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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경제
 
'재벌 사모님' 운명 딛고 역사의 중심에 서다
[한국 기업인 열전 9] 대북사업 이어받은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


▲ 지난 2011년 12월 2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조문을 위해 방북하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과 함께 경기도 파주 도라산출입사무소를 통해 북으로 출발하고 있다. ⓒ 권우성

(서울=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 남편 대신 현대그룹의 적통을 이어받다

'재벌 사모님'으로 계속 살 수도 있었지만, 본의 아니게 재벌 총수로 변신하고 역사의 중심에까지 내몰리게 된 인물이 있다. 바로,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이다.

현대그룹은 2000년 무렵까지만 해도 삼성그룹과 더불어 재계 서열 1, 2위를 다퉜다. 하지만, 2000년 '왕자의 난'으로 인한 계열사 분리와 2001년 정주영 명예회장의 사망 이후로 크게 위축됐다.

요즈음 '현대'를 대표하는 기업은 현대그룹이 아니라 현대자동차그룹(현대차그룹)이다. 정주영 둘째아들인 정몽구 회장이 이끄는 현대차그룹은 2019년 5월 15일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59대 기업집단 중에서 삼성그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자산 총액 5조원 이상의 재벌그룹들이 포함된 이 기업집단 명단에서 정몽준(정주영 6남)의 현대중공업그룹은 10위, 정지선(정주영 3남인 정몽근의 장남)의 현대백화점그룹은 21위에 기록됐다. '현대'의 적통인 현대그룹은 2003년에 15위, 2015년에 29위였다. 2019년에는 59위 내에도 들지 못했다. 정통성은 현대그룹에 있지만, 대표성은 현대자동차그룹에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삼성그룹 이병철은 후계자 1명에게 경영권을 가급적 몰아준 데 비해, 현대그룹 정주영은 여러 아들에게 나눠줬다. 죽기 전에 정주영은 5남 정몽헌에게 건설·전자 부문을, 2남 정몽구에게 자동차 부문을 떼어주기로 결정했다.

현대차의 위상이 지금보다 낮았던 그 당시, 그런 조치는 정주영이 5남을 더 높게 평가하고 후계자로 생각했음을 보여줬다. 이에 대한 불만이 2000년 3월 정몽구-정몽헌의 경영권 분쟁으로 이어졌다. 현대그룹 왕자의 난이 발발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정몽구 등이 떠나면서 현대그룹이 위축된 측면도 있지만, 2003년에 정몽헌을 계승해 회장이 된 현정은의 '혈통' 역시 그룹 위축에 영향을 끼쳤다. 왕실과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되는 재벌 가문 내에서 며느리의 정통성은 사위의 정통성보다 낮을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은 정몽헌 사후에 현정은 회장이 정상영 KCC 회장(정주영 동생)과 정몽준 등으로부터 경영권 공격을 받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정상영이 현정은을 배척하며 내세운 논리 중 하나가 '현정은은 정씨가 아니다'라는 점이었다. 정씨 기업을 현씨한테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경영작가 임희정이 쓴 현정은 이야기인 <이기지 못할 도전은 없다>에 따르면, 정상영은 "현재는 현대상선·현대증권·현대엘리베이터 등만 남았지만, 현대그룹은 무엇보다 정주영 회장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회사"라며 "정통성을 위해서는 정씨가 회사를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3년 당시, 현정은과 정몽헌 사이에는 정지이(1977년 생), 정영이(1984년 생)라는 딸과 정영선(1985년 생)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당시 이들은 26세·19세·18세였다. 정상영은 현대그룹이 현정은을 거쳐 장녀 정지이에게 계승될 가능성을 거론하며 '딸은 결혼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논리를 폈다. 현대그룹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갈 가능성을 거론한 것이다.

결국에는 경영권 공격을 방어했지만, 현정은은 시아버지 때보다도 훨씬 작고 남편 때보다도 작은 현대그룹을 이끌어야 했다. 현대그룹의 정통성은 정주영과 정몽헌을 거쳐 현정은에게 넘어갔지만, 현정은이 이끄는 그룹은 현대차·현대중공업·현대백화점 등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다. 정통성을 쥐고 있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초라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지난 2019년 9월 30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19기 출범식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며느리의 가방을 받아준 시아버지 정주영

현정은은 한국전쟁 휴전 2년 뒤인 1955년 1월 26일 김문희와 현영원의 딸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아버지 현영원은 한국은행 도쿄지점 계장이었다. 현영원은 1964년에 신한해운을 창립했다. 신한해운은 1984년에 현대상선에 흡수됐다.

경기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현정은은 대학 4학년 때인 1975년(20세) 초에 아버지를 따라 울산에 가게 됐다. 현대중공업의 선박 명명식을 참관하기 위해서였다.

선박 건조는 출산만큼이나 힘들다. 그래서 대형 선박의 명명식이나 진수식 때는 여성이 샴페인을 터뜨리는 관례가 있다. 예컨대, 1954년 세계 최초의 원자력잠수함인 노틸러스호의 진수식 때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부인인 매미 다우드 아이젠하워가 행사에 참석했다.

이런 행사는 1970년대 한국에도 많았다. 1975년 1월 18일자 <경향신문> 기사 '선박 진수·명명식, 여성만의 시련 순간'은 "우리나라에서도 대형선박 건조가 늘어남에 따라 배의 진수·명명 등과 관련된 독특하고도 화려한 의식이 자주 행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선박 명명식이 빈번했던 시절에 대학생 현정은이 아버지를 따라 울산에 가게 됐던 것이다.

그가 아버지를 따라 명명식에 가게 된 것은 샴페인을 터뜨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다른 누군가의 '계획'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기지 못할 도전>은 이렇게 말한다.

"그곳에 도착하자 한 어른이 직접 가방을 받아주며 안내하기에 그냥 회사 관계자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저녁 리셉션에서 그 어른이 정주영 명예회장이란 소개를 받고 깜짝 놀랐다. 훗날 각별한 정을 준 시아버지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날 정 명예회장은 그녀를 아들 몽헌의 배필로 낙점했다. 평소 현영원 사장과 혼담을 주고받았던 터에 막상 실제로 보고 나니 맘에 쏙 들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현정은과 정몽헌의 연애가 시작됐다. 태릉사격장에서 총을 쏘며 데이트하기도 했다. "현 회장은 학업도 마쳐야 하고 연애를 좀더 하면서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정주영 회장은 서둘러야 한다며 속전속결로 밀어붙였다"며 "데이트하고 들어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아들을 불러놓고 '오늘은 청혼했느냐'고 다그치곤 했다"고 위 책은 말한다. 두 사람은 만난 지 1년 만인 1976년 7월 결혼했다. 현정은은 21세, 정몽헌은 28세였다.

신혼생활은 대학원 공부와 함께 시작됐다. 결혼한 그해에 현정은은 이화여대 사회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거기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그 뒤에는 페어리디킨슨대학교대학원 인성개발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이처럼 학업과 가정생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그의 삶은 48세 때인 2003년 갑자기 현대그룹 경영무대의 한 가운데로 소환됐다. 그룹 회장인 정몽헌이 그해 8월 4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 데 따른 결과였다.

정몽헌은 김대중 정권의 2000년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현대그룹이 4억 달러를 북한에 지원했다는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안 그래도 경영난을 겪고 있던 그에게는 엎친 데 덮치는 격의 시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현대사옥 12층에서 떨어져 유명을 달리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현정은이 그룹 경영의 전면에 서게 된 것이다.

남북관계의 명운까지 두 어깨에

현정은의 회장직 취임은 현대그룹 경영권의 승계라는 측면과 동시에 남북경협인 금강산 관광사업의 승계라는 측면을 함께 띠었다. 현대그룹의 운명은 물론이고 남북경협의 명운까지 그의 두 어깨에 놓이게 됐던 것이다. 재벌 사모가 갑작스레 그룹 경영 한가운데로 불려나온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한반도 정치의 중심으로까지 소환된 것이다.

현대아산(현대그룹 계열사)의 금강산 관광사업은 한반도 통일과 북방 진출에서 제2의 현대그룹을 모색했던 정주영의 뜻이 담긴 사업이다. 1998년 시작된 이 사업은 초기의 폭발적인 관심도에 비해 경영 성과는 그다지 시원치 않았다. 자금난과 관광객 감소에 더해 대북 지불금 연체로 인해 2001년에는 사업이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그해 6월 한국관광공사가 사업에 동참하고 대북 지불금이 감액되면서 숨통을 트게 됐다. 그에 더해, 2002년 4월에는 남한 정부가 관광경비를 보조해주기로 하고, 11월에는 북한 정부가 금강산관광특구를 지정해줬다. 2003년 남한 정부의 경비 지원이 중단되면서 관광객이 다시 감소했지만, 그해 9월 육로관광이 본격화되면서 다시 활력을 띠게 됐다.

이런 상태에서 현정은은 대북사업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무난히 이끌었다. 현대 일가의 경영권 공격을 방어하는 중에도 남북경협을 순조롭게 진행시켰던 것이다. 국민과 정부의 지원에 더해 현대아산 노동자 및 주주들의 공이 컸지만, 현정은의 역할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에 박왕자씨 피격 사건으로 중단될 때까지 현정은은 이 사업을 잘 이끌고 나갔다.

1975년 처음 만난 그날, 정주영(60세)은 마치 회사 직원인 듯한 태도로 현정은(20세)의 가방을 들어주며 환대를 베풀었다. 이것이 현정은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현정은은 정주영 사후에 시아버지의 뜻이 담긴 금강산 사업을 넘겨받아 순탄하게 이끌었다. 현정은 역시 정주영의 '가방'을 들어줬다고 볼 수 있다.

12년째 중단 상태인 남북경협은 현대그룹에 이익을 줬는지 여부를 떠나서 민족의 내일이 걸린 일일 뿐 아니라 현대그룹의 정통성과도 직결되는 사업이다. 현대그룹은 박정희 정권기의 정경유착이나 노동자 탄압 등으로 부정적 역사를 갖고 있는 동시에, 정주영의 소떼 방북과 금강산 사업 등을 계기로 민족의 화해와 평화에 기여하는 기업이 됐다.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아산은 지주회사는 아니지만 대북사업의 운영 주체라는 점에서 이 그룹의 정통성을 담고 있다. 현대 일가의 경영권 공격을 받는 와중에도 현정은이 대북사업과 현대아산을 지킨 것은 그가 시아버지의 뜻을 잘 간직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씨는 아니지만 정씨 집안의 정통성을 잘 계승한 셈이다.

규모가 현저히 위축된 오늘날의 현대그룹이 예전의 영광을 회복하는 길 중 하나는 바로 그 정통성의 회복에 있다. 대북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야만 현대그룹은 민족 전체와 남북 정부의 지원 속에 안정적으로 번영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북사업 재개 앞에 적지 않은 장애물이 있다. 무엇보다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이 최대 장애물이다. 4·15 총선으로 약해지기는 했지만, 국내 보수세력의 비토도 넘어야 할 장애물이다.

하지만, 촛불혁명 이후 달아오르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기운은 현정은과 현대그룹의 미래에 긍정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1980년대 초반에 미국 문화원들이 연달아 방화되는 수모를 겪은 뒤로 미국은 한국 정부는 만만히 보면서도 한국 국민은 상당히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미국이 부담스러워하는 한국 국민들이 지금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금강산 관광과 더불어 개성공단 등의 남북경협이 조만간 활성화되리라는 전망을 갖게 하는 징후다. 이런 정세 변화에 현대그룹 노동자들과 주주 그리고 현정은 회장이 어떻게 대처할지 주목된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0년 5월 16일, 토 2:53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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