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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경제
 
편지 두 통 때문에 끌려온 영창, 조사관은 곡괭이 들고 '쪼인트'
[5.18, 어느 전경의 편지-하] 36년 전, '광주' 소식을 편지에 쓴 김상회씨

*<5.18, 어느 전경의 편지 (상)>에서 이어집니다.


▲ 5.18 당시 전경으로 광주 소식을 편지로 알리려다가 포고령·반공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산 김상회씨. ⓒ 이희훈

1980년 5월, 전북 전주에서 전투경찰로 군복무 중이던 나는 전북도경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광주 소식을 담은 편지를 누나·동생에게 썼다가 포고령·반공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 쓴 것이다. 이후 전북 계엄합수단, 육군 35사단 헌병대 영창에서 얻어맞으며 조사를 받은 뒤, 광주 상무대 영창에 수감됐다.

특히 육군 35사던 헌병대 영창은 지독히도 힘들었다. 조사 과정에서 얻어맞는 건 물론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삼청교육대식의 가혹행위가 이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봇대 만한 목봉을 들고, 공수부대 PT체조를 강제로 진행했다. 하루에 기본 두 차례(오전, 오후), 한 번 하면 두 시간 가량 이러한 가혹행위를 당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헌병들은 자기들 기분이 안 좋다 싶으면 언제든 우리를 불러냈다. 한 번 봉체조를 하면 화장실에 제대로 앉지 못할 정도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폭력이 동반된 조사는 상무대에서도 계속됐다. 상무대에선 검찰관 심문에 순순히 대답하지 않는다며 수차례 폭행을 당했다. '예스(yes), 혹은 노(no)'로 대답하지 않으면 주먹이 날라오고 이른바 '쪼인트'를 까였다. 1m 쯤 되는 대형 곡괭이 자루로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7월 2일, 군법무관 서○○ 중위는 나를 '포고령 위반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이어 8월 8일, 전교사 계엄보통군법회의가 진행한 1심 재판에서 나는 혐의가 모두 인정돼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형을 선고받았다.

465일 동안의 수감생활

나의 무죄를 주장하며 다퉈줄 것으로 생각했던 김○○ 변호사는 반대 심문 없이, 오직 정상참작을 요청하는 1분의 변론으로 나를 실망시켰다. 영화에서 봐왔던 피고인을 위한 변호사의 치열한 변론은,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란 걸 느꼈다.

나는 이 사건의 불합리함을 말하고자 "앞으로 나와 같은 불행한 사람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진술했다. 이 진술을 들은 재판관은 "피고인은 사회에 불만이 있나"라고 반문했다. 나는 용기 없이 "그렇지 않다"고 짧게 답했다. 당시 상무대 영창에는 정동년, 정상용, 김종배, 박남선, 허규정씨와 명노근, 송기숙 교수, 윤영규 선생 등 5·18 항쟁의 주역들로 중형 혹은 사형 선고 얘기가 돌던 분들이 수두룩했다. 그런 공포스런 분위기 속에서 편지 두 통짜리 사건자인 내가 어찌 법정에서 길게 이야기할 수 있었겠나.

재판이 끝난 8월 어느 날, 강원도 양양에 거주하던 부모님이 나를 면회하기 위해 상무대 영창을 찾았다. 내가 구금되기 전 속초우체국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는 그 사이 근무지가 바뀌어 인근 동해안경비사령부 내 군사우체국장으로 발령이 나 있었다.

때문에 내 사건의 사정을 알아봤는데, 당시 신군부는 5.18 소식이 타 지역에 전파되는 걸 막았고, 내 편지는 강릉 지역 보안부대에 걸렸다고 했다. 누군가 나 같은 희생자를 제물로 검거 실적을 올리려고 했거나, 애국심을 빙자한 공명심에 저지른 반민주적 행위였다.

1980년 뜨거운 여름을 광주 상무대 영창에서 보낸 뒤, 나는 8월 말쯤 항소심을 위해 서울 성동구치소로 이감됐다. 나는 1심 재판에서 변호사만 믿었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항소심을 준비했다. 하지만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2월 2일 열린 육군 계엄고등군법회의는 항소 기각 판결을 내렸다. 이어 1981년 1월 24일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포고령 위반 혐의의 면소 판결을 기대하며 상고했으나, 1981년 4월 14일 대법원 역시 상고를 기각했다. 이 과정에서 재판부는 구금일수 중 상당일을 형기 산입에서 제외했다. 괘씸죄 적용이란 확신이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징역 1년형을 받고도 처음 구금(1980년 6월 5일)된 이후 465일이 지난 1981년 9월 12일, 형기만료로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했다.

출소 후에도 계속된 감시

감옥 독방에 갇혀 있을 때, 가족이 넣어준 <조선독립운동사> 전집을 읽다가 일제강점기 때 이른바 '편지사건'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은 조선인의 이야기를 발견했다. 아직 우리나라가 인권이 보장된 민주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인권은 출소 이후에도 철저히 짓밟혔다. 강릉경찰서는 내가 전주에서 수사받을 당시 우리 동네에 와 신원조사를 진행했고, 정보과 형사들이 나의 대공혐의점을 찾기 위해 동네 주민들을 대상으로 탐문을 진행했다. 이때 형사들이 하고 다니던 말이 동네에 소문이 나서, 나는 이미 동네에서 '빨갱이'가 돼 있었다.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하던 날에는 아버지, 이모부와 함께 낯선 이 한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속초경찰서 정보과 형사 이○○ 경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내가 "5.18 관련 반공법 위반 수형자로 보안처분 대상자이기 때문에 신병을 접수하러 왔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따라 속초경찰서에 가 보안처분 대상자 신고를 했다.

1982년 3월, 나는 대학에 복학해 춘천의 하숙집에 살았는데, 내가 사는 하숙집 담장 너머엔 항상 정보과 형사들이 기웃거렸다. 보안처분 대상자였기 때문에 그들은 내 동향을 점검했던 것인데, 경찰의 감시를 받는 데 따른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수형 생활 때부터 겪었던 악몽과 가위눌림, 스트레스에 따른 신경성 위염, 위궤양, 두통 등으로 약봉지를 달고 살아야만 했다.

1983년 11월 나는 서울에 있는 어느 상장회사의 취직 면접을 봤다. 다른 합격자들로부터 내가 최종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끝내 회사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신원조회에 걸린 것이다. 이때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은 나를 지금까지 은둔자로 만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1983년 12월 23일, 나는 성탄절 특사로 복권됐다. 하지만 경찰의 감시는 계속됐다. 1984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 중랑구 친척집에서 1년간 신세를 졌는데 이때도 태릉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을 친척집 인근에서 자주 마주쳤다. 이러한 생활은 1985년 1월 17일자로 보안처분이 면제될 때까지 계속됐다.

'5·18은 월요일'에 불과하던 어느날, 잊었던 남자가 왔다


▲ 5.18 당시 전경으로 광주 소식을 편지로 알리려다가 포고령·반공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산 김상회씨. ⓒ 이희훈

1980년 5월, 전북 전주에서 전투경찰로 근무하던 나는 광주 소식을 편지에 담아 가족들에게 알리려다가 포고령·반공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살았다. 출소 이후에도 정보과 형사의 감시를 벗어날 수 없었던 나는 결국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1987년 2월, 나는 강원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곧바로 취직을 생각했으나, 학부 시절 취직 실패 경험에 따른 트라우마 탓에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특히 과거 전력을 이유로 취업에 또 탈락하면 내 사건이 처가에 알려질까봐 두려운 마음이 컸다(1988년 2월 결혼). 아내와 큰처남 외엔, 처가 식구 아무에게도 내 과거를 알리지 못했다. 1989년 3월, 나는 결국 태어난 지 2주일 된 딸과 아내를 남겨놓고 일본 유학을 떠났다.

1990년 4월 그나마 아내와 딸을 일본으로 불러 일본 생활을 지속하려고 했으나, 1995년 갑자기 안면이 마비되는 증상이 오기 시작했다. 5.18 때문에 쌓인 각종 스트레스가 축적된 데 따른 증상이었다. 신경외과를 몇 차례 찾았으나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고, 1998년 또 한 차례 중증 안면마비 증상을 겪었다. 더 이상 공부에 신경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마침 첫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져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2000년 6월 귀국을 결심했다.

어느 날, 잊었던 동지가 찾아왔다

귀국했으나 여전히 취직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언제 중증 안면마비가 다시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지금도 가끔 경미하게 나타나는 안면 떨림 증세 때문에 운전도 할 수 없다. 지금 22살인 막내까지 아이 셋을 키우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자식들을 태우고 운전을 해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지방 여행은 2001년 5월 광주를 찾은 것이다. 그때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했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광주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라고 생각했던 내 개인사를 더듬으며 희생자들의 숭고한 넋을 기렸다.

아무튼 얼마 전까지, 여전히 나는 사회적 은둔자였다. 내 이야기를 밖으로 내놓지 못한 것은 물론 사람 만나는 것조차 꺼렸다. 결혼 전 내 과거를 고백하자 "우리를 위해 포장마차에서 장사라도 하겠다"고 말했던 지금의 아내 덕분에 삶을 이어왔다.

1980년 이후, 그렇게 살아왔던 36년 삶에 한줄기 빛이 스며들었다. 지난 2월 18일 오후 5시 쯤, 초인종이 울려 문을 열었더니 웬 남성이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전에 잡상인들이 종종 초인종을 눌렀던 터라 별 생각 없이 남성을 내보내려는데,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육군 35사단 헌병대 영창에서부터 서울 성동구치소까지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이상호 선생이었다. 이 선생은 당시 전주 신흥고등학교 교사였는데, 1980년 5월 27일 신흥고등학교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1년 4개월 동안 복역했다. 이 선생은 "8개월 넘게 수소문한 끝에 김상회 너를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15년 '5.18피해자 (추가)보상신청법안'이 만들어지고 그해 6월 30일까지 신청 작업이 진행되자, 이 선생은 나를 찾아나섰다. 그간 보상신청 명단에 내가 없었던 것을 안 이 선생은 내게 보상신청을 권유하기 위해 수소문을 시작한 것이다.

이 선생이 나를 찾기까지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강원도청, 강원대학교 등 공기관은 물론, 강원도의 지인을 동원해 나를 수소문했지만 돌아오는 건 "강원도에서 2015년 5월 18일은 그냥 월요일에 불과하다"는 싸늘한 대답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 선생은 광주에 있는 안종철 박사(전 5.18 기록물유네스코 등재 추진단장)를 알게 됐고, 안 박사에게 광주광역시청 인권평화협력관실을 소개받았다. 결국 5.18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인권평화협력관실의 정보를 통해 나를 찾아올 수 있었다.

눈물이 나왔다. 나를 찾기 위해 그토록 노력해준 이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36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다시 36년 전 일을 꺼낸다는 게 쉽지 않겠지만, 실제로 나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은 분들이 많기 때문에 그 동안 움츠리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마침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제 7차 보상 작업에 들어간다고 해, 올해 2월 말까지 진행되는 '연행, 구금, 수형' 분야 신청을 마쳤다.

내 기억이 5.18 기록의 한 조각이 되길 바라며


▲ "이 사건의 당사자인 누나와 동생, 그리고 이런 나와 결혼해 지금까지 고생한 아내를 위해 더 마음을 다잡을 예정이다. 특히 36년 전 아빠가 겪은 일을 지금껏 한 마디도 해주지 못한 두 딸과 아들에게 이 기사를 빌어 처음 고백한다. 엄마를 통해 얼핏 들었겠지만, 이젠 아빠의 입으로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용기낸다" ⓒ 이희훈

이렇게 마음을 먹으니 가족들이 떠올랐다. 36년 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수도 없이 사퇴 압력을 받아왔다. 형이 확정된 1981년 4월 14일엔 이미 연좌제가 폐지(1981년 3월 25일)된 상황이었음에도, 아버지는 자신의 상사로부터 사표를 쓰라는 말을 수차례 들어야 했다. 그 아버지가 지금 84세 할아버지가 돼 있다.

아들 얼굴 한 번 보려고 강원도 양양에서 광주 상무대까지 그 먼 길을 달려왔던 어머니는 지금 83세 할머니가 돼 있다. 나중에 들은건데, 어머니는 교도소에 있는 아들 걱정에 한겨울에도 난방을 안 하고 살았단다. 그 추운 강원도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이 사건의 당사자인 누나와 동생, 그리고 이런 나와 결혼해 지금까지 고생한 아내를 위해 더 마음을 다잡을 예정이다. 특히 36년 전 아빠가 겪은 일을 지금껏 한 마디도 해주지 못한 두 딸과 아들에게 이 기사를 빌어 처음 고백한다. 엄마를 통해 얼핏 들었겠지만, 이젠 아빠의 입으로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용기낸다"라고 말하고 싶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마지막으로 5.18 영령들의 원혼과 그들의 숭고한 의미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여전히 치유가 안 된 살아남은 분들도 어서 마음의 위안을 찾길 바란다. 나로 인해 5.18의 조그마한 기록 한 조각을 정리한다는 의미를 되새기며 이 글을 마친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0년 5월 22일, 금 3:01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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