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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5·18 광주시민과 함께한 그리스도인들
감시·압박·옥고에도 민주 정신 동참 및 계승…한국교회와의 관계 연구 미흡

*올해로 5·18민주화운동이 40주년을 맞았습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시위하던 학생과 시민을 학살했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기독교인도 있었습니다. 5·18을 맞아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무슨 일을 했는지 되새겨 봅니다. - 기자 주


▲ 광주 5·18민주화운동이 올해로 40주년이 됐다. 계엄군과 학생들이 대치하고 있다. 사진 출처 5·18기념재단

(서울=뉴스앤조이) 이용필 기자 = 유성진 장로(가명)는 40년 전 광주에서 택시를 몰았다. 먹고살기 바빴던 시절, 부지런히 손님을 실어 나르며 생계를 이어 갔다. 평범하던 일상은 5월이 되자 지옥으로 바뀌었다.

당시 광주를 포함해 전국 곳곳에서 전두환 신군부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계엄군은 "민주주의를 지키자",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고 외치는 학생들을 구타하고 마구잡이로 잡아갔다. 처음에는 두들겨 패기만 하더니, 나중에는 학생·시민을 향해 총을 쏘았다. 이를 지켜본 광주시민은 분노했고 들고일어났다. 유 장로도 동료 택시기사들과 거리로 나섰다.

유 장로는 5월 8일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봤다. 영화 '택시운전사'에 나오는 장면 70~80%가 맞아떨어진다고 보면 된다. (시민들은) 광주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총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아직도 5·18민주화운동을 깎아내리며 광주시민을 폭도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유 장로는 "당시 강간 사건 한 번 없었고 금은방도 털린 적 없다. 깨끗한 데모가 아닐 수 없다. 아름다웠던 광주를 폄훼하는 건 잘못이다. 그 사람들이 안 겪어 봐서 가짜 뉴스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현장에는, 유성진 장로와 같은 기독교인도 있었다. 도청을 사수하다가 산화한 문용동 전도사, 한신대 신학생 류동운 열사를 포함해 목사·장로·교인들이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직접 참상을 겪은 이들은 전두환 신군부에 분노했고,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었다.

윤기석 목사, 당국 압박에도 추모 예배
법정 선 조아라 장로 "하나님과 역사가 기억"
매일 기도하며 환자 돌본 안성례 장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총회장을 지낸 고 윤기석 목사는 1980년 5월 18일 시위 현장을 직접 지켜봤다. 그가 쓴 일기장에는 "저녁에는 평화적 횃불 데모를 했고, 일단 해산했다. (중략) 그런데 0시를 기해서 정치 활동 일제 중단, 전문대생 이상은 휴교한다는 포고령이 떨어졌다. 이것은 제2유신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한 마귀를 추방하니 일곱 마귀가 난입하였다"고 적혀 있다.

윤 목사가 말한 한 마귀는 '박정희'를 뜻한다. 박정희 유신 체제에 반대하다가 옥고를 치렀던 윤 목사는 분노했다. 그는 5·18을 두고 "비상계엄하에서 일어난 광주 학생들의 장거요, 의거였다. 광주의 빛나는 전통을 과시하였다. 지난번 부마 사태는 군인들이 출동하니 잠잠해졌으나 광주의 기질은 그것이 아니었다. 군인들이 진압 작전에 투입되니 더욱 강렬해졌다"고 했다[<죽고자 하면 살고>(은혜기획), 234쪽].

강진에서 시무하던 윤기석 목사는 그해 10월 광주한빛교회에 부임했다. 5·18은 단순히 열흘 만에 끝난 항쟁이 아니었다. 추모, 수습 문제 등을 놓고 수년간 당국과 갈등했다. 윤 목사는 1981년 5월 24일, '제1회 5·18 추모 연합 예배'를 진행했다. 당국과 경찰에서 압박을 가했지만, 윤 목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1983년에는 문익환 목사를 초청해 추모 예배를 하려고 했지만, 경찰 방해로 문 목사는 참석하지 못했다.

윤기석 목사는 자신의 회고록 <죽고자 하면 살고>에서 5·18이 한국교회에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고 썼다. "5·18 광주 민중 항쟁은 한국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잡아 주었고, 일부 호화로운 목회에서 벗어나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소외받는 민중들의 삶의 자리에 파고들었고, 바로 현장 목회인 민중 목회 태동의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당국의 압박 속에서도 진행된 5·18 추모 기념 예배는 연례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올해 40주년 기념 예배도 5월 18일 광주한빛교회(노일경 목사)에서 열린다. 노일경 목사는 "5·18은 특정 이념 세력이 아니라 반독재에 맞서 일반 시민이 역사 한복판에서 공동 주체가 되어 일으킨 것이다. 교회는 5·18을 신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민중들과 함께 울고 아파해야 한다"고 말했다.


▲ 광주한빛교회에서는 매년 5·18을 추모하는 예배가 열린다. 올해 예배도 5월 18일 오후 2시 광주한빛교회에서 열린다. 사진 제공 광주한빛교회

'광주의 어머니'로 불린 고 조아라 장로도 광주한빛교회 출신이다. 조 장로는 광주YWCA에서 활동하면서 여성운동, 교육 운동에 힘써 온 인물이다. 1912년생 조아라 장로는 일제강점기 독립군 군자금을 마련하다 옥살이한 적도 있다.

조 장로는 5·18 당시 수습대책위원회로 활동했다. 계엄군이 들이닥쳐 살상을 저지르자, 5월 20일 미국 공보문화원을 찾아가 항의했다. 조 장로는 "이것이 카터 대통령 미국의 인권 민주주의, 도덕 민주주의냐"고 말했다. 미국이 한국군을 장악하고 있으니, 계엄군의 살상도 미국이 승인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조아라 장로는 27일 새벽 계엄군에 붙잡혀 끌려갔다. 보름간 폭력을 당한 뒤 내란 음모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다. 그러나 자신을 회유하려는 신군부 세력과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그쳤다.

조 장로는 1심 최후진술에서 "이 사태는 하나님과 역사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갖고 정부 전복의 뜻으로 한 것이 아니고, 느그가 와서 찌르고 밟고 때리고 하니까 죽고 상하고 하면서 우리 시민들이 일어난 것이다", "내가 한 가지 고통스러운 것은 나는 기독교인이다. 기독교인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그랬는데 당신들을 사랑하기에 이르지 못한 그것이 고통이다"고 말했다[<구술 생애사를 통해 본 5·18의 기억과 역사 7 – 개신교 편>(518기념재단), 743쪽].

3년 형을 선고받은 조아라 장로는 교도소에 있다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조 장로는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인권, 교육 복지 활동에 힘을 쏟았다.


▲ 5·18국립묘지에는 기독교인 130여 명이 잠들어 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5·18 단체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숨진 사람은 606명에 이른다. 이 중 165명은 항쟁 당시 숨을 거뒀고, 상처를 입고 죽은 시민은 376명이나 된다. 행방불명도 65명에 이른다. 항쟁 당시 광주기독병원에서 근무했던 '오월어머니집' 안성례 장로(고백교회 은퇴)는 피 흘리는 시민들을 치료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수술실 그때 우리가 4갠가 있었는데요. 피 묻은 환자 수술하고 피 묻은 기계 그대로 수돗물에 씻어 가지고 다시 또 수술하고 그러면서 기도했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거뿐인데 하나님. 이들을 살려 주십시오.' 사흘 동안을 계속 수술실을 열었으니까요. 의사들이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잔인하게 난도질할 수가 있을까. 의사들이 눈물이 나와서 어떡할까 할 정도로 완전히 시민·부상자들과 우리 병원은 일체가 된 거예요." (<5·18의 기억과 역사 7>, 377쪽)

안성례 장로는 매일 직원 150명이 모여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고 했다. 피가 모자라 의사와 간호사들이 먼저 수혈을 했다. 안 장로는 기독병원에서 퇴직한 후 광주시의원을 지내며 5·18 진상 규명 운동을 했다.

5·18민주화운동은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광주시민이 계엄군에게 탄압받고 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다. 목포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21일 죽동교회에서는 목포시민민주화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위원회는 '우리 겨레와 세계 자유민에게 보내는 목포시민의 결의문'을 배포했다. 결의문을 통해, 광주는 흡사 인간 도살장이었고 어느 나라도 공수부대를 자국에 투입한 사례는 없다고 비판했다. 비상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고 광주시민에게 즉각 보상하라고 했다.

목포시민민주화투쟁위원회는 기장 소속 강신석·김현식·정권모·유기문 목사 등이 주축을 이뤘다. 투쟁위원회는 5월 25일 목포NCC와 함께 비상 구국 기도회를 열었다. 다행히 계엄군이 목포까지 들이닥치지는 않았다. 집회는 평화롭게 진행됐다. 당시 집회에 참여한 박상규 목사(광주성광교회)는 <뉴스앤조이>와의 인터뷰에서 "25일 역전 광장에서 전 교인 연합 예배를 드린 것은 상징적이다. 수백 명이 나와 불의한 정권에 항의하고, 하나님께 호소했다. 시민들의 집결을 이끌어 냈다"고 말했다.

"적잖은 개신교인 항쟁 뛰어들었지만 교회의 조직적 참여 찾기 어려워"


▲ 항쟁 당시 많은 기독교인이 활동했지만, 관련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사진출처 5.18기념재단

기독교인들은 5·18 당시 주로 개별적으로 활동했으며, 이 중에는 희생자도 많았다.

5·18을 연구해 온 최상도 교수(호남신대)는 13일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민주 묘역에 묻힌 종교인 묘가 199기인데, 이 중 개신교인 묘만 130여 기에 이른다. 천주교·불교·원불교를 합친 사상자보다 많다.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적지 않은 개신교인이 항쟁이 뛰어든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교회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대응한 사례는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광주에 있는 2000여 교회를 대상으로 관련 자료가 있는지 전수조사했지만, 거의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당시 주일은 5월 18일, 25일 두 번뿐이었다. 당회나 공동의회가 열리는 데 시간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5·18을 전후로 감시당하는 교회도 많았다"고 했다.

강신석 목사가 담임했던 광주무진교회는 실제로 당국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다. 당시 부목사였던 최 아무개 목사는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유신 반대 운동을 해 왔던 강 목사님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계엄령 직전에 피신했고, 나와 몇몇 청년도 교회를 떠나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청년이었던 이웅기 장로(광주계림교회)는 5월 8일 <뉴스앤조이>와의 인터뷰에서 "저녁 8시가 되면 시 전체가 소등되고 통행이 금지됐다. 시내 곳곳에서는 총격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일주일간 교회는 폐쇄됐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차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항쟁이 끝난 뒤에도 교회는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이 장로는 "교인이나 가족 중 연행된 사람이 있으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았다. 말을 섞었다가는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니까 교인끼리 대화도 못 했다. 내 기억으로 90년대 초까지 항쟁 후유증이 이어졌다. 정권 지시를 받아 목사님 설교를 보고했던 공무원 교인도 있었다"고 말했다.

교회 안에 5·18과 관련한 자료는 많지 않았다. <광주계림교회 50년사>에는 5·18과 관련해 짤막한 내용이 들어가 있을 뿐이다. 교회 고등부 학생이 복부 관통상을 입고 8개월간 치료를 받고 목숨을 부지했으며, 대학부 청년 2명이 수배를 받았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만행을 저지른 계엄군을 비판하는 글귀를 추가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정권 찬탈을 노려 친위부대인 공수부대를 동원 계엄군이라는 이름 아래 민주주의를 외치는 대학생들과 시민들을 무참히 짓밟고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광주무진교회 장관철 목사도 9일 <뉴스앤조이>와의 인터뷰에서 "그때 당시 교회가 특별히 할 수 있었던 게 없었다. 데모한다거나 모일 수가 없었다. 나중에 항쟁이 끝나고 YMCA·YWCA와 함께 수습위원회 정도로만 활동했을 뿐이다. 우리 교회 당회록에도 '수많은 교우가 수난을 당하다' 정도만 나와 있다"고 말했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0년이 됐지만, 한국교회와 관련한 조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최상도 교수는 "우리 쪽 역사를 게으르게 정리해 왔다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재 광주NCC에서 자료를 집대성하고 증언록을 만들려 하고 있다. 늦더라도 5·18과 관련한 한국교회 역할과 의의를 짚을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본보 제휴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0년 5월 22일, 금 4:4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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