보지는 못했지만 군인들이 에워싸고 있는 듯했다. 가는 길에 시민들이 나와 주먹밥을 전해 주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기도 했다. 차를 탄 내내 겁이 났다.

우리는 시내에서 내려 달라고 강하게 요구해 어딘지도 모른 채 내려서 길을 물어 전남대병원으로 갔다. 늦은 아침 식사 후에 출발했는데 병원에 도착하니 오후 3시쯤이었다. 헌혈을 하려고 많은 사람이 긴 줄을 서 있었다. 그런데 막상 헌혈을 하려고 학생증을 내미니 나는 아직 어리다며 그냥 가라 하고 언니는 몸무게가 너무 적다고 거절 당했다. 언니는 괜찮다며 제발 헌혈하게 해달라 울면서 졸랐지만 우리는 거부 당해 돌아와야 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날마다 도청 앞에 나갔다. 그 당시 내 일기에 '나는 오늘도 역사의 증인이 되기 위해 도청 앞에 나갔다'라고 썼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건 처음 본 것 같다. 빈틈이라곤 찾을 수 없을 만큼 모여 있었다.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들의 핸드마이크 소리를 귀 기울이며 들었다. 그들은 "김대중 석방하라", "계엄령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전두환이 누구인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리고 있었다. 외신 기자로 보이는 사람과 인터뷰하는 모습도 보였다.

계엄군이 잠시 물러난 광주는 민주화의 열기와 분노로 뜨거웠지만 치안은 신기할 정도로 안전했다. 가게도 문을 열었고 혼연일체가 된 주민들은 서로 도왔다. 경찰이 제 기능을 못하는데도 오히려 더 안전했다. 신기한 생각이 들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도청 앞 상무대엔 계엄군의 총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관이 놓였다. 언니와 나는 관 위에 태극기를 덮어 주고 싶어 광주 시내의 체육사마다 찾아다녔다. 체육사를 찾아 종일 다녔지만 힘들지 않았다. 체육사 사장님들은 우리를 칭찬하시며 아낌없이 태극기를 내어 주셨다. 구해 간 태극기를 관 위에 덮었다.

총소리만 들릴 뿐

그러던 중 26~27일 쯤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다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졌다. 헬기에선 '폭도들은 자수하라. 시민들은 밖에 나오지 말라'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도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불안했다. 집주인 아저씨를 졸라 집 뒤에 있는 조선대 뒷산에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총소리가 들려오고 시가전이 벌어진 듯하였다. 총소리만 들릴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도시 전체가 숨도 쉬지 않는 듯 적막했기에 총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 5.18민주화운동당시 희생된 시민들. 1980.5.25 ⓒ 연합뉴스

늦은 오후 산에서 내려왔다. 집은 조선대 뒷산과 바로 연결돼 있었지만 그때 상황은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겁쟁이인 내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저녁엔 며칠 전 지역 일간지에 실린 시 "광주여, 무등산이여, 우리들의 청춘의 도시여"를 다시 읽었다. 시가 너무도 가슴에 와닿아 제법 긴 서사시를 일기장에 정성껏 옮겨 적었다.

(그 당시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 그 일기장을 대학 1학년 때 총학생회 부회장이던 동아리 선배에게 보여 주었다. 내 일기는 서울 동부지역 여러 대학의 대자보에 붙었었다. 일기장의 행방을 물으니 선배는 그걸 김근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님께 드렸다고 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사망한 시민의 시신을 끌고 가고 있다. 1980.5.28
ⓒ 연합뉴스

새벽까지 나던 총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통행 제한도 풀렸다. 난 광양으로 내려갔다. 광주를 벗어나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평화로이 들판엔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가족들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것처럼 반가워했다.

얼마간의 휴교령이 풀리고 돌아간 학교는 무척 오랜만인 듯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는 이상하리만큼 불과 얼마 전 겪은 일에 관해서는 서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가끔 국어 시간에만 선생님의 분노에 찬 말씀이 있을 뿐 다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처참한 상처를 감춘 채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다.

살아남은 자들의 침묵

재수를 해서 1984년 대학에 입학했다. 멋진 캠퍼스에서 낭만적인 대학 생활을 꿈꾸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동아리 소개 책자를 받아들고 살피던 중 "뜨거운 가슴, 냉철한 이성" '백단학회' 라는 글귀가 가슴을 뛰게 했다. 과 선배에게 물으니 거기 가입하면 제대로 졸업하기 힘든 곳이라 했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내 가슴을 뛰게 한 그 글귀에 끌려 혼자 학생회관 5층의 백단학회 문을 두드렸다. 거기는 캠퍼스의 낭만과는 거리가 먼 분위기였다. 사회 구조적 모순과 군부 독재 타도에 관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곳이었다. 봄부터 캠퍼스는 '5.18 광주 학살 책임자 처벌과 군부 독재 타도'를 외치는 학우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나는 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서울 사람들이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광주 학살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학우들이 마치 나의 억울함을 편들어 주는 듯 고마웠다.

나는 그렇게 소위 말하는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공부는 아예 뒷전이었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백단학회와 함께했다. 나와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선배들이 좋았고, 아는 게 많아 후배들을 지도하는 선배들이 존경스러웠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는 거듭 되었다. 나는 교내시위뿐 아니라 기습적인 가두시위와 몇 개 대학이 함께하는 연합시위 등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다.

서울 사람들은 그날을 거의 몰랐고, 나는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살다보면 엊그제 일도 기억이 안 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도 어제 일처럼 선명한 일도 있다. 내게 5.18 광주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5.18 광주는 내 가슴과 머리에 각인되어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그 시절 운동권이었던 대부분의 학우들은 학교 다니는 이유가 학과 공부가 아니라 학생 운동을 하기 위해서 였다. 일주일이면 두세 번의 시위가 있었다. 나는 군부독재 타도를 위해 싸우지 않는 학우들은 비겁하다 생각했고 그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종종 들려오는 학우들의 분신 소식은 참으로 가슴 아팠다. 우리는 순수했고 뜨거웠고 다소 급진적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박종철이고 이한열이었다.


▲ 87년 6월 항쟁을 상징하는 사진 한장. 한 청년이 태극기 앞으로 손을 들고 뛰쳐 나가고 있다. ⓒ 6월항쟁기념사업회

군부독재에 싸워 승리한 6월 항쟁은 양김의 후보 단일화 실패로 반쪽짜리 승리로 끝났지만 그때 시청과 명동에서 싸우던 청년 학생들이 쉰을 넘겨 이제 청년이 된 자녀들과 함께 2017년 촛불혁명으로 이한열을, 박종철을 부활시켰고 5.18광주를 완성시켰다. 잘못된 국가권력에 굴하지 않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드디어 승리로 이끌었다.

나는 촛불혁명엔 전혀 참여하질 못했다. 2012년 봄부터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왼팔부터 힘이 빠지더니 불과 몇 달 만에 걷기 힘들 정도가 되어 버렸다. 처음엔 여러 가지 검사를 했지만 검사 결과 정확한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 2012년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서울대병원에서 MND라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그게 무슨 병인지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루게릭병이라 했다. 치료법도 원인도 모르는 이 참담한 병이 내게 오고 말았다. 아마 이유도 모른 채 사형 선고를 받고 형 집행을 기다리는 심정이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2년, 내 인생 마지막 투표라는 생각으로


▲ 시청과 명동에서 싸우던 청년 학생들이 쉰을 넘겨 이제 청년이 된 자녀들과 함께 2017년 촛불혁명으로 이한열을, 박종철을 부활시켰고 5.18광주를 완성시켰다. ⓒ 오마이뉴스

루게릭병은 내 모든 것들을 삼켜버린 블랙홀이 되어 버렸지만 일주일 후의 대통령 선거만은 예외였다. 그 당시 남편이 원주로 발령을 받아 집 주소지가 남편이 근무하는 원주로 되어 있었다. 나는 투표 전날 친구의 도움을 받아 성남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내 인생 마지막 투표가 될 거란 생각을 하며 원주로 향했다.

너무도 간절했던 민주세력으로의 정권교체가 좌절되던 날 나는 너무도 힘들었다. 나는 박근혜정부에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독신으로 살며 자신은 대한민국과 결혼했다 하니 비록 왜곡된 방법일지라도 그녀 나름의 방법으로 사심 없이 일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역사는 발전하는 거라는 내 믿음은 너무도 쉽게 허물어졌다.

뉴스를 접할 때마다 느끼는 실망감, 좌절감, 분노는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실타래가 풀리던 날 난 마음으로 촛불을 들었다. 비가 오면, 눈이 오면, 날씨가 추우면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촛불을 들었다. 마침내 촛불혁명이 승리하던 날 너무도 기뻤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살고 있는 보람을 느꼈다. 역사는 이렇게 결국엔 발전하는 거란 확신이 들었다.

얼마 전 전두환씨가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광주법정에 섰다. 그의 지금까지의 태도로 보아 그에게 역사와 국민 앞에 참회하길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다. 진상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되지 않았고 일부 세력이 계속 왜곡하고 폄훼하는 상황에서 5.18은 40주년을 맞이했다. 광주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지만 5.18 광주는 우리 현대사의 민주주의의 아프지만 빛나는 역사로 길이 남을 것이다.

올해, 다시 투표를 했다


▲ 글을 입력하고 있는 필자 ⓒ 이준호

올 봄은 코로나19로 전 세계인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대구·경북에서 코로나가 무서운 기세로 확산할 때만 해도 전세계로부터 따갑게 외면받던 우리가 지금은 모범적으로 코로나19에 대처한 국가가 됐다. 투명한 공개와 철저한 관리, 선진 의료체계 등은 우리 국민의 높은 시민 의식으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전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치러진 총선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다시는 투표하지 못할줄 알았던 나도 이번 총선에 남편의 도움을 받아 참정권 행사를 했다. 우리의 코로나19 극복과정은 우리보다 세계 언론이 먼저 주목하고 놀라워했다. 코로나로 경제는 더욱 어렵고 일부 업종은 고사 위기에 처해 있다. 어렵지만 이 고비를 넘기고 나면 우리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거라 확신한다.

올봄 사회적 거리두기로 외롭고 힘들었지만 TV로 코로나19 극복과정을 지켜보며 자긍심으로 가슴 벅찬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코로나19 대처 과정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높은 자긍심과 정부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되었다.

지방자치단체와 정부가 재난기본소득을 나눠준다고 한다. 우리 부부는 기부로 작은 힘을 보태기로 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국난을 힘 모아 극복해 왔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코로나 이후에 우리의 도약이 기대된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0년 5월 22일, 금 5:5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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