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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재난과 묵시
[열린창] 팬데믹이 드러낸 것들과 우리가 보아야 할 것들


▲ George Rouault, "Arise, Ye Dead!," plate LIV from Miserere (사진=조르주 루오의 '미제레레 연작'에서)

(뉴욕=뉴스M) 권건우 목사(로욜라 대학 박사과정)

코로나바이러스 묵시록?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막 4:22, 새번역)

코로나바이러스로 온 세상이 멈춘 것처럼 보입니다. 좀 더 과장해서 말하면,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가 알고있던 세상을 '끝장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팬데믹 이전'(pre-pandemic)과 '팬데믹 이후'(postpandemic)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지요. 미국 록 밴드 R.E.M.의 노래 제목처럼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의종말입니다" (It's the End of the World as We Know It).

이런 팬데믹 상황에서 미국과 한국의 일부 목회자들은 코로나바이러스를 죄악된 세상에 대한 신적 심판으로 해석하는 발언을 공적으로 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침례교 목사 존 파이퍼(John Piper)는 최근 어느 팟캐스트 대담에서 코로나바이러스를 신적심판이라고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그분을 거부하고 자신을 죄에게 내어준 이들을 특별히 심판하기 위해 질병을 사용하신다.")

더 나아가, 최근 미국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는 팬데믹을 하나님의 종말론적 섭리의 일부로 이해하고자 하는 흐름들도 있습니다. 최근 뉴욕타임즈 기사에 따르면, 적지 않은 미국의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코로나바이러스를 '말세의 징조'로 해석하고 있으며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 바이러스를 '신적 리셋'(divine reset)이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철학자 서보명에 따르면, 미국의 문화와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묵시적 종말론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서보명, 미국의 종말론: 종말론의 관점에서 미국을 말하다 (아카넷, 2017). 미국의 묵시적 종말론과 복음주의의 관계에 대한 최근의 역사적 연구로는 이 책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Matthew Avery Sutton, American Apocalypse: A History of Modern Evangelicalism (Belknap Press, 2017).

존 넬슨 다비, 할 린지와 같은 극단적인 세대주의종말론자들은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문학에 기반하여 도피주의적 종말론을 제시해왔지요. 즉, 종말이 매우 임박했으며, 각종 재난으로 혼란스러운 종말의 때에 선택받은 이들은 공중으로 들려올려 구원받을 것이며, 남겨진 타락한 세상은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묵시문학이 형성되고 재해석되어 온 서구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해 볼 때,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묵시문학의 상징 언어를 팬데믹이라는 불확실한 위기 상황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은 그리 새롭거나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묵시적 해석은 어떤 면에서 문제적일까요?

묵시의 잘못된 사용에 반대한다

전문가들의 추정에 따르면, 현재의 팬데믹 상황은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인간이 자연을 파괴한 결과 서식지를 잃은 동물들이 인간들의 세계에 더 가까이 들어오면서 인수공통 질병(zoonotic diseases)이 퍼진 결과입니다. 팬데믹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행위의 결과이지 하나님의 행위성이 개입된 사태가 아니라는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를 종말론적 심판의 대행자로 해석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윤리적으로도 정당화되기 어렵습니다.

바이러스로 인해 벌어지는 죽음과 고통의 배후에 하나님의 종말론적 섭리와 계획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선하고 정의로운 하나님에게 '악'을 귀속시키는 신학적 문제를 낳습니다. 적어도 주류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시지만 (allow), 결코 악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키시지는(cause) 않습니다. 고통하며 신음하던 모든 피조물(롬 8:22)이 죄와 죽음의 질서에서 해방되는 것이 기독교의 종말론적 비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코로나바이러스를 종말의 수단으로 보는 해석은 성서와 기독교 전통이고백하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서 한참 동떨어져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묵시적 해석이 빠질 수 있는 또 하나의 흔한 위험은 도피주와 정적주의(quietism)입니다. 쉽게 말해, 팬데믹 상황이 하나님의 종말 계획의 일부라면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인간이 굳이 노력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임박한 휴거를 기다리며 가정과 직장을 버렸던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모여 기도하며 어딘가에 있을 낙원으로 옮겨질 것을 소망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의 <신국론>에서 임박한 종말을 설파하는 천년왕국설을 거부하며 기독교인들은 종말론적 평화를 바라보지만 동시에 지상에서 공적인 삶에 참여하여 유한한 평화(temporal peace)를 추구해야 하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세상 속'에서 신실하게 현존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타계적인 천국만을 바라보는 것은 심각한 책임의 방기입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 계시로서의 팬데믹

그렇다면, 지금의 팬데믹 상황과 묵시적 종말론을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은 폐기해야 할 위험하고 유해하기만 한 접근일까요? 저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팬데믹 상황을 '묵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묵시' 개념을 제한적으로 사용한다는 전제 하에서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영어 단어 '아포칼립스'는 종종 재난과 종말의 상황에서 사용되지만, 본래 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apokalypsis)는 말세나 세상의 종말보다는 '계시'(revelation 또는 unveiling)를 뜻합니다. 문자적으로 말하면, "베일을 들추어 그 뒤에 가려져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묵시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팬데믹을 은폐되었던 진실을 드러낸 일종의 '계시'라는 측면에서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 이 팬데믹 상황은 우리가 그동안 정상(normal)이라고 여겨왔던 이 세계의 시스템이 얼마나 병들어 있고 폭력적이며 많은 약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어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폭로했습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자본주의 질서에 가해진 균열을 통해서 우리는 이 시대가 겪고 있는 사회적 병폐와 구조적 모순이 무엇인지 좀 더 분명하게 인식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팬데믹은 파국적인 방식으로 진리가 '탈은폐'된 사건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팬데믹이 드러낸 이 세계의 진실, 그리고 민낯은 무엇일까요? 먼저, 팬데믹은 우리 인간이 생태계의 꼭대기에 서서 자연을 통제하고 다스리고 이용하는, 무적의 주권자(invulnerable sovereign)가 아니라, 너무나 쉽게 쓰러지고 생명을 잃는 취약한 존재임을 드러내었습니다. 바이러스를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생명을 위협당하는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가 인간임이 드러났습니다.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아담)도 결국은 '숨쉬는 흙덩어리'임을 팬데믹은 다시금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팬데믹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기체의 운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었습니다. 현대 미국사회는 개인이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개인주의와 독립성의 신화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서로서로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매우 역설적인 방식으로 확인했지요. 상대방의 숨결을 통해 전달되는 바이러스가 나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고, 그래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서로로부터 단절되고 고립되어서는 이 위기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깊이 필요로 하는, 서로를 돌보고 돌봄 받아야 하는 상호의존적 존재입니다. 이 상호-얽힘의 관계는 인간 사회를 넘어 전지구적 생명 공동체에까지 확장됩니다.

더 나아가, 펜데믹은 자유와 평등의 원리 위에 세워진 현대 미국의 민주주의-자본주의 사회가 얼마나 기만적일 수 있는지를 드러내었습니다.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공동체에서 "자유로운 개인들"이 얼마나 쉽게 위험에 노출되는지 드러났습니다. 또한, 원칙적으로는 평등한 시민들이 사실은 얼마나 경제, 교육, 의료, 주거 등의 영역에서 실질적으로 불평등을 겪고 있는지 드러났습니다. 모든(pan)사람(demos)에게 평등하게 영향을 주는 팬데믹(pandemic)인 것 같지만, 누군가는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고, 누군가는 재택근무를 하면서 식료품을 배달시키고, 누군가는 그 식료품을 배달하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미국 전역에서 인구비율에 비해 코로나 19 로 인한 흑인사망자 비율이 높다는 사실은 인종과 계급, 건강과 불평등의 문제가 여전히 너무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에 더해 팬데믹은 미국사회에서 점점 노골화되는 외국인혐오(와 인종주의를 드러내었습니다. 팬데믹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식들은 미국 내에서 아시아계 이민자나 낯선 이들을 향한 혐오와 편견, 차별과 폭력이 얼마나 잠재되어 있었는지 보여줍니다. 대통령이 "중국산 바이러스"라는 말을 공개석상에서 하면서 외국인혐오와 인종차별을 부추기고 급기야 "보이지 않는 적"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모든 이민을 보류시키는 곳이 현재의 미국입니다.

팬데믹이 보여주는 것: 역설적이고 부정적인 계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팬데믹을 일종의 계시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팬데믹을 사용하셔서 우리 인간에게 교훈을 주고자 하신다"는 주장과는 별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팬데믹으로 인간을 심판하시고, 종말을 일으키신다"는 주장이 신학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려운 것처럼, "하나님께서 팬데믹을 통해 탐욕에 물들어 자연을 파괴한 인간을 교훈하신다"는 주장 역시 (동일한 이유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예컨대, 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를 통해 인류가 인간 존엄성과 인권에 대해 큰 교훈을 얻었다고 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을까요? "아우슈비츠는 하나님이 인간을 깨우치기 위해 사용하신 수단이었어." 저는 이런 신학적 주장은 외설적인(obscene)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팬데믹을 '계시'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팬데믹은 매우 기이하고 역설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오직 그런 의미에서만) 계시입니다. 이는 췌장암에 걸렸으나 알지 못했던 사람이 어느날 심각한 복부통증을 경험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사람에게 이 통증은 계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즉, 이 통증은 그동안 숨겨져 있었던 것이 드러나는 계시-사건이겠지요.

그러나 이 통증을 '선한 것' 또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은 그 자체로는 선하지 않으며 미화되어서 안 됩니다. 최근 신학자 캐런 킬비가 주장했듯, 고통을 이 피조세계 안의 일부로 받아들이는(accept) 것과 이를 적극적으로 포용하고(embrace), 경축하는(celebrate)하는 것은 다릅니다.

팬데믹은 계시이되, 역설적이면서 부정적인 계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팬데믹이 드러낸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정의로움, 이 세계의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 아닙니다. 팬데믹은 죄로 인해 부서지고 상처입고 병든 이 세계의 민낯을 드러내는 계시입니다. 팬데믹은 우리에게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아름다움인지를 긍정의 방식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 어긋남과 불의, 추함이라는 부정의 방식(via negativa)을 통해 이 세계를 보여줍니다. 종말론적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인간이 만들어놓은 폐허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폐허를 응시하게 합니다.

팬데믹 시대의 희망

최근 뉴스와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간 재난의 이미지가 하나 있습니다. 뉴욕 시에서 발생한 수많은 사망자들의 시신이 센트럴 파크에 설치된 임시병원에 보관된 사진이 그것입니다. 이 글을 퇴고하고 있는 지금, 미국의 사망자는 7 만 5 천명을 훌쩍 넘었고 전세계 사망자는 27 만 명에 육박합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포스트- 팬데믹 상황을 예측하면서 "뉴노멀"에 관한 암울한 전망을 내어놓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아마도 가장 안전한 기독교 신학의 답변은 "희망은 종말의 때에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정의롭고 평화로운 통치에 달려 있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종말론적 희망을 온전히 붙잡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것은 바로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폐허를 계속 응시하는 것입니다.

전후 독일의 정치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역사 속 희생자들의 고통과 불의를 직면하고 탄식하는 정치적/영성적 실천이 없이는 진정한 종말론적 희망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눈 앞에 마주하고 있는 이 비극을 재빨리 교리적인 언어로 설명해버리기(explain away) 보다는,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미래에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을 재빨리 가리키기보다는, 지금 팬데믹이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는 이 세계의 진실이 불편하다고 외면하지 않고 그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트라우마를 오랫 동안 연구한 신학자 셸리 램보는 팬데믹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 성 금요일과 부활절 사이의 토요일과 같다고 말합니다. 즉,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께서 아직 무덤에서 나오지 않은 그 어두운 심연의 시간, 침묵과 부재의 시간 말이지요. 이 시간은 죽음과 생명 사이의 불확실하고 모호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시간이야말로 옛 질서가 무너지고 새 질서가 움트는 시간일 지 모릅니다.

묵시로서의 팬데믹이 보여주는 일말의 희망이 있다면, 그 희망은 바로 이런 불확실성과 위기의 순간에 확실한 정답에 의지하기보다 침묵과 애도, 그리고 이웃의 고통에 대한 응답을 선택하는 이들을 통해 생겨나는 것 아닐까요. 이런 희망은 '다 잘 될 것'이라는 손쉬운 낙관주의는 아닐 것입니다. 희망에 저항하는 희망 (Hope Against Hope), 불확실성을 껴안고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용기내어 한 발 딛는 희망, 불안과 고립의 시대에 타자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 두려움이 아닌 새로운 방식의 연대를 추구하는 희망일 것입니다. 재난이 남긴 잔해 위에서 피어난 연약한 꽃과 같은 희망일 것입니다. (본보 제휴 <뉴스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0년 5월 15일, 금 7:2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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