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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가난한 사람과 하늘나라
[읽는설교] 마 5:1-12

(서울=샘터교회) 정용섭 목사 = 새해를 맞을 때마다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덕담을 나눕니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Happy new year!”라고 하겠지요. 영어의 ‘해피’나 우리말의 ‘복’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인류 공동의 염원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늘 행복하게 사는 게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개인이나 인류 전체나 불행이 없을 때는 없었습니다. 지금도 일상적으로 그런 일은 일어납니다. 행복이 쉽게 깨질 수 있다는 그런 기억이 우리의 무의식에 똬리를 틀고 있기에 행복한 삶의 조건을 성취하려고 우리는 전력으로 질주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여기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삶을 저는 지금 설교 시간에 옳다 그르다 재단하지 않겠습니다. 개인의 삶이 실존적으로 이런 시대정신에 완전히 묶여 있기도 하고, 제가 개인들의 실존에 얽힌 속사정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복음을 전하는 목사로서 성경이 말하는 행복한 삶의 차원을 전할 뿐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우리에게 강요나 유혹의 방식으로 설득하는 행복의 차원과 질적으로 다른 삶입니다. 그 사이에서 판단과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의 공생애 앞 대목에서 그 유명한 ‘팔복’에 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마 5:3-10절까지 여덟 가지 복이 나옵니다. 3절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고, 4절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으며, 5절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6절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7절에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나오고 8절에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나오며, 9절에는 화평하게 하는 자, 10절에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나옵니다. 모두 여덟 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여덟 가지 복에 관한 마태복음 기자의 진술에 동의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십니까?

헬라어 성경에 따르면 각각의 문장은 ‘마카리오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마카리오이는 “행복할 것입니다.”라거나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잘 표시가 안 되지만 원래 헬라어 성경에는 시처럼 운율이 있는 문장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보면 11절도 ‘마카리오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그렇게 보면 전체가 여덟 개의 복이 아니라 아홉 개의 복입니다. 다만 11절 문장은 2-10절 문장의 삼인칭과 달리 2인칭이라서 신학자들이 이를 따로 구별합니다. 11절은 앞에 나오는 여덟 개 복이 제자들의 실제 삶에서 현실이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덟 개의 복을 보십시오. 여덟 개 문장에서 각각 한 단어씩 추리겠습니다. 가난, 애통, 온유, 의, 긍휼, 마음 청결, 화평, 박해입니다. 한 눈으로 볼 때 가난과 애통, 그리고 마지막 박해는 우리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외의 것들은, 즉 온유와 의와 긍휼과 마음 청결과 화평은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필요한 좋은 점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것들도 우리가 피하고 싶은 상황을 가리킵니다. 세상에서는 온유한 사람이 살아가기 힘듭니다. 의에 목마르다는 말은 그가 지금 불의에 시달린다는 뜻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도 경쟁 만능의 시대에는 살아남기 힘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전쟁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미움의 대상입니다. 한 마디로 팔복에 열거된 이들은 하나님 외에는 희망을 걸 대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간혹 어떤 이들은 팔복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합니다. 노력하지 않아서, 또는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가난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꼭 그럴까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만 봐서는 정확하게 분석할 수 없습니다. 가난 문제는 사회 구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국제 역학 관계와도 연결됩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한 인간을 평가할 때 경쟁력만으로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머리가 뛰어나지 않으니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대학교에 들어갈 수 없고, 연봉 높은 대기업에 들어갈 수 없고, 대출을 받아서라도 값이 오를 아파트를 살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적으로 장애인들을 경쟁력의 관점에서만 평가한다면 우리는 인간이기를, 특히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포기한 겁니다. 정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힘이 없는 그들의 노력으로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습니다. 여기에 열거된 여덟 가지 어려움이 떨어진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즉 그들이야말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예수의 말은 옳은가요? 값싸고 막연한 종교적인 위로에 불과할까요? 여덟 가지 복 중에서 첫째 복을 중심으로 이 질문의 대답을 찾아보겠습니다.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니 … ”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난하게 살아도 믿음 생활만 잘하면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서 부자로 잘살게 될 테니까 걱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종의 내세주의 신앙입니다. 저는 한편으로 이런 내세주의 신앙에 철저하기만 하더라도 나름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가 수도자처럼 살면 되니까요. 그런데 교회에 굳게 자리한 내세주의 신앙은 철저하게 세속적입니다. 표면은 내세주의이고, 속살은 세속주의입니다. 죽은 다음의 삶만이 중요하다면 지금 보이는 교회당에 관심이 없어야 합니다. 한국에서 지옥과 천당을 강조하는 교회일수록 교회당은 호화롭고, 교회 조직은 기업체 못지않게 거창합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오해되는 또 하나는 숙명주의 신앙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으니 굳이 가난에서 벗어날 필요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악한 사회 구조에 저항하려는 의지를 막아버립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대형교회는 대다수가 사회 구조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건전한 설교자로 명망이 있는 목사들도 개인윤리에만 열을 올리지 사회윤리에 관해서는 입을 다뭅니다. 기독교인들이 개인적으로 착하게 살아야 세상이 달라진다는 말만 할 뿐 구조적인 악에 저항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못합니다. 남북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남북 평화 공존의 길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공산주의자와는 대화가 안 된다거나 통일 이후에 북한에 교회를 세울 계획만 짭니다. 이런 접근이 목사와 신자들에게 편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본문이 말하는 가난을 영적인 차원으로 돌립니다. 실제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본문도 분명히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했기에 그런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에 반해 누가복음 기자는 병행구에서(눅 6:20) ‘심령’이라는 단어 없이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을 것이다.”라고 전합니다. 누가복음이 원래 예수의 발언에 가깝다고 성서학자들은 말합니다. 마태복음 기자도 실제로 가난한 자에 관해서 직접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마 11:2절 이하에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서 예수가 그리스도인지를 묻습니다. 예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다음의 사실을 요한에게 전하라고 이릅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 곧 예수가 행하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이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표현에서 심령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뉴마입니다. 프뉴마는 영, 정신, 바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마틴 루터 성경은 “영(정신)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런 번역을 종합해서 본래의 뜻에 맞도록 이 문장을 다시 다듬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혼이 돈에 치우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은총으로만 주어지는 생명의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늘나라입니다.

예수의 첫 메시지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하늘나라를 향해서 삶의 방향을 바꾸십시오.”(마 4:17)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서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를 향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분산시키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중에 가장 강력한 힘은 재물에서 나옵니다. 돈이 많으면 자신도 모르게 거기에 의존하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가장 많은 것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가기 마련입니다. 장서 마니아는 책 수집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테니스광은 자기 삶을 오로지 테니스에만 몰아넣습니다. 돈이 많으면 돈을 중심으로 자기 인생을 평가합니다. 인격이 좋고, 성품이 원만해서 존경받고, 지식도 많고, 어디 하나 흠잡은 데가 없는 사람도 돈이 많으면 하늘나라를 향해서 돌아서기가 어렵습니다.

돈이 많아도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주장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생활로서의 신앙은 가능합니다. 교회를 잘 다니고 봉사도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생활이 하늘나라를 향해서 회개했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는 자신이 부자로 사는 게 하나님 은혜라고 생각하겠지요. 그의 영혼을 지배하는 세력은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로는 돈입니다. 가난을 두려워하고, 부를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표시는 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돈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돈이 많은 사람은 하늘나라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서는 자신의 많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돈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자포자기만 하지 않는다면 다음의 두 가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새로운 세상을 간절히 기다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가난으로 인해서 인간다움이 파괴되지 않는 세상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불의로 인해서 억울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정의로운 세상을 기원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주기도를 진심으로 드릴 것입니다. 그런 기다림과 기도가 무슨 복이냐, 남부럽지 않게 잘 사는 게 복이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긴 할 겁니다. 다른 이들은 그럴지 몰라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본래 새 하늘과 새 땅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기다림이 없으면 죽은 신앙입니다. 죽은 신앙으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걸 누리지 못하면서도 태평스럽다면 기독교인에게 이보다 더 큰 불행도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가난해도 누릴 수 있는 삶의 신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친구가 너무 많아서, 즐거운 일이 너무 많아서, 돈을 관리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놓쳤던 순간들이 손에 잡힙니다. 그게 무언지 여러분은 경험하셨겠지요. 다른 설교에서도 제가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겨울철이나 이른 봄에 따뜻한 햇볕을 받으면서 무한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책 한 권만 손에 들고도 무한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잘난척하지 않는다면 어린아이와도 몇 시간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게 참으로 역설적인 시츄에이션입니다. 돈이 많으면 누릴 수 없는 삶의 순간들이 돈이 없기에 훨씬 풍성하게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이런 점에서도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저는 진리라고 믿습니다.

하늘나라

예수는 시편 1편 말씀을 염두에 두고 가난한 자의 행복을 선포했을지 모릅니다. 시 1:1-2절을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편의 묘사가 저에게는 팔복에서 가리키는 내용과 같은 것으로 들렸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의 핵심은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늘 들었던 내용이지만 이런 삶이 우리의 영혼에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제 삶과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이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위축되고 메말랐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을 실질적으로 느끼고 경험하려면 하나님이 누군지에 대한 생각이 깊어져야 합니다. 그 생각이 왜곡되면 행복도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는 예수의 발언도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행복한 이유는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오늘 본문 마 5:3절에서 말했듯이 예수는 그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선포했고, 그 사실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저 높은 하늘에 고고하게 머무는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의 삶 전체에 함께하신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그 하나님은 밖으로 드러나는 방식이 아니라 은폐의 방식으로 함께하시기에 어떤 사람에게는 현실(reality)로 경험되나 어떤 사람에게는 막연하게 생각됩니다.

마 13장에는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가 여러 개 나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밭에 감춰진 보화 비유입니다. 마 13:44절은 이렇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밭에 감춰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두 가지 태도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기쁨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 포기입니다. 오늘 설교 주제와 연관해서 두 번째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 사람은 모든 소유를 팔아서 밭을 샀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감춰진 보물을 발견했기에 가난한 사람이 되어도 괜찮았습니다. 이 비유를 혹시 부동산 투기로 읽는 분들은 없겠지요. 땅값이 올라갈 테니, 또는 밭에 묻힌 보물을 팔아서 더 큰 돈을 벌 수 있을 테니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크게 배팅한 거라고 말입니다. 또는 실제로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헌금으로 바쳐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이 비유를 읽는 사람은 없겠지요. 핵심은 하나님을 절대적인 존재로 경험했을 때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우리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복을 실감하게 합니다.

우리 교회는 가난한 교회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우리 교회가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품위를 잃었다거나 비굴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부자 교회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도 않습니다. 부자 교회를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가난하기에 신경 쓸 일이 많지 않아서 오히려 좋은 점이 많습니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긴다면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선교에 좀더 적극적으로 나설 준비는 되어있는, 그야말로 “깨어있는” 교회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기만 하면 복된 교회로서, 즉 존재의 기쁨을 아는 교회로서 부족할 게 없습니다. 개인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올려짐: 2020년 2월 10일, 월 4:41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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